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巨樹 保護樹 記念物/大邱 老巨樹 107

예연서원 보호수(느티, 은행나무)

예연서원 보호수(느티, 은행나무) @ 탐방일 : 2020. 09. 19 예연서원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읍 가태리에 있는 조선 후기에 세운 서원. 예원 서원(禮淵書院)은 망우당(忘憂堂)곽재우(郭再祐)[1552~1617]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하여 건립된 서원이다. 뒤에 곽준(郭)[1551∼1597]을 추향하였다. 곽재우의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계수(季綏), 호는 망우당(忘憂堂),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조직하여 경상도 일대에서 큰 활약을 하며 공을 세웠다. 저서로는 『망우당집(忘憂堂集)』이 있다. 곽준의 자는 양정(養靜), 호는 존재(存齋),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곽재우의 재종숙이다.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웠고, 안음 현감(安陰縣監)을 지냈으며 병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예..

매천동 보호수(은행나무)

매천동 보호수(은행나무) @ 탐방일 : 2020. 09. 18 매천동 대구광역시 북구에 있는 동. 1978년 대구시 북구 매천동, 1981년 대구직할시 북구 매천동을 거쳐 1995년 대구광역시 북구 매천동이 되었다. 매천동은 법정동이고 행정동은 관문동이다. 지명은 매남마을과 동쪽의 팔계천에서 유래한다. 자연마을인 소래실이 있는데 원래 마을 뒷산에는 소나무가 우거지고 앞으로는 맑은 물이 흐르며 옆으로는 큰 강이 흘러 송천동이라고 불렀으나 뒤에 소래실로 바뀌었다 매천대교~매남교~태전고가차도 구간의 매천로가 지나며 서쪽으로는 중앙고속도로가 남북 방향으로 달린다. 보호수(은행나무) 보호수 내력 * 소재지 : 대구광역시 북구 매천동 117-3번지 * 수종 : 은행나무 * 지정번호 5-4 * 지정일자 : 1982...

구천서당 보호수(팽나무)

구천서당 보호수(팽나무) @ 탐방일 : 2020. 09. 17 구천서당 - 소재지 : 대구광역시 북구 읍내동 1099 대구 광역시 북구 읍내동 구천마을 구천산 자락에 자리 잡은 구천서당은 달성배씨 문중에서 후손들을 교육시킬 목적으로 1936년 구천서원 내에 건립했다. 구천서당은 일(一)자 형태 4칸 규모의 홑처마 건물이다 구천서원은 조선 초기에 동고 배휘집이라는 인물이 세운 곳이라 전해진다. 동고선생은 단종이 왕위를 찬탈 당하자 김시습,이맹전,남효온 등과 함께 충신의 절개를 지키고자 벼슬을 버리고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결국 역적으로 몰려 낙항하였고 구천서원을 세워 은거지로 삼았다. 동고선생은 이곳에 은거하며 향리의 후학들을 가르쳤다고 전해진다. 보호수(팽나무) - 수종 : 팽나무 - 지정종목 : 보호수..

독암서당 보호수(느티나무)

독암서당 보호수(느티나무) @ 탑방일 : 2020. 09. 16 독암서당 독암서당(獨巖書堂) 문화재자료 제12호 (1984. 7. 25 지정) 소재지 : 동구 봉무동 223-3 이 서당은 1865년(高宗(고종) 2년) 봉무동 江洞(강동) 마을에 世居(세거)한 慶州(경주) 崔氏(최씨) 門中(문중)에서 세운것으로 鄕約(향약)을 만들어 자손들의 교육과 인근 마을의 인재 배출에 힘썼던 곳이다. 鳳舞亭(봉무정)을 세운 崔象龍(최상룡)도 이 서당에서 글을 읽었다 한다. 獨岩(독암)이라 함은 高麗(고려) 太祖(태조) 王建(왕건)이 후백제의 견훤과의 公山(공산)싸움에서 패하여 홀로 피신해 앉아 있었다는 獨坐岩(독좌암)에서 따온 이름으로 원래의 독방서당은 현재의 위치에서 10여m앞쪽에 있었으나 1973년 길이 새로 나면..

봉무동 보호수(느티나무)

봉무동 보호수(느티나무) @ 탑방일 : 2020. 09. 16 봉무동 대구광역시 동구에 속하는 법정동. 봉무동(鳳舞洞)은 뒷산 모양이 봉이 춤추는 형색을 하고 있다 하여 이름한 것이라 설명하기도 하고 현재의 봉무정에 호를 구축하기 위하여 땅을 파니 땅속에서 봉이 나와 북쪽으로 날아갔다 하여 봉이 춤추는 지역이라 봉무동이라 불리어지게 되었다 설명하기도 한다. 봉무동은 원래 대구부(大邱府) 해서부면(解西府面) 지역으로, 『봉촌집(鳳村集)』과 『송석만고(松石漫稿)』 등의 문헌에는 지역명으로 ‘봉무촌(鳳舞村)’이라 기록이 되어있다. 단산동, 독암동, 외남동을 병합하여 봉무동이라 하였다. 1914년 경상북도 달성군 해안면에 편입되었다. 1957년 경상북도 대구시에 편입되어 1963년 동구에 속하게 되었다. 봉무동..

