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洪)씨, 남양홍씨(南陽洪氏)
◆ 홍씨(洪氏)는
홍씨가 처음 생긴 곳은 중국이다.
감숙성 서북부에 있는 돈황(敦煌)이 홍씨가 탄생한 지역이다.
처음 홍씨가 탄생한 것은 돈황 지역에 살고 있는 공공씨(共工氏·요순시대 형벌을 다루는 관리)의 후손이 원수의 추격을 피해 ‘공’(共)자에다 ‘수’(水)자를 붙여 홍(洪)이라는 성씨를 썼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 홍씨가 생겨난 것은 당나라 태종 때 고구려 영류왕의 요청에 의해 8학사(八學士)의 한 사람인 홍천하(洪天下)가 고구려에 입국한 것에서 연유한다.
고구려에 들어온 홍천하가 연개소문이 일으킨 반란에 반대하며 다시 신라로 건너가 삼국통일 이후 당성백(唐城伯)에 봉해진 것을 계기로 홍씨가 생겨났다고 전해진다.
남양사 모선문
충북 청원군 미원면에 있는 남양홍씨 당홍계 시조 홍은열을 모신 사당.
원래 홍은열의 묘와 사당은 북한에 있지만, 남북분단으로 참배를 하지 못해 충북 청원군에 새로 지었다
남양홍씨(당홍계)의 시조인 홍은열(洪殷悅)은 도시조 홍천하의 10세손으로 추정되고 있다.
홍은열의 초명은 홍유(洪儒)이고 자는 술(術)인데, 고려 4대 개국공신 중 한 사람이다.
즉, 이름이 홍유였는데 왕건이 은나라의 명재상이었던 주열의 이름을 따서 ‘은열’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남양홍씨(토홍계)의 시조는 홍선행(洪先幸)이다.
그는 당성(남양의 옛 지명)에서 제법 세력이 있었던 선비 집안의 후손인데, 고려 고종 때 금오위별장(金吾衛別將)을 지냈다.
그 후 그의 후손들이 남양홍씨 토홍계를 이루고 있다.
그의 선계에 대해서는 남양홍씨 당홍계의 시조인 홍은열의 후손이라는 주장(당홍계)도 있으나, 홍선행을 시조로 모시고 있는 토홍계에서는 이를 부인하고 있다.
현재 남양홍씨의 인구는 약 41만명이다.
그중 당홍계가 38만명, 토홍계가 3만명으로 추산된다.
그 외 홍씨의 본관은 문헌에 111본까지 나와 있으나 현존하는 본관은 남양(南陽), 풍산(豊山), 부계(缶溪), 홍주(洪州) 등 4개가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풍산홍씨는 홍지경(洪之慶)을 시조로 모시고 있다.
홍지경은 고려 고종 때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국학직학(國學直學)을 역임한 후 풍산(豊山)에 정착하였기 때문에 그 후손들이 풍산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풍산홍씨 인구는 3만5000여명이다.
부계홍씨의 시조는 홍좌(洪佐)이다.
홍좌의 선조는 홍은열의 손자이며, 문하시중을 역임한 홍난(洪蘭)으로 전한다.
그 후 누대에 걸쳐 부계에 거주하면서 분관이 된 성씨로 파악되고 있다.
하지만 홍난 이후 세계가 어떻게 전해졌는지 알 수 없게 되어 그 후손들이 고려 후기 때 직장(直長)과 동정(同正)을 지낸 홍좌를 시조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하지만 최근에는 남양홍씨(당홍계)와 합본하였다고 한다.
홍주홍씨의 시조는 홍규(洪規)다.
홍규는 왕건이 견훤을 칠 때 공을 세워 ‘삼한상중대광 벽상익찬공신’(三韓三中大匡 壁上翊贊功臣)으로서 해풍부원군(海豊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해풍(海豊·홍주의 옛 지명)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 남양홍씨(당홍)는
남양홍씨는 조선시대에 네 번째로 많은 문과 급제자를 배출해 10대 명문가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그런데 남양홍씨에는 같은 본관을 쓰는 두 계통이 있는데, 당홍과 토홍이 그것이다.
당홍은 당나라에서 건너온 중국계를 의미하고, 토홍은 토착 호족 계통을 뜻한다.
