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엄씨(寧越嚴氏)
영월(寧越)은 강원도(江原道) 남부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내생군(奈生郡)인데 통일신라(統一新羅) 경덕왕(景德王)이 내성군(奈城郡)으로 고치고 고려(高麗)초에 영월로 고쳐서 원주(原州)에 편입 시켰다가 공민왕(恭愍王) 때 군(郡)으로 승격 하였다.
조선(朝鮮) 숙종(肅宗) 때 부(府)로 승격하고 1895년(고종 32) 영월군(寧越郡)이 되었다.
가문의유래
영월엄씨(寧越嚴氏)의 시조(始祖) 엄임의(嚴林義)는 한(漢)나라 시인(詩人) 부양(富陽 : 一名 嚴子陵先生)의 후예이며 당(唐)나라 상국(相國) 화음(華陰)의 일족(一族)이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그는 당(唐)나라 현종(玄宗 : 제 6대 임금, 재위기간 : 712~756)이 새로운 악장(樂章)을 만들어 이를 인근의 여러 나라에 전파하기 위해 보낸 파락사(波樂使)로 신라(新羅)에 동래(東來) 하였다가 본국(本國)에서 정변(政變)이 일어나자 돌아가지 않고 지금의 영월 땅인 내성군(奈城郡)에 안주(安住)한 것이 우리나라 엄씨의 시원(始源)을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고려조에 와서 그를 내성군(奈城君)에 추봉(追封)하고 후손들에게 영월(寧越)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하자 후손들이 그 곳에 살면서 영월(寧越)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 왔다.
특히 엄씨의 관적지(貫籍地)인 영월읍 하송리(寧越邑下松里)에는 처음 엄시랑(嚴侍郞)이 정착 하면서 손수 심었던 은행나무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크고 오래된 수령(樹齡)을 자랑하는 보수(寶樹)로 천연기념물 제76호로 지정 되었으며 신기하게도 이 은행나무는 경술국치(庚戌國恥)때와 을유해방(乙酉解放) 시(時)에 동편의 큰 가지가 부러졌고 6․25 동란 시에는 북편의 큰 가지가 부러지는 등 국가의 대이변(大異變)이 있을 때 마다 무언(無言)의 예시(豫示)가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문호(門戶)가 열리게 된 영월 엄씨는 시조의 아들 3형제 대(代)에 와서 장남 태인(太仁)이 고향을 지키며 군기공파(軍器公派)를 이루었고, 차남 덕인(德仁)은 한양(漢陽)으로 이주(移住)하여 복야공파조(僕야公派祖)가 되었으며, 3난 처인(處仁)은 함경도(咸鏡道)로 이주하여 문과공파조(文科公派祖)가 되어 현재 그의 후손들이 북한에 많이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대(代)를 거듭 하면서 참봉공계(參奉公系)․ 교수공계(敎授公系) 등 37계통으로 갈라져서 가문의 중흥을 이루었으며 고려를 거쳐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훌륭한 인재를 많이 배출하여 특히 충절(忠節)의 가문(家門)으로 일컬어졌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11세손 유온(有溫 : 장군 비의 증손, 준의 아들)이 조선 창업(創業)의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동지총제(同知總制)를 역임했고, 판관(判官) 한저(漢著)의 아들 흥도(興道)가 절행(節行)으로 뛰어났다.
숙부(叔父)인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왕위(王位)를 빼앗기고 영월에 유폐 되었던 단종(端宗)이 화(禍)를 당하자 명에 의하여 시신이 강물에 던져져 옥체(玉體)가 둥둥 떠서 돌아다니다가 다시 돌아오곤 했는데 옥같은 열 손가락이 수면에 떠 있었다.
그러나 누구든지 시신을 거두면 삼족(三族)을 멸한다는 어명(御命)에 아무도 손대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영월호장(寧越戶長)이라는 미관말직(微官末職)에 있던 흥도(興道)가 관(棺)을 마련하여 선산(先山)에 장사 지내고 <좋은 일을 하고 화를 당하면 달게 받겠다.(爲善被禍 吾所甘心)>는 말을 남긴 후 영남지방으로 피했다.
후환이 두려워 세인(世人)들이 감히 생각지도 못하는 일을 한 흥도(興道)의 충절은 선조(宣祖) 때 그의 영웅성이 재평가 되어 후손을 찾아 증손 한례(漢禮)에게 호역(戶役)을 면해 주고 단종릉(端宗陵)인 노산묘(魯山墓)를 수호하게 하였다.
현종(顯宗) 때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건의로 비로소 그 후손들이 세상에 나와 벼슬에 등용되었다.
