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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치료에 사용되는 한약

암 치료에 사용되는 한약 1. 백영(白英), 촉양천(蜀羊泉) 특히 자궁암이나 유방암에 좋다. 써서 먹기 힘들다. 책에 따라서 유독(有毒)이라고 하지만, 실제는 독성은 문제되지 않는다. 2. 의이인(薏苡仁) 피부암이나 유방암이 체표면에 나타나는 등 표피의 암에 효과가 있다. 사마귀를 잡는 묘약으로 유명하다. 3. 매기생(梅寄生) 말굽버섯 류(類)를 사용할 때는 종단면의 육질을 보고, 세로 섬유질인 것을 선택한다. 말굽버섯에는 삿갓의 종단면(나무를 향해 방사선상에 세로로 절단한 면)을 보면, 육질부가 세로 섬유질인 것 즉 가는 침 같은 다갈색 조직이 연속하고 있는 것과 육질부가 면상(綿状)인 것 등이 있습니다. 그 중에는 두꺼운 가죽 같은 조직이 층을 이루고 있는 것도 있습니다. 효과ㆍ작용에서 비교하면, 항..

사물탕 변방

사물탕 변방 ◆ 지황을 경우에 따라 생/건/숙 잘 분류해서 사용 ​ ◆ 간담에 열이 있을 때는 시호,목단피,지골피,청피를 가미 ​ ◆ 심열이 있을 때는 치자,목단피,황련을 가미 ​ ◆ 소장열이 있을 때는 치자,복령,목통을 가미 ​ ◆ 토(비,위)에 화열이 성하면 간비사화의 작약을 가미 + 위열이 있다면 활석 심하면 석고를 가미 ​ ◆ 폐-대장계통에 화열이 성하다면 황금,천문동을 가미 -대장으로 국한한다면, 지각 혹 심하면 대황을 가미 ​ ◆ 신-방광에 열이 있다면 지모 황백을 쓸 수 있음 ​ ◆ 삼초에 열이 있다면 연교나 현삼을 가하거나 상중하를 다 볼땐 황금 황련 황백 치자를 합하여 응용 ​ ◆ 몸이 냉하면 육계 부자를 동용 ​ ◆ 수→목의 경로를 꺼준다면 지모 황백을 가미 ​ ◆ 어혈이 있다면 도인 ..

여주 세종대왕 영릉 풍수

여주 세종대왕 영릉 부모 묘 근처가 반드시 '명당'은 아니다 ▲ 여주시 능서면 왕대리에 위치한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합장릉인 영릉.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왕대리에는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합장릉인 영릉이 있다. 세종대왕을 이곳으로 이장하고 나서 조선왕조가 100년은 더 연장됐다고 하는 명당이다. 이 때문에 풍수지리를 공부하는 사람들의 필수 답사 코스다. 주말이면 일반인도 많이 찾는데 풍수지리를 알면 더 유익한 여행이 될 것이다. 본래 세종대왕의 능은 서울 강남구 내곡동 지금의 국정원 자리에 있었다. 세종대왕은 생전에 아버지 태종이 묻힌 헌릉 서쪽에 수릉(壽陵)을 정했다. 수릉이란 임금이 죽기 전에 미리 자신의 무덤을 만들어 놓는 것을 말한다. 일반인의 경우는 신후지지(身後之地)라고 한다. 수릉을 정한지 1..

영월엄씨(寧越嚴氏)

영월엄씨(寧越嚴氏) 영월(寧越)은 강원도(江原道) 남부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내생군(奈生郡)인데 통일신라(統一新羅) 경덕왕(景德王)이 내성군(奈城郡)으로 고치고 고려(高麗)초에 영월로 고쳐서 원주(原州)에 편입 시켰다가 공민왕(恭愍王) 때 군(郡)으로 승격 하였다. 조선(朝鮮) 숙종(肅宗) 때 부(府)로 승격하고 1895년(고종 32) 영월군(寧越郡)이 되었다. 가문의유래 영월엄씨(寧越嚴氏)의 시조(始祖) 엄임의(嚴林義)는 한(漢)나라 시인(詩人) 부양(富陽 : 一名 嚴子陵先生)의 후예이며 당(唐)나라 상국(相國) 화음(華陰)의 일족(一族)이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그는 당(唐)나라 현종(玄宗 : 제 6대 임금, 재위기간 : 712~756)이 새로운 악장(樂章)을 만들어 이를..

벚꽃 따라 가는 길 - 침산공원 벚꽃

벚꽃 따라 가는 길 - 침산공원 벚꽃 ■ 침산공원 대구시 북구 침산동. 신천과 금호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우뚝 솟은 산봉우리 하나가 있다. 침산(砧山·121m)이다. 다듬이돌을 닮아 ‘침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설이 있으며, ‘점산’으로 불렸다고도 전해진다. 5개의 봉우리가 있다고 해서 ‘오봉산’으로도 불리운다. 침산 정상에는 침산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침산 정상부에 조성된 침산정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장쾌하기 그지없다. 침산에서는 대구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신천 주변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빽빽하게 들어선 아파트와 도심지역을 굽이굽이 돌아나온 신천이 금호강과 합류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신천·금호강의 합류처 너머로 시선을 향하면 팔공산 봉우리들이 한 폭의 수묵화처럼 겹쳐져 장엄한 풍광을 연출한다. ..