2000년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남양홍씨 중 당홍은 11만7638가구 총 37만9708명이 국내에 살고 있다고 한다.
남양홍씨 당홍의 시조는 홍천하다.
그는 고구려 영류왕 때 중국 당나라에서 문화사절로 건너와 유학을 가르치는 등 활동을 펼치다가 연개소문의 난 때 신라로 피신하였다. 선덕여왕 때 당성백(唐城伯)에 봉해졌고, 삼국통일 후 신문왕 때 태자태사(太子太師)로 추대되었다. 하지만 후대로 어떻게 전해졌는지 알 수가 없게 되어 고려 개국공신 홍은열을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당홍은 홍은열의 13대손에서 13파로 갈리고, 그 외에 3파가 있어 모두 16파로 나뉘어졌다. 그중 후손이 가장 많은 파가 남양군파(南陽君派, 파조 홍주·洪澍), 문정공파(文正公派, 파조 홍언박·洪彦博), 판중추공파(判中樞公派, 파조 홍언수·洪彦修), 익산군파(益山君派, 파조 홍운수·洪云遂), 예사공파(禮史公派, 파조 홍복·洪復), 중랑공파(中郞公派, 파조 홍후·洪厚) 등이다. 남양군파와 문정공파의 후손이 70%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다음이 익산군파(15%)다.
남양홍씨는 조선시대에 모두 329명(당홍 206명, 토홍 123명)의 문과 급제자를 냈는데 이는 전주이씨(884명), 안동권씨(359명), 파평윤씨(336명)에 이어 네 번째로 많은 것이다. 인구 비율로 따지면 순위는 더 올라간다. 그중 당홍에서는 조선시대에 상신(相臣) 8명, 문형 2명을 비롯해 왕비 1명(헌종의 계비), 청백리 3명, 부마 4명, 공신 10여명을 배출하였다.
홍성민 3부자 묘역
맨 위가 영의정을 지낸 홍성민이고, 두번째가 그의 아들이자 가평군수인 홍서익의 묘이고, 맨 아래가 평안도 관찰사로 갔다가 병자호란을 맞아 청군과 싸우다 전사한 홍명고의 묘이다.
◆ 남양홍씨(당홍)의 연혁과 인물
남양홍씨 당홍계는 고구려 때 당나라에서 건너온 홍천하를 도시조로 하고, 홍천하의 10세손인 홍은열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의 손자대에서 재신공파(宰臣公派)가 나뉘어지고, 증손대에서 다시 예사공파(禮史公派)가 나뉘어진다. 그 후 6세손에서 중랑장파(中郞將派)가 나뉘어지고, 13세에서 13개 파로 나뉘어졌다. 이들 중 홍주를 파조로 하는 남양군파와 홍언박을 파조로 하는 문정공파가 특히 번창해 전체의 70%를 차지한다.
고려시대에는 개국공신인 시조 홍은열을 비롯해 그의 6세손이자 이자겸의 난에 충절을 지키다 척준경에게 살해된 홍관(洪灌), 홍관의 손자이며 성불도감판관을 지낸 홍원중(洪源中), 홍원중의 아들이며 추밀원사와 공부상서를 역임한 홍사윤(洪斯胤), 홍사윤의 장남이자 동지추밀원사와 형부상서를 역임한 홍진(洪縉), 홍사윤의 차남이며 동지밀직사사를 역임한 홍예(洪裔), 홍진의 아들이면서 송종례와 함께 임유무를 주살하여 무신정권에 종지부를 찍은 홍규(洪奎), 충렬왕 때 세 번이나 시중 자리에 오른 홍자번(洪子藩), 문정공파 파조이면서 공민왕 때 수상을 지낸 홍언박 등이 유명하다.
이들 가운데 홍규는 남양부원군에 책봉되었다. 그의 두 딸은 충선왕의 비인 순화원비와 충숙왕의 비이자 공민왕의 어머니인 명덕태후다. 아들은 삼사좌사를 역임한 홍융(洪戎)이고 손자는 남양군파의 파조인 홍주, 문정공파 파조이면서 도첨의우정승을 지낸 홍언박, 감찰대부를 역임한 홍언유(洪彦猷), 검교참찬문하부사를 역임한 홍언수(洪彦修)다. 또 사촌형이 홍자번(홍예의 아들)이다.
