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공산 파계사 보호수(영조나무)
@ 탐방일 : 2020. 09.10
파계사
파계사는 신라 애장왕 5년(804)에 심지왕사가 창건하였고, 1605년부터 1646년에 걸쳐 임진왜란으로 불탄 절을 계관법사가 중창하였으며, 숙종연간에 현응스님이 삼창하였다.
주차장에서 일부러 옛길을 되짚어야 볼 수 있는 비석거리에 부도와 부도비를 두엇씩 거느리고 ‘팔공산파계사사적비’가 서 있다.
1935년에 세워진 것이라 조형적으로 눈길을 끄는 것은 없는데, 삼창주 현응스님과 숙종의 만남을 이렇게 적고 있다.
숙종 계유년(1693) 시월 초닷새 밤에 상(上)께서 예스럽고 소박하게 생긴 스님이 대궐로 들어오더니 이내 보이지 않는 꿈을 꾸었다.
사흘 뒤에는 상서로운 빛이 궐내를 비추자 사람을 시켜 빛이 솟아나는 곳을 찾아보도록 했다.
(심부름하는 이가) 남대문에 이르니 본사의 도승(道僧) 영원(靈源)스님이 관서지방을 두루 거쳐 한양의 여각에서 묵고 있었다.
상께서 (스님을) 불러 보고 손을 잡으며 기뻐하시더니 수락산으로 보내어 칠성님께 (아들의 점지를 바라는) 백일기도를 드리도록 했다.
이듬해 갑술년(1694) 원자(元子)가 탄생했다. 을해년(1695) 스님이 돌아올 때 ‘현응’(玄應)이라는 호를 내리고 두터운 예우로 전송하면서 내탕금을 주어 칠성전(七星殿)·백화루(白花樓)를 짓게 하니 칠성전이 곧 자응전(慈應殿)이다.
이렇게 맺어진 왕실과 파계사와의 인연은 조선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줄곧 이어진다.
숙종 22년(1696)에는 왕이 손수 지은 축책(祝冊)을 내려주어 왕실의 원당으로 삼았으며, 같은 임금 30년(1704)에는 현응스님의 기도로 태어났다는 영조가 열한 살의 나이에 ‘慈應殿’(자응전)이란 편액을 써서 하사하였다.
영조는 이밖에도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여러 차례 완문(完文)1)을 내려 관부의 잡역에 승려를 동원치 못하게 하고 양반과 관아의 침탈이 미치지 않도록 했으며, 1751년에는 우의정 이의현(李宜顯)을 파견하여 기영각(祈永閣)을 세워 생전의 수복(壽福)과 사후의 명복을 기원하는 축원당을 삼았다.
정조 1년(1777)에는 ‘천향각’(天香閣)이라 쓴 어필 편액이 하사되었고, 순조 31년(1831)에는 왕실에서 내려준 돈과 희사로 미타암을 세웠다.
철종 11년(1860)년 백화루를 중수할 때는 왕비가 내탕금을 내려준 바 있고, 고종 14년(1877)에는 순찰사(巡察使) 박제인(朴齊寅)이 기영각을 수리하였다.
이런 모든 사실들은 일반에게는 공개되지 않는 「파계사원당사적」(把溪寺願堂事蹟), 「어보사적」(御寶事蹟), 「어보봉안제차」(御寶奉安第次), 몇 점의 완문, 천향각과 자응전 현판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이렇게라도 절의 명맥을 유지해온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서글퍼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
주차장에서 한 굽이 꺾어 돌면 높직한 이층 누각 진동루 앞에 서게 된다.
파계사, 진동루(鎭洞樓) ― 모두 풍수에 연결되는 이름들이다.
파계사라는 이름에는 아홉 갈래나 되는 절 좌우의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따라 지기(地氣)가 흘러나가는 것을 방비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으며, 마찬가지로 진동루라는 명칭은 골짜기의 지기를 눌러준다는 뜻을 담고 있다.
