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柱命理 風水地理/정경연의 풍수기행

여주 세종대왕 영릉 풍수

초암 정만순 2021. 4. 3. 06:55

여주 세종대왕 영릉

 

부모 묘 근처가 반드시 '명당'은 아니다

 

▲ 여주시 능서면 왕대리에 위치한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합장릉인 영릉.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왕대리에는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합장릉인 영릉이 있다.

세종대왕을 이곳으로 이장하고 나서 조선왕조가 100년은 더 연장됐다고 하는 명당이다.

이 때문에 풍수지리를 공부하는 사람들의 필수 답사 코스다.

주말이면 일반인도 많이 찾는데 풍수지리를 알면 더 유익한 여행이 될 것이다.

본래 세종대왕의 능은 서울 강남구 내곡동 지금의 국정원 자리에 있었다.

세종대왕은 생전에 아버지 태종이 묻힌 헌릉 서쪽에 수릉(壽陵)을 정했다.

수릉이란 임금이 죽기 전에 미리 자신의 무덤을 만들어 놓는 것을 말한다.

일반인의 경우는 신후지지(身後之地)라고 한다.

수릉을 정한지 1년 후 소헌왕후(1395∼1446)가 승하하여 땅을 파보니 물이 나왔다.

이에 지관들이 좋지 않다고 아뢰었다.

그러나 세종은 부모님 묘 근처보다 더 좋은 명당이 어디 있겠냐며 고집했다.

4년 후 세종대왕이 54세로 승하하여 이곳에 묻히게 됐다.

그리고 불과 2년 후 세종의 뒤를 이은 문종(1414∼1452)이 죽고, 단종(1441∼1457)이 즉위 했으나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 당하고 비명에 죽었다.

수양대군(1417∼1468)은 어린 조카를 죽이고 왕이 됐으나 재위 13년 동안 피부병에 시달렸다.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는 잠을 자다가 갑작스런 가위눌림으로 세상을 떠났다.

둘째 해양대군(1450∼1469)이 예종에 올랐으나 재위 1년 만에 병으로 죽었다.

예종의 아들 또한 어린 나이에 죽었다.

세종 사후 19년 동안 왕이 4번 바뀌고 세자와 원자가 죽는 등 흉사가 끊이지 않았다.

마침내 조정은 이장을 결심하고 전국에서 뛰어난 지관을 선발해 명당을 찾도록 했다.

그때 상지관인 안효례의 눈에 발견된 곳이 지금의 영릉 자리다.

이곳은 본래 한산 이씨로 대제학과 영중추원사를 역임한 이계전의 묘역이었다는 주장과 광주 이씨로 세조 때 우의정을 지낸 이인손의 묘였다는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어떤 것이 사실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인손과 관련된 전설이 유명하다.

이인손의 슬하에는 이른바 ‘오극자손’이라고 불리는 다섯 아들이 있었다.

이인손이 세상을 뜨자 자식들은 유명한 지관을 초빙해 지금의 영릉 자리에다 장사를 지냈다.

이 자리를 잡아 준 지관은 당부하기를 가문이 번창하더라도 제실과 묘지 입구에 다리를 놓지 말라고 했다.

묘지 발복 때문인지 큰아들 극배는 영의정, 둘째 극감은 형조판서, 셋째 극중은 좌참찬, 넷째 극돈은 좌찬성, 다섯째 극균은 좌의정에 올랐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자손들도 정승판서를 비롯해 고관대작이 줄줄이 배출됐다.

이처럼 가문이 번창하자 자손들은 모두 선조의 음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제실도 없이 허름하게 묘지를 놔두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의견을 모았다.

곧이어 대대적인 묘지 정비를 했다.

우선 묘지로 가기 위해서는 개울을 건너야 하는데 이곳에 튼튼한 돌다리를 놓았다.

묘지를 화려하게 정비하고 그 아래에는 제실을 큼직하게 지었다.

