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柱命理 風水地理/정경연의 풍수기행

맹사성 생가 풍수

초암 정만순 2021. 4. 1. 21:11

맹사성 생가 풍수

 

 

벼슬은 있지만 재물 안모이는 이유 있었네

 

 

우리 역사상 가장 뛰어난 재상으로 손꼽히는 맹사성의 생가는 충남 아산시 배방읍 행단길 25에 있다.

이곳을 맹씨행단(孟氏杏亶)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맹사성의 아버지가 이곳 은행나무 아래서 강학을 열었기 때문이다.

본래 행단이란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에서 제자들을 가르친 데서 연유한다.

인걸은 지령이라는 말이 있다.

맹씨행단은 설화산 정기가 집중된 북향집 명당이다.

마을 앞에서 설화산을 바라보면 끝이 뾰족하게 솟은 봉우리가 보인다.

붓끝처럼 생겼다하여 문필봉이라 부르는데 주로 대학자나 큰 인물의 배출을 의미한다.

그러나 문필봉이 보인다 하여 모든 집들이 인물을 배출하는 것은 아니다.

산의 정기가 집중되는 집이라야 가능하다.

산의 정기는 산줄기를 따라 전달된다.

설화산에서 내려온 산줄기가 맹씨행단으로 이어졌다.

때문에 맹씨행단에 정기가 모였다고 보는 것이다.

이를 확인하는 방법은 맹씨행단 뒤쪽으로 가면 볼록한 곳이 있다.

풍수에서는 이를 입수도두라고 하는데 산으로부터 전달된 생기를 모아놓은 장소다.

여기서 조금씩 집터로 생기를 공급해주는 역할을 한다.

담장 밖으로 나가서 입수도두로 연결된 산줄기를 따라 위로 올라가면 설화산까지 이어진다.

정기가 모인 집에서 인물이 나는 법이다.

이집은 본래 최영 장군이 살았다.

최영 장군의 부친인 최원직이 건축했다고 한다.

최영이 이성계에게 죽음을 당한 후 비어 있던 것을 맹사성의 아버지 맹희도가 이곳으로 이사를 와 살았다.

본래 맹사성의 할아버지 맹유와 최영장군은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이런 연유로 맹사성은 최영 장군의 손녀사위가 된다.

유명한 터에는 전설이 있기 마련이다.

맹씨행단도 맹사성 탄생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맹사성 어머니가 시집을 왔는데 아버지 맹희도는 혼인을 마치자마자 과거 공부하러 개경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어느 날 어머니가 꿈을 꾸었다.

커다란 태양을 치마폭에 받는 꿈이었다.

꿈이 하도 괴이한지라 시아버지께 꿈 이야기를 해드렸다.

그러자 시아버지는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는 이야기를 하지 말라 이르고 사람을 시켜 급히 아들 맹희도에게 서찰을 보냈다.

과거 공부에 열중하고 있던 맹희도가 서찰을 받아보니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내용이었다.

부랴부랴 고향 집을 찾은 맹희도가 아버지를 찾으니 아버지는 태평하게 앉아 있었다.

그리고는 “내 병은 그동안 다 나았으니 염려 말고 며칠 쉬었다 가라”는 것이었다.

영문을 모르는 맹희도는 아버지 뜻대로 며칠 집안에 머무르는 동안 부인이 맹사성을 잉태하게 됐다.

맹사성 할아버지는 좋은 태몽이 있을 때 설화산 정기가 모인 땅에서 아이를 잉태하라고 아들을 불렀던 것이다.

풍수에서는 좋은 땅에서 잉태하고, 출생하고, 성장해야 큰 인물이 난다고 보고 있다.

며느리를 아들이 있는 개성으로 보내도 되겠지만 과거 공부에 바쁜 아들을 부른 이유는 바로 좋은 잉태지 때문이다.

오늘날 훌륭한 아이를 낳고 싶은 예비 부모들이 명심해야 할 대목이다.

