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柱命理 風水地理/김두규의 국운풍수 23

남명 조식 선생의 유적 산천재

남명 조식 선생의 유적 산천재 하늘의 창조적 힘 갈무리 산천재. 한 시대의 위대한 인물이나 그의 세계관을 아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가 남겨놓은 글이나 동시대인 혹은 제자들이 쓴 글을 읽어보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땅을 택하여 살았는지를 보는 방법도 있는데, 풍수에서는 살았던 터를 통해 그 사람의 인품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자연과 인간의 합일이라는 기본 전제에서 본다면 이는 당연한 말이다. 인간과 대지는 혈연관계로 서로를 닮아가기 때문이다. 남명 조식 선생의 산천재와 무덤도 한 가지 좋은 예다. 남명의 터잡기(卜地)에 대한 공식 기록은 성운이 지은 묘갈문(墓碣文)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묘갈문에 의하면 “남명은 61세 때 지리산에 산천재를 짓고 깊이 잠기어 스스로 닦으며 세월을 보내다가 72세에 운명하여,..

주산(主山)의 의미

주산(主山)의 의미 조화와 균형 이룬 터잡기의 기준점 ① 바위를 주산으로 한 어느 무덤. ② 곰소초등학교의 주산. ③ 봉화군 토일 마을에 있는 안동 권씨 종가의 주산. ④ 여수 향일암의 주산. 조선 초기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주산을 어디로 할 것이냐를 두고 무학대사와 정도전이 논쟁을 벌였다는 야사가 전해진다.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정도전은 북악산을 주장했는데, 인왕산을 주산으로 할 경우 궁궐뿐 아니라 도읍 전체의 공간 배치가 동향으로 이루어지고 북악산을 주산으로 하면 남향으로 이루어진다. 결국 정도전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는데, 이때 무학대사가 탄식하며 “분명 200년 후에 내 말이 생각날 것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과연 200년 후 임진왜란과 더불어 국가의 위기가 닥쳤으며, 무학대사의 신묘한 풍수..

수맥과 풍수

수맥과 풍수 수맥은 아무런 죄가 없다 무덤 아래에 수맥이 흐르는지 확인하는 사람들. 건물 아래에 수맥이 흐르면 건강이 나빠지고, 건물에 금이 간다’ ‘공부방 밑에 수맥이 흐르면 아이가 공부를 못한다’ ‘묘지 아래에 수맥이 흐르면 우환이 생긴다’ ‘수맥을 차단하려면 동판을 까는 등 수맥 방지 조치를 취해야 한다’. 모두 수맥과 관련된 말이다. 풍수 강연 중에 흔히 받는 질문 가운데 하나가 ‘수맥과 풍수’의 연관성에 대해서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수맥과 풍수는 전혀 관계가 없다. 물론 수맥(水脈)이란 용어가 풍수에 등장한다. 조선조 지관(地官) 선발 고시과목에 수맥이란 용어가 언급된다. 하지만 이때 수맥이란 땅 위 물길의 모양을 말하는 것으로, 현재 쓰이는 땅 밑에 흐르는 물길을 말하는 수맥과는 다르다. 그..

신의 집터 임자 있나

신의 집터 임자 있나 소리꾼· 무당· 교회에는 명당자리 당대 최고 소리꾼의 집터이자 귀신의 집터였던 곳에 현재 교회(아래)가 들어서 있다. 귀신과 인간을 매개하는 무당 집터의 요건은 일반 사람들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고추장으로 유명한 전북 순창군에는 옛날부터 소리꾼과 무당들이 많이 살았다. 신분 차별의식이 강했던 과거에는 그 같은 사실이 자랑거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후손이나 인근 사람들이 밝히기를 꺼려해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무당이 살았던 집이 교회 또는 암자로 바뀌거나 절터가 무당의 집터로 바뀌는 일이 있기는 하지만, 세월이 흘러도 땅의 성격은 근본적으로 크게 변하지 않는다. 이러한 용도를 잘 알지 못하고 일반인들이 그곳에 들어가 살면 큰 낭패를 보게 된다. 그 한 예를 교수인 고향 후배한테서 ..

꽃절, 굿절 , 떡절

꽃절, 굿절, 떡절 땅 기운 묻어나는 순 우리말 절(寺)이름 순 우리말 이름을 가지고 있는 ‘굿절’, ‘꽃절’, ‘떡절’은 땅의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왼쪽부터) 우리나라 절들은 대부분 공식 명칭에 ‘사(寺)’를 쓴다. 예컨대 ‘해인사(海印寺)’라고 하지 ‘해인절’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절’이라는 말을 더 많이 쓴다. ‘절 모르고 시주하기’ ‘절에 가면 중노릇 하고 싶다’ ‘절에 가서 젓국 달라 한다’ 등 ‘절’과 관련된 속담도 많다. 그만큼 ‘사’라는 말보다는 ‘절’이라는 말이 우리에게 더 친숙했음을 뜻한다. 전국적으로 공식 명칭에 ‘절’을 쓰는 곳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데, 잘 알려진 곳을 꼽자면 ‘떡절’(경북 청도군 화양읍 소라리) ‘굿절’(경기 여주읍 가업..

