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韓, 漢)씨와 청주한씨(淸州韓氏)
◆한(韓, 漢)씨는
우리나라에 ‘한’이라는 같은 음을 쓰고 있는 성씨는 둘이다.
하나는 ‘나라이름 한(韓)’을 쓰는 성씨이며, 다른 하나는 ‘한수 한(漢)’을 쓰는 성씨이다.
둘 다 모두 청주와 충주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이다.
그 외 한(韓)씨 중에는 중국에서 건너온 곡산한씨가 있다.
한(韓)씨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성씨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청주한씨 대종회의 주장에 의하면, 준왕(準王)은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으로 연나라 이주민 출신인 위만에게 왕위를 빼앗긴 후 마한을 세우고 국가를 운영했다.
그 뒤 다시 마한이 망할 때, 마지막 왕인 원왕에게는 아들 삼형제가 있었는데, 이들이 바로 우성(友誠), 우평(友平), 우량(友諒)이며, 이들 삼형제는 각각 기씨(奇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의 선조가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청주한씨의 시조 한란(韓蘭)은 기자의 후예인 우량의 원손(遠孫)이라는 주장이다(청주한씨세보).
또 다른 한(韓)씨로는 송나라에서 건너온 한예(韓銳)를 시조로 하는 곡산한씨(谷山韓氏)가 있다.
한예는 8학사의 한 사람으로 1206년 송나라에서 고려(희종)에 들어와 문하시중평장사를 역임하고 곡산부원군에 봉해졌다.
아들 한희(韓禧)는 고려 때 밀직부사, 손자 한익(韓翊)은 판도판서, 한진(韓瑨)은 정당문학, 6세손 한옹(韓雍)은 조선 태조 때 병조판서가 되었다.
한이원(韓以原)은 조선 숙종 때 인물로 시(詩)와 역학(易學)에 뛰어났다.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곡산한씨는 1562가구 총 4917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인 4722가구에 총 2만119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 것에 비추어 의외의 결과이다.
아마도 대부분 한씨가 청주한씨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에 나타난 착오인 것 같다.
이러한 한(韓)씨는 2000년 국세조사에서 총 21만8821가구에 70만436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는 성씨인구 순위에서 오씨에 이어 12위에 위치하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한수 한(漢)을 쓰는 한씨는 충주(忠州)를 단일본으로 하고 있다.
한(漢)씨는 한(韓)씨와 달리, 중국의 성씨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언제 한국에 들어왔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우리나라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30년도 국세조사 때 처음으로 등장했다.
1985년도 조사에서는 가구수 74가구에 325명으로 나타나 있다.
한란의 묘
한란은 충북 영동 황간면에서 태어나 중년에 청주 방정리로 이주해 용개평야를 개척하여 부농이 된 뒤, 견훤을 정벌하는 왕건을 도와 고려 개국공신이 되었다
◆청주한씨(淸州韓氏)는
청주한씨는 가장 오래된 성씨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또한 조선시대에 문과급제자가 315명, 상신(相臣) 12명, 공신(功臣) 24명, 대제학 1명을 배출하고, 왕비도 6명이나 배출한 명문거족이다.
한씨는 문헌상으로는 평산(平山), 한양(漢陽), 안변(安邊), 양주(楊州), 곡산(谷山), 홍산(鴻山), 대흥(大興), 부안(扶安), 개성(開城), 함흥(咸興), 금산(錦山), 단주(湍州) 등 10여본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한예를 시조로 하는 곡산한씨를 제외하면, 모두 청주한씨에서 분적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하지만, 언제 어떻게 분적되었는가는 분명하지 않다.
청주한씨의 시조는 한란(韓蘭)이다.
그는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을 정벌할 때 공을 세워 개국벽상공신(開國壁上功臣)이 되고, 삼중대광태위(三重大匡太尉)에 올랐다.
그의 아버지는 마한의 마지막 왕이었던 원왕의 세 번째 아들 우양의 31대 손으로 한지원(韓知原)이다.
그는 충북 영동의 황간면에서 태어났는데, 중년에 청주 방정리(方井里)로 이주한 뒤, 무농정(務農亭)에서 향학(鄕學)을 일으키고 용개평야(龍開平野)의 농토를 개척하여 부호가 되고, 왕건을 도왔다고 한다(청주한씨세적연보).
청주한씨는 한란 이후 30여파로 갈렸는데 그중 가장 번창한 양절공파(襄節公派, 파조 한확·韓確), 문정공파(文靖公派, 파조 한계희·韓繼禧), 충간공파(忠簡公派, 파조 한리·韓理), 몽계공파(夢溪公派, 파조 한철충·韓哲?), 관북파(關北派, 파조 한련·韓連), 충성공파(忠成公派, 파조 한명회·韓明澮) 등 6파가 대종을 이루는데, 이를 통칭 한씨 6파라고 한다.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청주한씨는 총 19만9642가구에 64만2992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석봉 한호의 천자문
한석봉으로 알려진 동방 제일의 명필 한호가 지은 천자문(고려대소장).