홍자번의 장남 홍경(洪敬)은 도첨의찬성사와 상호군을 역임했고, 차남 홍순(洪順)은 도첨의평리를 역임했고, 홍경의 장남 홍승서(洪承緖)는 우대언을 역임했고, 차남 홍승연(洪承演)은 선공부령을 역임했다. 또 남양군파 파조 홍주의 아들 홍징(洪徵)은 벼슬이 판밀직사사에 이르고 당산군에 추봉되었으나, 염흥방이 처형될 때 그의 매부라는 이유로 아들 홍상빈과 함께 처형되었다. 홍언박의 장남 홍사보(洪師普)는 판각문사를, 차남 홍사범(洪師範)은 지밀직사사를, 3남 홍사우(洪師禹)는 전라도 도순문사를, 4남 홍사원(洪師援)은 전서를 역임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개국공신인 홍길민(洪吉旼·호조판서)과 아들 홍여방(洪汝方·이조판서)이 유명하다. 특히 세조의 반정에 공을 세운 홍윤성(洪允成)과 홍달손(洪達孫), 홍순손(洪順孫) 형제가 있다. 홍윤성은 예조판서를 거쳐 영의정에 올랐고, 홍달손은 좌의정, 홍순손은 판서를 역임하였다.
허균에 의해 지어진 최초의 국문소설 ‘홍길동전’의 모티브가 된 홍길동도 남양홍씨 당홍계로 알려져 있다. 홍길동의 아버지인 홍상직(洪尙直)은 이조판서를 역임했고, 홍상직의 아들이자 홍길동의 형인 홍일동(洪逸童)은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했다. 또 홍일동의 측실 딸은 성종의 후궁인 숙의(淑儀) 남양홍씨다.
전남 장성의 홍길동 생가
허균 홍길동전의 모티브가 된 홍길동은 세종조에 이조판서를 역임한 남양홍씨 홍상직의 서자로 파악되고 있다.
이조판서 홍상직은 3형제를 두었는데 첫째가 홍귀동, 둘째가 홍일동, 셋째가 서자인 홍길동이다.
홍길동의 조카이자 홍일동의 딸은 성종의 후궁인 숙의 홍씨다.
익산군파인 홍응(洪應)은 좌의정에 올랐고, 동생 홍흥(洪興)은 연산군 때 강원도 관찰사와 호조참판을 역임하였다.
홍경주(洪景舟)는 중종반정에 참여한 후 병조판서와 좌참찬을 역임했고, 홍순언(洪淳彦)은 종계변무사로 임진왜란 때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는 사신으로 다녀왔다. 또 홍희남(洪喜男)은 임진왜란 후 여섯 차례나 일본을 왕래하며 종전 협상을 매듭지었고, 명나라에도 두 차례 파견되었다.
인조반정의 공신이며 대제학과 영의정에 오른 홍서봉(洪瑞鳳)은 아버지 홍천민(洪天民), 숙부 홍성민(洪聖民), 할아버지 홍춘경(洪春卿)과 함께 3대4호당의 영예를 누렸다. 또 홍천민과 홍성민의 후예는 6대에 걸쳐 7명이 대과의 영예를 누렸으며, 그중 영의정이 3명(홍명하·홍치중·홍순목), 우의정이 1명(홍중보) 배출되었다. 홍주(洪澍)의 7대손인 홍춘경(洪春卿)의 자손에서만 상신 5명, 문형 2명, 왕비 1명을 비롯해 20여명의 판서급 인물을 배출한 것이다.
홍춘경은 홍천민(洪天民·율정공파), 홍일민(洪逸民·연기공파), 홍성민(洪聖民·졸옹공파)의 3형제를 두었는데, 첫째인 율정공파(栗亭公派)에서는 홍천민의 아들 홍서봉(洪瑞鳳)이 인조 때 삼정승을 두루 거쳤고, 증손 홍처량(洪處亮)이 숙종 때 예조판서를 지냈다. 둘째인 연기공파(燕岐公派)에서는 홍일민의 손자 홍명원(洪命元)이 인조 때 시문으로 이름을 떨쳤고, 슬하에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인 홍처후(洪處厚)의 자손이 가장 번창하였다. 경종 때 노론(老論)의 선봉으로 소론(少論)과 맞섰던 홍계적(洪啓迪)은 홍처후의 증손이다. 영조 때 이조판서를 지낸 홍계희(洪啓禧)는 홍처후의 아우인 홍처심(洪處深)의 증손이다. 셋째인 졸옹공파에서는 대제학 홍성민의 손자 홍명하(洪命夏)가 현종 때 영의정을 지내고 청백리에 올랐으며 그밖에 홍치중(洪致中)이 영조 때, 홍순목(洪淳穆)이 고종 때 각각 영의정을 역임하는 등 4명의 정승을 배출하였다.