박근혜 선영

朴槿惠 전 대통령 선영은 '장군 안검형' 地氣… 장군이 칼 뽑은 형세 구미 금오산이 鎭山 정상이 바위인 금오산과 곧추선 칼바위 있는 선영 탁자 모양의 천생산이 일직선으로 형국 이뤄 장군이 칼을 뽑으면… 잘 쓰면 내가 敵을 베지만 여차하면 敵에 베일 형세 역사학계의 태두 이병도 박사는 풍수에도 능하였다. 그의 명저 '고려시대의 연구'는 풍수적 관점에서 고려사를 서술한 것이다. 그는 '한 집안과 한 나라의 행복과 번영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생기가 충만한 곳을 가리어 집(宅)을 지어야 하는 것'으로 풍수를 이해했다. 여기서 집이란 산 사람을 위한 양택과 죽은 사람을 위한 음택 모두를 가리킨다. 지난 글에서 아베 총리의 선영을 모란만개형(牡丹滿開形), 시진핑 주석의 선영을 현룡재전형(見龍在田形)으로 소개하였다. ..

명성황후와 친정아버지 묘

명성황후와 친정아버지 묘 네 번 이장, 조선 왕실 몰락 재촉 명성황후의 친정아버지 민치록의 마지막 이장지(충남 보령) 역사적으로 어느 한 시대의 풍수 행태를 들여다보면 그 사회가 건전한지 아니면 몰락하고 있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다. 그 좋은 사례로 구한말 명성황후(민비)의 풍수 행태를 꼽을 수 있다. 그 전말은 이러하다. 1866년 경기 여주에서 계모와 단둘이 살던 가난한 처녀가 왕비로 간택됐다. 훗날 명성황후로 역사에 기록되는 그녀는 그러나 왕비가 된 후에도 그다지 순탄한 삶을 살지 못했다. 그녀에게 닥친 첫번째 불행은 왕비인 자신보다 상궁이 먼저 왕자를 생산한 사건이었다. 게다가 시아버지인 흥선대원군까지 그 왕자를 애지중지하며 감싸는 바람에 그녀는 질투심과 조바심으로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왕비가 ..

전의 이씨 시조묘

전의 이씨 시조묘 경부선·1번 국도도 비켜간 개바위 ▲개바위는 호랑이 명당의 먹이에 해당된다. ▼기차가 개바위를 피해 달리고 있다. ▶ 개바위 뒤에 그 사연을 적어 넣은 표석이 보인다. 충남 연기군 전의면 유천리 양안이 마을 앞으로는 경부선이 지나고, 경부선과 불과 몇 미터 떨어진 곳에는 탄약창으로 들어가는 철도가 있다. 그리고 두 철로 사이에는 노거수(老巨樹)와 바위 몇 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일명 ‘개바위(狗岩)’다. 바위들 중 큰 것은 어미 개가 누워 있는 형상을 하고 있으며, 둥글둥글한 작은 바위들은 강아지들을 연상시킨다. 이곳에는 ‘구암사적(狗岩事蹟)’이라는 표석도 있는데, 표석에 씌어진 글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전의 이씨 시조인 태사공 도(全義李氏太師公諱棹)의 묘소는 풍수상 엎드린..

포항시 송라면 중산1리 마을 돼지 석상

포항시 송라면 중산1리 마을 돼지 석상 뱀혈 터에 세운 ‘돼지 한 쌍’ 마을회관 입구에 세워진 돼지 석상 경북 포항에서 7번 국도를 따라 상행하다 보면 고찰 보경사(寶鏡寺)라는 팻말이 눈에 띄는데, 이 팻말을 쫓아 보경사 입구로 한참 들어가면 송라면 중산1리 마을을 만난다. 이곳 마을회관 앞에는 작은 돼지, 큰 돼지가 일렬로 늘어서 마을 뒷산을 쏘아보고 있어 흥미를 끈다. 물론 살아 있는 돼지가 아니라 석상이다. 1990년 초에 작은 돼지 한 마리를 세웠는데 그것만으로는 기세가 약할 듯해 6년 후인 96년 8월23일 마을 부녀회에서 그보다 큰 돼지 한 마리를 다시 세웠다 한다. 왜 세웠을까? “ 사람들에게 운이 있어 흥망이 교차하듯 마을에도 운이 있다.” 중산1리 이원기 이장(56)의 말이다. 지기쇠왕설..

창원 성주사의 100년 된 돼지

창원 성주사의 100년 된 돼지 절터 뜨거운 화기를 눌러라! 경남 창원시 천선동의 성주사는 이르면 가야국 초기, 늦게는 신라 흥덕왕 10년(835)에 세워졌다는 설이 제기될 정도로 아주 오래된 절이다. 이 고색창연한 성주사의 대웅전 입구에는 돼지 석상 한 쌍이 서 있다. 다른 절에서 찾아볼 수 없는 드문 경우다. 돼지 석상은 사찰 풍수뿐만 아니라 고을 풍수에서도 희귀한 사례에 해당한다. 성주사 돼지 석상이 언제 세워졌는지에 대해서는 뚜렷한 기록이 없다. 성주사 스님들은 50년이 넘은 것은 확실하고, 대충 잡아도 100년 전에 세워졌을 것이라고 말한다. 돼지 석상을 세운 이유에 대해서는 비슷비슷한 설들이 많다. 절터의 형상이 제비집[燕巢穴]인데 절 앞산이 제비를 노리는 뱀의 머리와 같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