한편 세종대왕의 새로운 능 자리를 찾기 위해 선발된 지관들은 한양 인근의 땅을 모조리 찾아다녔다.

그러나 마땅한 자리가 없었다.

왕릉은 원칙적으로 도성에서 100리를 넘지 않아야 한다.

임금이 하루 만에 성묘하고 돌아 갈 수 있는 거리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 안효례는 여주로 갔다.

여주는 100리가 넘지만 남한강 뱃길을 이용하면 하루 만에 왕복이 가능하다.

그가 여주에서 제일 높은 북성산에 올라 주변을 살피는데 갑자기 천둥번개가 치더니 소낙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산 속에서 비를 피할 데가 없었다.

그런데 저 멀리 제실이 보이는 것이었다.

제실로 향해 달려 가보니 폭우에 개울물이 불어나 건널 수가 없었다.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가려고 하는데 튼튼한 돌다리가 나타났다.

다리를 건너 제실의 처마 밑에서 피를 피하고 있자 묘지에서 밝은 서기가 비추는 것이었다.

올라가보니 천하대명당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길로 상경해 명당을 찾았다고 아뢰자 곧바로 이장이 결정됐다.

왕릉으로 정해지면 반경 10리 내에 있는 모든 묘들은 파묘를 해야 한다.

영릉을 조성하기 위해 땅을 파보니 ‘당장동방성인(當葬東方聖人)’이라는 글귀가 적힌 표석이 나왔다고 한다.

당연히 동방의 성인이 묻힐 자리라는 뜻이다.

그리고 또 다른 표석이 나왔다.

거기에는 왜 지관 말을 안 들었냐며 탄식한 후, ‘이제 어쩔 수 없으니 연을 날려 보내 떨어진 곳에 묻어 달라’는 내용이었다.

후손들은 후회스럽지만 그대로 할 수 밖에 없었다.

연이 떨어진 곳은 연하리라는 지명이 생겼다.

 


▲ 혈 앞이 평탄하고 주변을 좌청룡 우백호가 감싸고 있는 영릉

 



조선왕조를 100년이나 더 연장시켰다는 세종대왕의 영릉은 과연 얼마만큼 좋은 자리일까?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 용·혈·사·수·향 다섯 요소를 살펴본다.

은 산과 산맥을 말하며 맥이라고도 한다.

사람에게 계보가 있듯 땅에도 계보가 있다.

집안의 시조에 해당되는 산을 태조산, 중시조에 해당되는 산은 중조산이라 한다.

할아버지에 해당되는 산은 소조산 또는 주산이라고 한다.

아버지에 해당되는 산은 현무봉이고, 자식에 해당되는 자리가 곧 집터나 묘터인 이다.

조상들 중에서 자식에게 실제적으로 영향을 주는 사람은 할아버지와 아버지다.

풍수에서도 마찬가지로 주산현무봉을 매우 중요시 여긴다.

영릉의 주산은 북성산(257m)이다.

‘여지도서’에 의하면 북성산은 여주읍 서쪽 7리에 있고, 세종대왕 영릉과 효종대왕 녕릉의 주산이라고 명기하고 있다.

북성산에서 용맥이 내려와 능서면 신지리 독골고개에서 과협한 다음 다시 위로 올라 영릉 뒤쪽에 현무봉을 세웠다.

과협은 산과 산 사이 잘록한 고개다.

사람으로 치면 허리 부분이다.

역도 선수들이 힘을 모으기 위해 허리띠를 죄어 매는 것처럼 과협이 잘록하면 현무봉에 기운이 모인다.

현재는 42번 중부대로가 지나며 과협을 끊었다.

우리나라 개발의 문제점이다.

이곳에 생태통로를 설치하여 맥을 이어줄 필요가 있다.

현무봉에서 영릉까지 이어져오는 산줄기를 보면 마치 용이 미끄러지듯 내려오는 모습이다.