병자호란 때 주화론을 피력한 홍서봉과는 달리 승문원부제조였던 홍명형(洪命亨)은 강화에 피신했다가 청군이 쳐들어오자 불을 붙이고 화약에 뛰어들어 자결했다. 또 홍명구(洪命耉)는 평안도 관찰사로 청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또 청백리인 홍기섭(洪耆燮)은 도둑이 들었다가 솥뚜껑에 먼지가 쌓인 것을 보고 돈 꾸러미를 놓고 갔는데, 다음날 “돈 잃은 사람 찾아가라”는 방을 붙였다는 이야기가 ‘명심보감’에 실려 있다. 홍기섭의 아들이자 어영대장이었던 홍재룡(洪在龍)의 딸은 헌종의 계비로 왕비가 되었고 아들 홍종석(洪鐘奭), 손자 홍순형(洪淳馨)은 부자 예조판서를 지냈다.
하지만, 이렇게 영화를 누리던 남양홍씨 당홍도 부침은 있었다. 이조판서를 지내고 봉조하가 된 홍계희(洪啓禧)의 아들 5형제가 대과에 올라 위세를 떨쳤는데 그중 홍지해(洪趾海·형조판서), 홍술해(洪述海·이의), 홍찬해(洪纘海·승지), 그리고 홍지해의 아들 홍상간(洪相簡) 등이 벽파에 가담했다가 정조 1년 홍인한(洪麟漢) 역모사건에 연루돼 사형을 당해 한동안 쇠운의 길을 걸었다.
홍범도 장군
일제하 독립운동사에서 최고의 전승을 올린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를 이끈 ‘백두산 호랑이’ 홍범도 장군.
그는 독립운동을 계속하기 위해 러시아로 건너갔으나, 러시아 공산당의 배신으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된 뒤 조국 광복을 2년 앞둔 1943년 세상을 떠났다.
홍경래와 관군의 전투 그린 순무영진도
홍경래의 난은 무너지는 조선조 봉건제도에서 차별없는 사회를 추구했던 민란의 서막이었다.
또 홍경래(洪景來)는 평안도에서 농민반란을 주도해 나라를 큰 혼란에 빠뜨리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혁명을 꿈꾸던 그는 가산 다복동을 근거지로 기인·장사·술사 등을 모아 군사훈련을 실시했으며, 부자들을 포섭해 군자금을 내도록 했다. 순조 11년 극심한 흉년으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12월에 병력 2000명으로 스스로를 평서대원수(平西大元帥)라 일컬으며 군사를 일으켰다. 그 후 가산 박천 곽산 정주 선주 태천 철산 용천 등 평안북도 일대를 휩쓸고, 관군과 안주에서 싸웠으나 패주하였다. 정주성에 웅거하며 재기를 노렸으나, 관군의 기습으로 전사했다. 홍경래의 난은 서북도 차별에 반대하여 일어났으나, 그 후 조선의 봉건지배에 항거하는 농민반란으로 이어졌다.
◆남양홍씨 당홍계 근·현대인물
홍순목(洪淳穆)은 대원군의 심복으로 영의정을 지냈다.
하지만 그의 아들 홍영식(洪英植)은 병조참판으로 김옥균과 더불어 개화당을 이끌었으며 갑신정변을 주도하다 실패하고 대역죄인으로 처형되었다. 또 의정부 찬정(贊政)이었던 홍만식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울분을 못 이기고 음독 자결하였다. 반면 일본에 수신사로 다녀온 김홍집이 조선책략을 건의하여 개화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자 관동유림을 대표하던 홍재학(洪在鶴)은 이를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다 참형을 당하기도 하였다. 또 홍종우(洪鐘宇)는 수구파로 프랑스에 유학한 뒤, 돌아오는 길에 일본에 들러 김옥균에게 접근한 뒤 암살하였다. 이후 황국협회를 만들어 독립협회 활동을 방해하기도 했다.