영조(英祖) 때 와서 정문(旌門)이 세워졌고 공조참판(工曹參判)에 추증 순조(純祖) 때 자헌대부(資憲大夫)로 공조판서(工曹判書)에 가자(加資) 되었으며 시호(諡號)가 충의(忠毅)로 내려져 사육신(死六臣)과 더불어 영월 창절사(彰節祠)와 공주(公州) 동학사(東鶴寺) 숙모전(肅慕殿)에 배향(配享) 되었다.
한편 시조의 16세손 흔(昕)은 중종 때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검열(檢閱)과 정자(正字)를 지냈고 호당(湖當)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으며 수찬(修撰)과 이조좌랑(吏曹佐郞)을 거쳐 세자시 강원(世子侍講院)의 보덕(輔德)을 지냈다.
흔(昕)의 현손 집(緝 : 성구의 아들)은 숙종(肅宗) 때 정언(正言)과 부교리(副校理)를 거쳐 도승지(都承旨)와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지냈다.
그 후좌참찬(左參贊)에 이르렀고 장희빈(張禧嬪)의 처벌을 주장했으며 청렴 결백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그 밖의 인물로는 광해군(光海君) 때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검열(檢閱)을 지냈으며 폐모론(廢母論)에 유생(儒生)을 이끌고 반대하는 상소(上疏)를 올렸다가 파직 당한 성(惺)과, 효종(孝宗) 때 영흥부사(永興府使)로 나갔던 황(愰)이 유명했고, 성의 조카 정구(鼎耈)는 효종(孝宗) 때 좌승지(左承旨)로 김자점(金自點)의 옥사에 연루 되었으나 무고함이 밝혀져 뒤에 교리(校理)와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을 지냈다.
한석봉(韓石峯) 이후의 명필로 이름났던 한명(漢明)은 고금의 서법(書法)을 집대성한「집고첩(集古帖)」과「만향제시초(晩香薺詩抄)」 등의 명저(名著)를 남겨 엄문(嚴門)을 대표했다.
집(緝)의 아들 경수(慶遂)는 숙종(肅宗) 때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를 역임하여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갔다 와서「연행록(燕行錄)」을 간행한 숙(璹), 순조 때 암행어사를 지낸 도(燾), 고종 때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낸 석정(錫鼎) 등과 함께 이름을 떨쳤다.
세영(世永)은 갑오경장(甲午更張)으로 신 내각이 수립될 때 농상공부대신(農商工部大臣)을 역임하여 광복회(光復會)를 조직한 후 군자금(軍資金)을 모아 항일투쟁에 앞장섰던 정섭(正燮)과 더불어 충절(忠節)의 전통 가문인 영월엄씨(寧越嚴氏)를 더욱 빛냈다.
안중근 의사와 함께 소련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의병을 모아 항일투쟁에 앞장선 의병장 엄인섭, 민족혼을 농락하던 이학로 살해, 순국을 한 엄순봉, 광복회사건으로 총독부의 궐석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던 엄정섭은 독립의사들.
또한 장면 민주당 정권 당시 법무부 장관이었던 엄상섭씨는 율사로
그리고 제3공화국에서 주일대사를 거쳐 내무부장관을 2번씩이나 지낸 엄민영씨는 외교가로 그 이름이 높았다.
현존 인물로는 역시 외교가로 활약했던 엄요섭씨, 도·부지사를 지낸 엄병길·엄건씨 등이 있고 엄기표·영달·정주·병학·대섭씨 등이 국회의원을 지냈다.
특히 엄대섭씨는 마을금고 창시자로 「막사이사이」상을 받은 인물.
언론계에는 엄한준 원주문화방송사장을 비롯 엄복영 한국방송공사 군산방송국장 등이 있고 학계에는 엄영식(경희대문리대학장)·엄영석(외국어대경상대학장)·엄륭의(서울대교수)·엄정인(고려대교수) 엄운용(KIST교수)·엄정식(서강대교수)·엄정국(서강대교수)·엄대영 (중앙대교수)·엄장일(부산대학생처장)·엄구현(부산 동아대학원장)씨 등이 활약 중.
군 장성급으로는 엄영보 해군준장·엄용식 공군준장 등이 있고 예비역장성도 4명에 이른다.
재계에서는 엄상호 건영주택회장을 비롯, 엄대용(만수산업사장)·엄규회·(고려건설회장) ·엄종진(동양상호신용금고사장)·엄춘보(한일 철강회장)·엄숙자(신성철강사장)·엄의채(경동시장사장)·엄철순(상호기공사장)·엄흥섭(한양투자금융사장) 씨 등이 돋보인다.
[주요집성촌]
강원도 영월군 남면 북상리, 강원도 영월군 남면 조전리,, 강원도 영월군 북면 문곡리,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팔괴리, 경기도 화성군 태안면 능리, 함경남도 함주군 지곡면 흥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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