 



좋은 집터에도 부족한 것은 있기 마련이다.

첫째로 물이 집 앞으로 모이지 않고 금곡천으로 곧바로 내려가고 있는 점이다.

물론 현재 후손이 살고 있는 집 쪽으로 작은 수맥이 우측에서 좌측으로 흐르고 있다.

이 때문에 설화산에서 내려온 산줄기가 멈추어 생기를 모아 놓았다.

산은 물을 건너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문 밖의 물은 집을 외면한 채 빠르게 흘러 내려가고 있다.

물은 재물을 뜻하기 때문에 이런 집에서는 재물 모으기가 힘들다.

그래서 일지는 모르겠지만 최영 장군은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고 일렀고, 맹사성은 정승에 올랐음에도 청렴하여 비가 새는 집에서 가난하게 살았다.

두 번째로 앞산 배방산(361m)이 높다는 것이다.

물론 주산인 설화산(447.5m)보다는 낮지만 산이 가까이 있다 보니 상대적으로 높아 보인다.

앞산이 너무 높으면 기를 펼 수가 없어서 1인자가 되기 어렵다고 본다.

맹사성은 ‘일이지하 만인지상’이라 일컫는 영의정을 한 번도 못해봤다.

황희가 오랫동안 영의정을 했기 때문이다.

물론 맹사성이 권력과 부를 탐했다면 어찌 영의정과 부를 이루지 못했을까?

맹사성 같은 큰 인물이기에 이를 초월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맹씨행단 뒤편 담장 밖으로 200m 정도 가면 구괴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세 정승을 뜻하는 삼상당(三相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맹사성이 벼슬에서 물러나 친구인 황희, 권진을 불러 술잔을 기울였던 곳이다.

혹여 이곳을 찾는 사람은 이 정자에 앉아 맹사성이 지은 강호사시 생가 풍수

 

 

 

 

벼슬은 있지만 재물 안모이는 이유 있었네

 

 

 

 

 

우리 역사상 가장 뛰어난 재상으로 손꼽히는 맹사성의 생가는 충남 아산시 배방읍 행단길 25에 있다.

 

이곳을 맹씨행단(孟氏杏亶)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맹사성의 아버지가 이곳 은행나무 아래서 강학을 열었기 때문이다.

 

본래 행단이란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에서 제자들을 가르친 데서 연유한다.

 

인걸은 지령이라는 말이 있다.

 

맹씨행단은 설화산 정기가 집중된 북향집 명당이다.

 

마을 앞에서 설화산을 바라보면 끝이 뾰족하게 솟은 봉우리가 보인다.

 

붓끝처럼 생겼다하여 문필봉이라 부르는데 주로 대학자나 큰 인물의 배출을 의미한다.

 

그러나 문필봉이 보인다 하여 모든 집들이 인물을 배출하는 것은 아니다.

 

산의 정기가 집중되는 집이라야 가능하다.

 

산의 정기는 산줄기를 따라 전달된다.

 

설화산에서 내려온 산줄기가 맹씨행단으로 이어졌다.

 

때문에 맹씨행단에 정기가 모였다고 보는 것이다.

 

이를 확인하는 방법은 맹씨행단 뒤쪽으로 가면 볼록한 곳이 있다.

 

풍수에서는 이를 입수도두라고 하는데 산으로부터 전달된 생기를 모아놓은 장소다.

 

여기서 조금씩 집터로 생기를 공급해주는 역할을 한다.

 

담장 밖으로 나가서 입수도두로 연결된 산줄기를 따라 위로 올라가면 설화산까지 이어진다.

 

정기가 모인 집에서 인물이 나는 법이다.

 

이집은 본래 최영 장군이 살았다.

 

최영 장군의 부친인 최원직이 건축했다고 한다.

 

최영이 이성계에게 죽음을 당한 후 비어 있던 것을 맹사성의 아버지 맹희도가 이곳으로 이사를 와 살았다.