또한 구한말 국난시대 남양홍씨 당홍계에서 많은 의병을 배출하였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김좌진 장군과 함께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끈 홍범도(洪範圖)이다.
홍범도는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 1907년에 차도선, 태양욱 등과 평안북도에서 포수들로 구성된 의병을 일으켰다. 그의 부대는 압록강을 넘나들며 삼수, 혜산, 풍산, 만포진, 봉오동 등지에서 승리를 이끌며 일제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그 후 김좌진 등과 합세하여 청산리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여 서일을 총재로 추대하고, 김좌진 등과 함께 부총재에 취임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 근처에 고려혁명군사학교를 설립하고 본격적인 독립전쟁을 준비하던 중, 일본군과 대립을 꺼린 소련군에 의해 강제로 무장 해제되었다. 이를 ‘흑하사변’이라고 한다. 그는 이후에도 연해주에 농장을 세워 민족의식을 고취하다,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이주 정책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옮겨간 뒤 1943년에 병사했다. 지금도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에는 그의 흉상이 있으며, 건국공로훈장 복장(대통령장)이 수여되었다.
홍병기(洪秉箕)와 홍기조(洪基兆)는 천도교 대표로 3·1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에 참여하였으며, 3·1운동 후 홍병기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했고, 홍기조는 국내에서 민족정신 고취활동을 전개하였다.
건국공로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홍익성(洪益成)은 기독교 장로로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이후 안동과 만주 일원에서 임정 연락원으로 활동하다 체포되어 신의주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서울 경교장(강북삼성병원) 뒷편에 홍난파가 살던 홍난파 가옥이 있다.
홍난파는 ‘봉선화’ 등을 작곡하여 민족의식을 일깨운 근대 음악의 선구자였지만, 말년엔 친일논란이 있다
그 외 홍식(洪植)은 독립군사령부 제3영장으로 국내에 들어와 일경과 교전 중 전사하였으며, 홍학순(洪學淳)은 식산은행 의주지점을 습격하고, 만주와 평안도 일대에서 독립운동자금 모집활동을 벌이다 일경에 체포되어 순국하였다. 홍원식(洪元植)은 3·1운동 때 고향인 화성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했는데, 제암리 학살사건 때 현장에서 살해당하였다. 홍승노(洪承魯)는 일본 주오대학을 졸업하고 상해에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했으며, 광복 후에는 반민특위 감찰위원과 김구의 한독당 감찰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이렇듯, 남양홍씨 당홍계에서는 구한말, 일제 강점기에 걸쳐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민족지사를 배출하였다.
광복 후에는 중앙일보 회장과 법무, 내무장관을 역임한 홍진기와 주미대사와 중앙일보 회장을 지내는 홍석현 부자가 있다. 홍진기 일가는 삼성 이병철, 중앙정보부장 신직수, 노신영, 동아일보 김병관 일가 등과 사돈관계를 맺는 등 현대사를 주름잡고 있다. 그럼에도 홍진기는 일제하에서 판사를 지내고, 이승만 정권에서 법무·내무장관을 역임하며 조봉암사건, 4·19시위대 발포사건 등과 연루되어 있어 적지 않은 논란이 있다.
그 외에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낸 홍성철, 문공부장관을 지낸 홍종철, 지식경제부장관을 역임한 홍석우, 한국방송공사 사장을 지낸 홍경모, 홍두표, 국회의원으로는 한나라당 대표를 지내고, 경남지사에 재직하고 있는 홍준표를 비롯하여 홍창섭, 홍종욱, 홍재형, 홍정욱, 홍문종, 홍영표, 홍일표, 홍문표, 홍희덕 등이 있으며, 국가인권위 상임위원을 역임한 홍진표가 있다. 그 외 학계에서는 홍기창(고려대교수), 홍순옥(동국대교수), 홍문화(서울대 약대교수), 홍윤숙(시인) 등이 있고, 재계에서는 이건희 삼성회장의 부인이자 라움미술관장인 홍라희, 남양유업 창업자인 홍두영 회장과 그의 아들 홍원식(남양유업 회장), 홍철호(굽네치킨 사장) 등이 있다.
홍영식의 모습을 담은 우표.