맹사성 생가 풍수

맹사성 생가 풍수 벼슬은 있지만 재물 안모이는 이유 있었네 우리 역사상 가장 뛰어난 재상으로 손꼽히는 맹사성의 생가는 충남 아산시 배방읍 행단길 25에 있다. 이곳을 맹씨행단(孟氏杏亶)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맹사성의 아버지가 이곳 은행나무 아래서 강학을 열었기 때문이다. 본래 행단이란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에서 제자들을 가르친 데서 연유한다. 인걸은 지령이라는 말이 있다. 맹씨행단은 설화산 정기가 집중된 북향집 명당이다. 마을 앞에서 설화산을 바라보면 끝이 뾰족하게 솟은 봉우리가 보인다. 붓끝처럼 생겼다하여 문필봉이라 부르는데 주로 대학자나 큰 인물의 배출을 의미한다. 그러나 문필봉이 보인다 하여 모든 집들이 인물을 배출하는 것은 아니다. 산의 정기가 집중되는 집이라야 가능하다. 산의 정기는 산줄기를 따라 ..

벚꽃 따라 가는 길 - 부인사 벚꽃

벚꽃 따라 가는 길 - 부인사 왕벚꽃 ■ 팔공산 부인사 그리고 왕벚나무 우람하고 아름답기로 전국 제일 신라 천년고찰에서 자라는 국내 최대급 5그루 팔공컨트리클럽 ~ 대구시민테마안전파크~수태골~부인사에 이르는 약 4㎞ 구간의 이곳 벚꽃 길은 팔공산 경관의 백미(白媚) 중의 하나다. 그러나 부인사 왕벚꽃이 눈에 삼삼한 나그네에게는 허접한 벚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우리나라에 많은 나무를 꼽으라면 참나무, 소나무, 벚나무의 순일 것이다. 벚나무는 봄에 그 화사한 봄빛으로 제 존재를 화려하게 알린다. 3~4월에 연분홍색의 꽃을 피우고 6월에 혓바닥을 검붉게 물들이는 버찌가 열린다. 일본의 국화로 알려진 왕벚나무는 사실 제주도 한라산이 원산이다. 제주도에서 어떤 경로로 퍼져나간 왕벚나무가 열도의 국화가 되었다...

한(韓, 漢)씨와 청주한씨(淸州韓氏)

한(韓, 漢)씨와 청주한씨(淸州韓氏) ◆한(韓, 漢)씨는 우리나라에 ‘한’이라는 같은 음을 쓰고 있는 성씨는 둘이다. 하나는 ‘나라이름 한(韓)’을 쓰는 성씨이며, 다른 하나는 ‘한수 한(漢)’을 쓰는 성씨이다. 둘 다 모두 청주와 충주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이다. 그 외 한(韓)씨 중에는 중국에서 건너온 곡산한씨가 있다. 한(韓)씨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성씨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청주한씨 대종회의 주장에 의하면, 준왕(準王)은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으로 연나라 이주민 출신인 위만에게 왕위를 빼앗긴 후 마한을 세우고 국가를 운영했다. 그 뒤 다시 마한이 망할 때, 마지막 왕인 원왕에게는 아들 삼형제가 있었는데, 이들이 바로 우성(友誠), 우평(友平), 우량(友諒)이며, 이들 삼형제는 각각 기씨(奇氏..

벚꽃 따라 가는 길 - 두류공원 벚꽃

벚꽃 따라 가는 길 - 두류공원 벚꽃 ■ 두류공원 / 성당못 달서구의 북동쪽이자 대구의 중심부에 두류공원이 있다. 1977년에 조성된 이 공원은 두류산과 금봉산을 주봉으로 두리봉과 모그동산을 포함하고 있다. 이월드(구, 우방타워랜드)가 들어선 곳은 두류산이고 문화예술회관 뒷산은 금봉산이다. 두류산은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산이 둥글게 펼쳐져 있다고 해서 두리산으로 부르던 것을 지명이 한자화 될 때 같은 의미의 원산 또는 두류봉으로 쓰여오다가 근래에 와서 두류산으로 굳어졌다. 두리봉은 성당못 남서쪽에, 모그동산은 금봉산 북쪽에 있다. 공원은 면적이 51만평. 해발 135m의 야산을 개발해 공원으로 만들었다. 두류공원 순환도로를 걷다보면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옛 문인들의 향취를 맛볼 수 있다. 4.19혁명의 ..

달성(達城), 대구서씨(大丘徐氏)

달성(達城), 대구서씨(大丘徐氏) ◆달성서씨(達城徐氏), 대구서씨(大丘徐氏)는 달성서씨와 대구서씨는 모두 서씨의 종가인 이천서씨에서 분관된 성씨이다. 이천서씨 문헌에는 서신일의 손자가 거란군을 물리친 서희(徐熙) 장군이고, 그 서희 장군의 아들 4형제 중 서유(주)행(徐惟(周)行)이 달성으로 이거(移居)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달성서씨와 대구서씨는 같은 시조가 아니다. 달성서씨는 고려 판도판서(版圖判書) 서진(徐晋)을 시조로 하고 있고, 대구서씨는 고려 군기소윤(軍器少尹) 서한(徐閑)을 시조로 하고 있다. 이들은 달성서씨의 향파(鄕派)와 경파(京派)였는데, 조선 숙종 28년(1702)에 처음으로 족보를 함께하여 임오보(壬午譜)를 만들었으나, 의견 충돌로 경파가 단독 족보를 만들어 대구서씨로 갈라서게 되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