내동 보호수(느티나무)

내동 보호수(느티나무) @ 탑방일 : 2020. 09. 15 내동 내동(內洞)은 약 450여 년 전 순흥안씨(順興安氏)가 정착하였다. 순흥안씨가 북쪽 뒷산에 올라가 보니 좌우는 산으로 가로막혀 있고 안에 있는 자리가 너무나 아늑하고 따뜻하게 보여 정착하게 되면서 미대동의 속 골짜기에 있다는 뜻으로 내동이라 불렀다고 한다. 내동(內洞)은 원래는 대구부 해북촌면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옥정동과 함께 내동이 되어 경상북도 달성군 공산면에 편입되었다. 1958년 1월 1일 경상북도 대구시에 편입되었다가 1963년 1월 1일 경상북도 달성군으로 환원되었다. 1981년 7월 1일 대구직할시 동구에 속하게 되었다. 1992년 10월 4일 내동의 행정동이 공산2동에서 공산1동으로 변경되었으며 199..

팔공산 파계사 보호수(영조나무)

팔공산 파계사 보호수(영조나무) @ 탐방일 : 2020. 09.10 파계사 파계사는 신라 애장왕 5년(804)에 심지왕사가 창건하였고, 1605년부터 1646년에 걸쳐 임진왜란으로 불탄 절을 계관법사가 중창하였으며, 숙종연간에 현응스님이 삼창하였다. 주차장에서 일부러 옛길을 되짚어야 볼 수 있는 비석거리에 부도와 부도비를 두엇씩 거느리고 ‘팔공산파계사사적비’가 서 있다. 1935년에 세워진 것이라 조형적으로 눈길을 끄는 것은 없는데, 삼창주 현응스님과 숙종의 만남을 이렇게 적고 있다. 숙종 계유년(1693) 시월 초닷새 밤에 상(上)께서 예스럽고 소박하게 생긴 스님이 대궐로 들어오더니 이내 보이지 않는 꿈을 꾸었다. 사흘 뒤에는 상서로운 빛이 궐내를 비추자 사람을 시켜 빛이 솟아나는 곳을 찾아보도록 했다..

국우동 노거수(탱자, 느티나무)

국우동 노거수(탱자, 느티나무) @ 탐방일 ㅣ 2020. 09. 09 국우동 1981년 대구직할시 북구 국우동을 거쳐 1995년 대구광역시 북구 국우동이 되었다. 국우동은 법정동이고 행정동은 동천동이었으나 2009년 9월 1일부로 변경되어 현재 국우, 도남, 동호, 학정의 4개 법정동으로 구성되어있다. 지명은 국가의 살림을 넉넉하게 했다는 뜻의 한시에서 유래한다. 솥골·완전리·중말들·국우리 등의 옛지명이 전하며 국우리는 아홉 마을이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보호수로 느티나무가 있다. 수령 350년이며 높이 20m, 둘레 5.3m이다. 문화재로는 국우동 탱자나무(대구기념물 10)와 대고장(대구무형문화재 12)이 전한다. 노거수 대구광역시 북구 국우동에 있는 탱자나무와 느티나무 * 탱자나무 대구광역시..

계산셩당 이인성나무

계산셩당 이인성나무 @ 탐방일 : 2020.0 9. 07 계산 주교좌 대성당 로마네스크 양식의 아름다운 성당, 대구계산동성당 * 천주교 대구대교구 계산주교좌대성당, 통칭 계산성당(桂山聖堂)은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오거리에 위치한 천주교 대구대교구교구장 대주교의 주교좌 성당이다. 본당의 주보 성인은 루르드의 성모 마리아이다. 1911년에 대구대목구가 설정되었을 때 주교좌 성당으로 결정되었다 대구(大邱) 계산동(桂山洞) 성당(聖堂)은 1886년 대구 지역 선교 활동을 책임 맡고 부임한 로베르(1853~1922) 신부가 지금의 계산동 성당 부지를 매입하면서 건립되기 시작하였다. 1899년 한국식의 목조 십자형 건물으로 지어졌으나 1년 만에 화재로 모두 소실되었다. 그 후 재건축에 착수하여 로베르 신부가 설계하고..

이상화 고택 석류나무

이상화 고택 석류나무 / 서상돈 고택 @ 탐방일 : 2020. 09. 07 이상화 이상화는 1901년 5월 22일 경상북도 대구부 서문로 12번지의 양옥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시우(李時雨)이며, 어머니는 김신자(金愼子)로 김해 김씨이다. 4형제 중 둘째이다. 형 이상정은 독립 운동가이며, 셋째 아우 이상백은 한국최초의 IOC위원이자 한국 사회학계의 선구자이고 넷째 아우 이상오는 정통 수렵가이자 바둑 유단자이다. 그의 집안은 대구의 명문가로 대 부잣집이었으나 아버지 이시우는 둘째 아들이었다. 그의 큰아버지 이일우(李一雨)의 자손들은 대구의 명문가로 성장하였다. 1919년 대구에서 3·1 운동 거사를 모의하다가 모의가 발각되어 피신하였으며, 이후 1922년 《백조》 1호에 〈말세의 희탄〉, 〈단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