풍수에서 산줄기를 용으로 부르는 이유이다.

특히 능 쪽을 바라보면 거대한 용이 여의주(영릉)를 입에 물고 하늘로 날아가는 듯하다.

이러한 산세를 비룡승천형이라고 한다.

세종대왕을 이곳으로 모시고 조선 왕조가 100년이 더 연장되었다는 말이 실감난다.

건강을 위해 등산을 하는 사람은 영릉으로 내려오는 산줄기처럼 살아 있는 맥을 밟아야 한다.

생기가 흐르기 때문에 몸이 좋은 기운을 받는다.

풍수 답사가 건강에 좋은 것은 이 때문이다.

고종 때 제작한 ‘1872년 지방지도’를 보면 북성산에 ‘영릉주산회룡고주(英陵主山回龍顧主)’라고 적어 놓았다.

영릉은 주산에서 내려온 용이 선회하여 다시 주산인 북성산을 바라보았다는 뜻이다.

풍수에서는 이러한 곳을 회룡고조혈(回龍顧祖穴)이라고 한다.

용이 돌아 자신이 출발한 조종산을 바라보고 혈을 맺었다는 뜻이다.

용이 선회한다는 것은 그만큼 힘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회룡고조혈은 대개가 왕후장상지지와 같은 대혈을 맺는다.

능 뒤를 보면 약간 볼록한 부분이 있다.

이를 입수도두라고 한다.

용맥을 따라온 생기를 축적해놓고 혈에 조금씩 전달해주는 역할을 한다.

입수도두가 크면 기가 그만큼 많이 모여 있기 때문에 대혈이 된다.

혈을 사람의 얼굴에 비유하기도 하는데 입수도두는 이마에 해당된다.

이마가 약간 볼록하고 반듯하며 윤이 나면 귀인의 상이다.

마찬가지로 입수도두가 볼록하고 반듯하며 윤기가 나면 귀인을 배출할 자리가 된다.

반면에 이마에 상처나 흉터가 많으면 고난과 풍파를 많이 겪을 상이다.

마찬가지로 집이나 묘 뒤가 깨지고 무너지고 험한 악석이 있으면 어려움을 많이 겪을 자리가 된다.

영릉에 올라 앞을 보면 영릉이 왜 좋은 자리인지를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다.

현무봉에서 좌측으로 뻗은 청룡과 우측으로 뻗은 백호 능선이 두 팔로 껴안듯 하고 있다.

주변 산들은 겹겹으로 영릉을 향해 조아리고 있다.

영릉을 배신하거나 달아나는 산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마치 왕 아래에서 만조백관들이 도열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 때문에 영릉을 군신조회형(君臣朝會形)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왕이 조정에서 신하들과 회의를 하고 있는 형세라는 뜻이다.

본래 명당은 천자의 마당으로 백관들이 모이는 장소다.

이곳을 조정이라고도 한다.

경복궁으로 예를 들자면 왕이 앉아 있는 근정전은 혈 자리이고, 신하들이 도열한 품계석 있는 자리는 명당이다.

이를 지리가들이 빌려서 혈 앞에 펼쳐진 평평한 들판을 명당이라고 하였다.

일반인들은 좋은 자리를 명당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정말 좋은 자리는 혈이다.

그 다음 좋은 자리가 명당이다.

그렇지만 명당자리는 임금을 알현하는 자리이므로 높은 벼슬을 한다는 뜻이 된다.

 


궁궐에서 명당은 평탄해야 하고 전각들이 주변을 둘러싸주고 있어야 한다.

풍수적으로 좋은 자리 역시 혈 앞이 평탄해야 하고 주변을 좌청룡 우백호가 감싸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곳이 영릉이다.

영릉을 찾을 경우 세종대왕께 참배한 후 앞을 바라보며 왕기를 느껴보기 바란다.

분명 기분이 좋아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