 

본래 맹사성의 할아버지 맹유와 최영장군은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이런 연유로 맹사성은 최영 장군의 손녀사위가 된다.

 

유명한 터에는 전설이 있기 마련이다.

 

맹씨행단도 맹사성 탄생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맹사성 어머니가 시집을 왔는데 아버지 맹희도는 혼인을 마치자마자 과거 공부하러 개경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어느 날 어머니가 꿈을 꾸었다.

 

커다란 태양을 치마폭에 받는 꿈이었다.

 

꿈이 하도 괴이한지라 시아버지께 꿈 이야기를 해드렸다.

 

그러자 시아버지는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는 이야기를 하지 말라 이르고 사람을 시켜 급히 아들 맹희도에게 서찰을 보냈다.

 

과거 공부에 열중하고 있던 맹희도가 서찰을 받아보니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내용이었다.

 

부랴부랴 고향 집을 찾은 맹희도가 아버지를 찾으니 아버지는 태평하게 앉아 있었다.

 

그리고는 “내 병은 그동안 다 나았으니 염려 말고 며칠 쉬었다 가라”는 것이었다.

 

영문을 모르는 맹희도는 아버지 뜻대로 며칠 집안에 머무르는 동안 부인이 맹사성을 잉태하게 됐다.

 

맹사성 할아버지는 좋은 태몽이 있을 때 설화산 정기가 모인 땅에서 아이를 잉태하라고 아들을 불렀던 것이다.

 

풍수에서는 좋은 땅에서 잉태하고, 출생하고, 성장해야 큰 인물이 난다고 보고 있다.

 

며느리를 아들이 있는 개성으로 보내도 되겠지만 과거 공부에 바쁜 아들을 부른 이유는 바로 좋은 잉태지 때문이다.

 

오늘날 훌륭한 아이를 낳고 싶은 예비 부모들이 명심해야 할 대목이다.

 

좋은 집터에도 부족한 것은 있기 마련이다.

 

첫째로 물이 집 앞으로 모이지 않고 금곡천으로 곧바로 내려가고 있는 점이다.

 

물론 현재 후손이 살고 있는 집 쪽으로 작은 수맥이 우측에서 좌측으로 흐르고 있다.

 

이 때문에 설화산에서 내려온 산줄기가 멈추어 생기를 모아 놓았다.

 

산은 물을 건너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문 밖의 물은 집을 외면한 채 빠르게 흘러 내려가고 있다.

 

물은 재물을 뜻하기 때문에 이런 집에서는 재물 모으기가 힘들다.

 

그래서 일지는 모르겠지만 최영 장군은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고 일렀고, 맹사성은 정승에 올랐음에도 청렴하여 비가 새는 집에서 가난하게 살았다.

 

두 번째로 앞산 배방산(361m)이 높다는 것이다.

 

물론 주산인 설화산(447.5m)보다는 낮지만 산이 가까이 있다 보니 상대적으로 높아 보인다.

 

앞산이 너무 높으면 기를 펼 수가 없어서 1인자가 되기 어렵다고 본다.

 

맹사성은 ‘일이지하 만인지상’이라 일컫는 영의정을 한 번도 못해봤다.

 

황희가 오랫동안 영의정을 했기 때문이다.

 

물론 맹사성이 권력과 부를 탐했다면 어찌 영의정과 부를 이루지 못했을까?

 

맹사성 같은 큰 인물이기에 이를 초월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맹씨행단 뒤편 담장 밖으로 200m 정도 가면 구괴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세 정승을 뜻하는 삼상당(三相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맹사성이 벼슬에서 물러나 친구인 황희, 권진을 불러 술잔을 기울였던 곳이다.

 

혹여 이곳을 찾는 사람은 이 정자에 앉아 맹사성이 지은 강호사시가를 읊어보기 바란다.

그리고 시공을 떠나 황희와 맹사성을 만나보기 바란다. 무언의 가르침을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