누각 아래로 보이는 인공못 또한 같은 배경에서 만들어진 것이니 이중·삼중으로 방패막이를 한 셈이다.
진동루
주차장 앞에 있는 이층 누각으로 파계사 주변 골짜기의 지기를 눌러준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 지방의 가람배치에 따르는 일반적이고 자연스러운 동선인 누각 아래를 통과하는 길을 제한한 까닭에 진동루 양 옆으로 난 계단을 이용하여 한 단 올라서면 절의 본전인 원통전 영역이다.
좌우의 설선당과 적묵당, 위아래의 원통전과 진동루가 반듯한 네모를 이루어 중심공간을 형성하고, 그 주위로 기영각·산령각·응향각·미타전·범종각 등이 골짜기의 좁은 지세에 따라 오밀조밀 들어섰다.
이쯤에서 파계사의 면목이 숨김없이 드러난다.
사는 이들의 손길이 구석구석 미쳐 어수룩한 데라곤 없이 말끔하다.
그러나 깔끔함이 좀 지나치기도 해서 원통전 앞마당은 매끈하게 자르고 깎은 화강석으로 온통 덮여버리는 바람에 흙 한 줌 볼 수 없으니 풀벌레 한 마리도 마음놓고 깃들이기 어려울 듯싶고, 특히나 또각거리는 구둣소리라도 이어지면 수행하는 스님들의 귀에 얼마나 거슬릴까 하는 괜한 걱정도 든다.
공간구성은 파계사에서 돋보이는 점이다.
설선당·적묵당·미타전 그리고 골짜기 건너 율원으로 쓰이는 금당 등은 모두 지형과 지세, 건물의 구조 그리고 필요한 곳만을 두른 담장 등을 적절히 이용하여 내부공간을 외부인으로부터 무리 없이 알맞게 차단해준다. 비록 관람객에게 많은 공간을 내주었지만 이런 공간구성을 통하여 최소한의 수행공간·생활공간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원통전은 따로 대웅전이 없는 파계사의 중심 법당이다
. ‘원통’이란 말은 주원융통(周圓融通), 즉 ‘진리는 두루 원만하여 모든 것에 통해 있다’는 말이 줄어서 된 것으로 관세음보살의 불격을 표시하는 용어이니,
원통전은 곧 관음전의 다른 이름이 된다.
수수한 조선식 축대, 그 아래 흐드러진 꽃 한 송이를 피운 배례석, 오래 되어 보이지는 않지만 간결함이 눈에 드는 소맷돌 따위가 잔상으로 남는다.
원통전 안에서는 보물 제992호로 지정된 목조관음보살좌상,
조각이 다채로운 수미단, 18세기 초 조선불화의 색채감각을 잘 보여주는 삼장보살도 등을 살펴볼 수 있다.
원통전
대웅전이 없는 파계사의 중심 법당으로 관음보살을 모시고 있어 관음전이라고도 부른다.
목조관음보살좌상은 원통전의 주존불로서 좌우보처 없이 혼자서 불단 위에 정좌하고 있다. 가슴과 배, 양 어깨와 두 팔을 거쳐 양쪽의 무릎까지 흘러내리고 교차하는 영락장식도 화려하지만 머리 위의 금속제 보관은 더 볼 만하다. 전면에 가득한 꽃무늬·당초무늬만도 상당히 세밀하고 정교하여 탄복스러울 지경인데 곳곳에 수십 개의 보석이 박혀 문자 그대로 ‘보관’이다. 1979년 이 관음보살상을 개금하다가 영조의 도포가 발견되어 원당사찰 파계사의 위상을 다시 한 번 입증한 바 있기도 하다. 당시 발견된 복장발원문의 “正統十二年佛像重修”(정통십이년불상중수)라는 구절로 보아 세종 29년(1447)에 불상을 중수했음을 알 수 있고, 이로 미루어 이 불상의 조성시기는 그보다 앞서는 것으로 보인다. 여러 가지로 귀한 불상이긴 하겠으나 유리장 안에 안치한 모습이 갇힌 듯 답답해 보이고, 그 유리장이 후불탱화의 많은 부분을 가려 아쉬움이 남는다.