홍영식은 근대 우편제도의 효시인 우정총국을 설립하고 초대 총관이 되었다. 청나라의 개입으로 실패한 갑신정변은 우정총국 낙성식을 계기로 봉기한 정변이었다.
◆남양홍씨 토홍계는
남양홍씨 토홍계는 남양홍씨 전체 인구 40여만 중 3만여 명에 불과하다.
하지만 조선시대와 현대에 걸쳐 배출한 인물은 결코 적지 않다.
따라서 남양홍씨가 조선의 4대 명문가문이 된 것은 당홍계뿐 아니라 토홍계의 역할도 결코 적지 않다.
남양홍씨 당홍계에서는 토홍계가 당홍으로부터 분리되어 나갔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토홍 측에서는 중국에서 건너온 당홍과 달리 토착성씨임을 내세우고 있다.
토홍의 시조는 홍선행(洪先幸)으로 어려서부터 당성(남양의 옛 지명)에 세거했던 사족의 후손인데, 고려 고종 때 금오위별장(金吾衛別將)을 지냈다고 알려진다. 시조 홍선행의 9대부터 12대 사이에 문희공파(文僖公派), 정효공파(貞孝公派), 참의공파(參議公派), 주부공파(主簿公派), 대호군공파(大護軍公派) 등 5개 파가 갈라졌다.
조선시대에 문과급제자 123명을 배출하고, 상신 2명, 대제학 1명, 청백리 3명, 부마 1명, 공신 3명을 배출하였다. 이는 현재 토홍의 인구 3만여 명을 가정할 때 어떤 가문보다 많은 숫자이다.
◆남양홍씨 토홍계의 연혁과 인물
남양홍씨 토홍계는 조선시대 중기에 들어와 시조 홍선행의 9대조 후손인 문희공 홍언필(洪彦弼) 이후로 가문이 크게 번창했다.
홍언필은 승지였던 홍형의 아들로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연산군 때 갑자사화로 지도에 유배되었다. 중종반정으로 석방되어 증광문과에 급제하고 지평을 역임하였다. 사가독서한 후 우부승지가 되었으나, 다시 기묘사화로 투옥되었다. 하지만 당시 영의정이었던 정광필의 변호로 풀려났으며, 형조참판으로 성절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여섯 번에 걸쳐 대사헌을 역임하였으며, 형조, 이조, 호조 판서를 두루 역임하고 좌찬성에 올랐다. 김안로의 모함으로 다시 파직되었다가 김안로가 실각되자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그의 부인은 영의정을 지낸 여산송씨 송질의 딸이다.
또 그의 아들 홍섬(洪暹)은 선조 때 영의정을 3번이나 역임하였다. 중종 때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김안로를 탄핵하다가 홍양에 유배되었으며, 석방된 후 경기도 관찰사와 대사헌을 거쳐 이조판서와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선조 즉위 후 우의정, 좌의정을 역임하고 3번에 걸쳐 영의정에 올랐다.
홍대용이 청나라를 다녀와 3년에 걸쳐 제작한 것으로 알려진 혼천의.
홍대용은 그의 저서 의산문답을 통해 지동설과 우주무한론을 주장하여 동양의 정신세계인 화이사상을 무너뜨린 조선의 코페르니쿠스로 여겨지고 있다
또 정효공파의 파조인 홍담(洪曇)은 홍언필의 조카인데, 선조 때 이조판서를 역임하고 청백리에 올랐고, 효성이 극진해 효자정문이 세워졌다. 그의 손자인 홍희(洪憙)는 왕자사부와 동지돈녕을 지냈으며, 조선 16대 임금인 인조의 이모부가 된다. 그의 아들 홍진도(洪振道)는 판중추부사를, 홍진문(洪振文)은 한성좌윤을 역임하였다. 또 6대손인 홍억(洪檍)은 정조 때 6조 판서를 모두 역임하였다.
참의공파의 파조는 이조참의였던 홍한(洪瀚)이다. 그는 무오사화 때 화를 입었다. 그의 증손으로 홍가신(洪可臣)이 있는데, 그는 수원부사, 개성류수, 형조판서를 역임하였다. 특히 홍주목사시절 이몽학의 난을 평정하여 정난공신에 책록되었다. 그는 제자백가에 통달하고 시문과 필법에도 뛰어났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손자 홍우정(洪宇定)은 이이첨의 모함으로 8년간 천안에 부처되었다가, 병자호란으로 국치를 겪은 후 문수산에 은둔하여 영남절사로 불리우고, 죽은 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홍우정의 아우 홍우원(洪宇遠)은 숙종 때 이조판서에 올랐으며, 홍우량(洪宇亮)은 청백리에 뽑혔다.