◆청주한씨의 유래와 연혁
충성공파는 충성공 한명회(韓明澮)를 파조로 한다.
한명회는 한란의 12대손 한기(韓起)의 아들이며, 조부는 고려말기에 병마절도사를 역임하고 조선개국 초기에 주문사로 명나라에 들어가 조선이라는 국호를 정해 받고 돌아온 한상질(韓尙質)이다.
또한 그의 증조부 한수(韓脩)는 공민왕 때 대언(代言)이 되어 신돈(辛旽)에 반대하였으며, 예서와 초서에 뛰어난 명필이었다.
또 작은할아버지인 한상경(韓尙敬)은 조선 개국공신이 되어 공조판서, 우의정 등을 지내고 영의정에 올라 서원(西原, 청주의 옛이름)부원군에 봉해진 사람이다.
이렇듯 빼어난 가문의 배경을 가진 한명회는 수양대군(세조)의 심복으로 단종 1년 계유정난을 일으키고, 정난공신 1등에 오르고, 이조판서와 영의정을 지냈다.
그의 막내딸이 성종비인 공혜왕후이다.
하지만 사후 연산군 때는 폐비윤씨 사건으로 촉발된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무덤이 파헤쳐지고 시신이 토막내지는 부관참시를 당하기도 했다.
그의 가문을 보면, 그에게는 아들 하나 딸 넷이 있었는데, 맏딸은 세종의 부마인 ‘파평윤씨’ 윤사로(尹師路)의 며느리가 되고, 둘째딸은 영의정 신숙주의 맏아들에게 출가하였으며, 셋째 및 넷째 딸은 각각 예종비와 성종비가 되었다. 또 손자는 성종의 부마가 되었다.
이렇듯 한명회 일가는 왕실과 이중삼중의 인척관계를 맺었다.
양절공파는 양절공 한확(韓確)을 파조로 한다.
그는 세종 때 병조와 이조판서를 지냈고 단종 때 우의정, 세조 때 좌의정을 지냈다.
그의 딸이 성종의 어머니이자 인수대비로 널리 알려진 덕종(성종의 아버지)비이다.
또, 그의 누이 둘은 각각 명(明)나라의 태종비(太宗妃), 선종비(宣宗妃)가 되었다.
또 그의 세 아들 한치인(韓致仁)과 한치의(韓致義), 한치례(韓致禮) 등도 출중했다.
또한 선조 때의 명재상인 한응인(韓應寅)은 한확의 6대손이다.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한익모(韓翼謨)와 그의 형인 대사헌 한현모(韓顯謨)는 한응인의 6대손이고, 이조판서 한광회(韓光會)는 7대손이다.
또, 순조 때 영의정을 지낸 한용구(韓用龜)는 한현모의 손자이고, 예조판서 한정교(韓正敎)는 한용구의 손자이며, 고종 때 이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낸 한장석(韓章錫)은 한용구의 증손이다.
양절공파의 방계(傍系)가 되는 한치형(韓致亨)은 한확의 조카인데, 그는 연산군 때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었으나, 왕에게 충간하다가 참살되었다.
문정공파는 문정공 한계희(韓繼禧)를 파조로 한다. 한계희는 관찰사였던 한혜(韓惠)의 아들이다.
그는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세조 때에는 세자의 스승이 되었으며, 성종 때에는 벼슬이 좌찬성에 이르렀다.
훈구파 유학자로서 ‘경국대전(經國大典)’, ‘의방유취(醫方類聚)’ 등을 편찬하였다.
형 한계미(韓繼美)와 아우 한계순(韓繼純)도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광해군 때 좌의정을 지낸 한효순(韓孝純)은 한계희의 현손이며, ‘동국지리지’를 저술하여 실학에 선구적 업적을 남긴 한백겸(韓百謙)은 한효윤(韓孝胤)의 아들이다.
그리고 한원진(韓元震)은 한계희의 9대손이 된다.
그중 한원진은 영조 때 심성론(心性論) 논쟁에서 인간의 성(性)이 같지 않음을 주장하여 ‘호론(湖論)’을 대표하였다.
그는 김장생(金長生)과 송시열(宋時烈)로 이어지는 이이(李珥)의 학통을 계승하고, 송시열이 저술하던 ‘주서동이고(朱書同異考)’를 완성하였다.
충간공파는 고려 말기 이부상서를 지낸 충간공 한리(韓理)를 파조로 한다.
그의 아들 한승순(韓承舜)의 세 아들 한서룡(韓瑞龍), 한서봉(韓瑞鳳), 한서구(韓瑞龜)의 후손들이 번창했는데, 특히 한서룡의 아들 오형제와 그 후손들이 빼어났다.