목조관음보살좌상
좌우보처 없이 혼자서 불단 위에 정좌하고 있다.
상·중·하 3단으로 이루어진 수미단은 동화의 세계다. 각 단마다 여러 개의 칸을 질러 칸칸이 돌아가며 3면에 빼곡이 투각한 무늬들은 활짝 핀 연꽃 아래서 게를 등에 업고 물고기가 헤엄치는가 하면, 모란꽃 줄기에 올라선 동자가 꽃가지를 흔들기도 하고, 거북이 하늘을 날며 말이 구름 속을 헤엄치기도 한다.
조선조 목조각의 맛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불단이다.
원통전 안 수미단
상중하 3단으로 이루어진 수미단은 매우 다채롭고 아름답게 꾸며졌다.
원통전 오른쪽 벽에는 천장(天藏)·지장(地藏)·지지(持地) 보살을 그린 삼장보살도가 걸려 있다. 삼장탱화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우리나라에서만 유달리 많이 그려진 탱화이다. 지장 신앙이 그 모체인데 천지인 삼재(三才)로 지장을 확대 배분하여 천상·지상·지하 삼계(三界)의 교주(敎主)인 천장, 인장(人藏, 地持로 표현), 지장을 설정하고 이에 귀의하려는 마음에서 이런 삼장탱이 그려지게 되었다. 숙종 33년(1707) 비단 바탕에 채색으로 그린 이 탱화는 녹색과 적색이 주조를 이루면서도 밝고 명랑한 색채가 18세기 초 특유의 색채감각을 잘 보여줄 뿐 아니라 능숙한 필선이나 형식화되지 않은 형태 등이 퍽 우수하다고 평가되는 그림이다
.
큰 절을 벗어나 성전암으로 오르는 길을 한 굽이 돌면 길 위 오른쪽 비탈에 파계사의 공덕주 현응대사의 부도를 비롯한 석종 4기가 있는 조촐한 부도밭이 있고, 절의 들목 매표소 앞에는 작은 동산만한 누석단(累石壇)도 있다.
파계사는 넓지 않은 터에 맞추어 집들을 앉힌 크지 않은 절이고, 그 작은 품에 수행자를 감싸고 보호하는 공간도 그런대로 간직한 말끔한 절이다.
보호수
현응대사 나무
2018.11월 모습
현재(2020. 09. 10) 모습
2020년 태풍 마이삭으로 인해 부러져 버린 처참한 모습이다
이제 보호수 명단에서 제외될 예정이다
영조대왕나무
진동루 앞 뜰에 '영조(英祖) 나무'라 불리는 250년 된 느티나무가 서있었는데, 이 나무의 이름은 후대에 붙인 것이지만 조선 후기의 임금인 영조와 파계사의 인연을 나름대로 말해주고 있다.
입구의 현응대사 나무와 함께 짝을 이루고 있는 나무인데, 그만한 사연이 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파계사와 영조의 인연은 숙종 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파계사에 주석하던 현응대사는 왕자의 탄생을 바랬던 숙종의 부탁을 받아 정성껏 백일기도를 올렸고 마침내 이듬해 영조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그러한 인연으로 사찰 경내의 가장 고목인 느티나무에 이름을 붙여 영조대왕나무로 부르게 되었다
# 사진첩
칠성시장 노천식당에서 수제비 한그릇(3,000냥) 으로 점심 요기
101-1번 시내 버스를 타고 파계사 주차장에 도착
현응대사 나무
일주문
선자교
팔공산 파계사
파계지
통일원교 축조 공덕비
통일원교
문화해설사의집
고긍 부토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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