홍대용이 태어난 곳인 천안에 홍대용과학관이 설립되어 있다.
대호군공파에서는 장희공 홍숙(洪淑)이 대사헌과 형조, 예조, 병조판서를 거쳐 좌찬성에 올랐다. 형조판서로 재직할 때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 등 사림파를 숙청하는데 관여하였다. 그의 손자 홍려(洪?)는 중종의 사위가 되었다. 홍숙의 현손인 홍익한(洪翼漢)은 김상헌 등과 함께 병자호란 때 척화를 주장한 삼학사의 1인이었으며, 병자호란이 끝난 후 오달제, 윤집 등과 함께 청나라에 끌려가 살해되었다. 그의 부인인 허씨와 아들 홍수원, 며느리 이씨도 피난길에 함께 죽었다. 그가 순절한 후 도승지와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정려가 명해졌으며, 광주의 헌절사, 강화의 충렬사, 평택의 포의사, 홍산의 창렬서원, 부안의 도동서원, 영천의 장암서원에 제향되었다.
또 남양홍씨 토홍계에서 유명한 인물은 실학자 홍대용(洪大容)이다. 그는 남양홍씨 토홍계 정효공파이며, 목사였던 홍력의 아들로 태어났다. 박지원, 박제가, 이덕무, 류득공 등과 함께 북학파의 일원으로 천문학과 경제에 일가를 이루었다. 영조 때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가는 삼촌 홍억을 따라 북경에 가서 서양문물을 배워왔다. 그는 음양오행설 대신 기화설(氣火說)을 주장했으며, 지구자전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과거제를 폐지하고 지역주민 천거에 의한 공거제(貢擧制)를 주장했으며, 천문학 연구를 위해 혼천의(渾天儀)를 제작하기도 했다.
남양홍씨 토홍계의 시조단비에는 시조인 홍선행과 이후 6세조까지 모셔져 있다.
◆남양홍씨 토홍계 근·현대인물
근·현대에 들어와서도 남양홍씨 토홍계에서는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그중 독립협회 간부였던 홍정후(洪正厚)가 있으며,
봉선화의 작곡가이면서 근대 음악계의 거장인 홍난파(洪蘭坡, 본명은 영후·英厚)가 있다.
홍난파는 경기 수원 출신으로 동경 우에노음악학교에서 수업한 뒤 ‘봉선화’를 작곡하였으며, 1925년엔 우리나라 최초로 바이올린 독주회를 가졌다.
음악잡지인 ‘음악계’를 발간하였으며, 조선음악가협회 상무이사를 지냈다. 또 이화여전과 경성보육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서양음악 보급에 힘을 기울였으며, ‘봉선화’ 외에도 ‘성불사의 밤’, ‘옛동산에 올라’ 등의 가곡과 ‘낮에 나온 반달’ 등의 동요를 작곡했다. 또 문학에도 재능을 보여 소설로 ‘향일초’, ‘처녀혼’, ‘폭풍우 지난 뒤’ 등을 저술하였다.
또 같은 수원 출신으로 시인이었던 홍로작(洪露雀, 본명은 사용·思容)은 ‘나는 왕이로소이다’, ‘백조는 흐르는데, 별하나 나하나’ 등을 지었고, 토월회 동인으로 연극활동에 참가하기도 했다. 그 외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한국인으로서는 최고 계급인 일본군 중장까지 올라 필리핀에서 전범으로 처형된 홍사익도 남양홍씨 토홍계이다.
현대에 들어와 남양홍씨 토홍계 인물로는 전경련 회장을 역임한 홍재선, 대한변협회장을 역임한 홍승만, 한국일보 부회장을 역임한 홍유선, 언론인이자 문학평론가인 홍사중이 있으며, 정·관계에서는 홍사덕(전 국회의원, 민화협 상임의장), 홍승직(고려대 교수), 홍사석(연세대 의대 교수), 홍사풍(고려인삼 회장)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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