그중 한서구는 수양대군의 심복으로 계유정난에 공을 세워 정난공신에 오르고 중추원첨지사(中樞院僉知事)에 이르렀다.
소혜왕후의 묘
인수대비로 알려진 소혜왕후는 한확의 딸이자 성종의 어머니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세자빈이 되었으나, 남편이 죽은 뒤 궁궐을 나왔다.
하지만, 아들인 성종이 즉위하자 다시 입궐하여 조선 초기 정치를 좌우하였다.
몽계공파는 다른 말로 보안한씨(保安韓氏)라 부르기도 하는데, 고려 말에 전법판서(典法判書)를 지낸 몽계공 한철충(韓哲沖)을 파조로 한다.
그는 고려가 망하자 산 속에 은거하며 충절을 지켰다.
그의 아버지는 예의판서·보문각 대제학을 지낸 한희적(韓希迪)이며, 조부는 보분각 직제학을 지낸 한연(韓璉)이다.
또 그의 아들로 한진(韓珍), 한염(韓廉), 한겸(韓兼), 한문(韓文) 등이 있는데, 각각 목사(牧使)와 예조판서, 현감을 지냈다.
관북파는 함남 북청, 안변, 함흥 일대에 많이 살고 있어서 안변한씨로 부르기도 하는데, 파조는 예빈윤(禮賓尹)을 지낸 한련(韓漣)이다.
한련의 아들은 찬성사를 지낸 한유(韓裕)이며, 손자는 고려 말에 밀직부사를 지낸 한경(韓卿)이다.
한경의 딸은 이성계(李成桂)의 부인이자 나중에 신의왕후(神懿王后)에 추봉되었다.
그는 태조 즉위 후 문하부영사(門下府領事)를 지내고 안천부원군에 봉해졌기에 후손들이 관북지방을 중심으로 세거하게 되었다.
그 밖에 조선시대 청주한씨의 유명한 인물로는 동방 제1의 명필로 추사 김정희와 쌍벽을 이루는 석봉(石峯) 한호(韓濩)가 있다.
그의 본관은 삼화(나중에 청주한씨로 통합)인데 명종 때 진사시에 합격하고, 가평군수를 거쳐 존숭도감 서사관(尊崇都監書寫官)을 지냈다.
또 인조 때의 학자였던 한교(韓嶠), 정조 때 동제활자(銅製活字)인 ‘한구자(韓構字, 한구의 글씨체로 만들어진 동제활자)’로 유명한 한구(韓構)가 있다.
이렇듯 청주한씨는 조선 초에 한확, 인수대비로 잘 알려진 소혜왕후, 정난공신 한명회 등의 인물을 배출하면서 훈구세력의 핵심이었으며, 이후에도 조정의 중심을 차지한 명문거족이었다. 그래서 세간에서는 청주한씨를 가리켜 삼한갑족이라고 칭하고 있다.
◆청주한씨의 근·현대 인물
청주한씨의 근·현대 인물로는 구한말 참정대신으로 을사조약을 끝까지 반대한 한규설(韓圭卨)이 있으며, 시인이자 승려로 33인의 한 사람인 만해 한용운(韓龍雲)이 있다.
또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함흥형무소에서 옥사한 한글학자 한징(韓澄)도 역사에 남을 만한 인물이다.
또 청주한씨는 현대에 들어와서도 꼽을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최근에는 3연속 국무총리를 배출하기까지 하였다. 37대 국무총리 한명숙, 38대 한덕수, 39대 한승수가 바로 그들이다.
청주한씨의 유명인물들을 보면,
종교계에서는 한양원(민족종교협의회 회장), 한학자(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총재), 한경직(목사),
학계와 정관계 인사로는 한갑수(한글학자), 한심석(서울대 총장), 한완상(부총리, 서울대 교수), 한승헌(감사원장), 한승주(외교부장관, 유엔총회의장), 한신(내무부장관, 국회의원), 한광옥(대통령비서실장, 국회의원), 한갑수(농림부장관), 한봉수(상공부장관), 한상대, 한격만(이상 검찰총장), 한환진(대법관), 한상률(전 국세청장), 한병기(유엔대사, 국회의원), 한규복(충북지사), 한범덕(행자부차관, 청주시장), 한희석, 한영수, 한건수, 한광석, 한상준, 한옥신, 한춘일, 한근조, 한태일, 한중건, 한석봉, 한기춘, 한병채, 한양순, 한선교(이상 국회의원), 한상진(서울대 교수) 한민구(육군참모총장), 한철수(육군대장), 한승원(소설가), 한하운(시인), 한인섭(강원대 교수), 한태동(연세대 교수),
재계인사로는 한상현(세방교통 사장), 한정호(대한잉크 대표), 한명석(동방관광 사장), 한상억(동산토건 대표), 한만우(한국신약 회장)가 있고,
연예계에는 한인수(탤런트), 한석규(배우), 한혜진(배우), 한효주(탤런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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