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巨樹 保護樹 記念物/大邱 老巨樹

이상화 고택 석류나무

초암 정만순 2020. 9. 7. 17:34

이상화 고택  석류나무 / 

서상돈 고택

 

@ 탐방일 : 2020. 09. 07

 

 

이상화

 

 

이상화는 1901년 5월 22일 경상북도 대구부 서문로 12번지의 양옥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시우(李時雨)이며, 어머니는 김신자(金愼子)로 김해 김씨이다.

4형제 중 둘째이다.

형 이상정은 독립 운동가이며, 셋째 아우 이상백은 한국최초의 IOC위원이자 한국 사회학계의 선구자이고 넷째 아우 이상오는 정통 수렵가이자 바둑 유단자이다.

그의 집안은 대구의 명문가로 대 부잣집이었으나 아버지 이시우는 둘째 아들이었다.

그의 큰아버지 이일우(李一雨)의 자손들은 대구의 명문가로 성장하였다.

 

1919년 대구에서 3·1 운동 거사를 모의하다가 모의가 발각되어 피신하였으며, 이후 1922년 《백조》 1호에 〈말세의 희탄〉, 〈단조〉, 〈가을의 풍경〉 세 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이후 《백조》 나머지 호, 《개벽》, 《문예운동》, 《삼천리》, 《여명》, 《신여성》, 《조선문단》, 《조선지광》, 《별건곤》등 잡지에 〈나의 침실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대구 행진곡〉, 〈서러운 해조〉등 60여 편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생전에 출간된 시집은 없으며, 사후 1951년 백기만이 청구출판사에서 펴낸 《상화와 고월》에 시 16편이 실렸고, 이기철 편 《이상화 전집》(문장사, 1982)과 김학동 편 《이상화 전집》(새문사, 1987), 대구문인협회 편 《이상화 전집》(그루, 1998) 등 세 권의 전집에 유작이 모두 실렸다.

대표적인 작품들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의 침실로>이다.

 

 

이상화 고택

 

 

대구광역시 중구 서성로 6-1 (계산동2가 84번지에 위치한 고택은 항일문학가로 잘 알려진 이상화(李相和, 1901 ~1943) 시인이 1939년부터 작고하던 1943년까지 거하던 곳이다.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광복을 위해 저항정신의 횃불을 밝힌 시인 이상화선생의 시향이 남아있는 곳이다.

이상화고택은 1999년부터 고택을 보존하자는 시민운동으로 시작하여 군인공제회에서 인근 주상복합아파트를 건립하면서 고택을 매입해 지난 2005년 10월 27일 대구시에 기부채납했다.

대구시는 대지면적 205m², 건축면적 64.5m²(단층 목조주택 2동)의 고택을 보수하고, 고택보시민운동본부에서 모금한 재원으로 고택 내 전시물 설치를 완료했다.

고택은 일자형 기와집에 부속 건물, 마당, 우물 등 전형적인 한옥이다.

이상화 고택은 암울한 시대를 살면서 일제에 저항한 민족시인 이상화의 정신을 기리고 후손에게 선생의 드높은 우국정신과 문학적 업적을 계승하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된다.

맞은편에는 서상돈고택이 위치하며 인근에는 대구약령시장, 계산동성당이 있

 

 

노거수(석류나무)

본채 앞 좁은 마당에는 감나무 한 그루와 석류나무 두 그루가 있다.

그 중 석류나무 하나는 원래의 몸체는 세월의 아픔을 견디지 못해 썩어 없어지고 곁가지들이 크게 자라 지금의 수세를 이루고 있는데 앙상하고 생채기 많은 밑동은 한눈에도오랜 연륜을 짐작게 한다.

 

 

 

 

서상돈

 

 

서상돈(徐相敦, 1851~1913)은 조선 말기의 기업인이자 관료였고 민족 독립운동가였다.

대구에서 지물 행상과 포목상으로 성공한 인물로, 정부의 검세관이 되어 조세곡을 관리하기도 하였다.

1898년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간부로 활동하면서 러시아의 내정간섭을 규탄하고 민권보장 및 참정권획득 운동을 전개하였고 1907년 대구의 광문사의 부사장으로 재직 중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할 것을 제의하고 국채보상취지서를 작성 발표하는 등 국권회복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1907년 정부가 일본에 빚을 많이 져 국권을 상실한다고 생각하여 대구 광문사 사장인 김광제와 함께 금연으로 나라의 빚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을 벌였다,

 

서상돈 고택

 

 

대구광역시 중구 서성로 6-1(계산동 2가)에 있는 민족독립운동가 서상돈(徐相燉)의 옛집이다.

원래 고택이 있던 자리에 아파트가 건설되면서,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여 축소 복원되어 지어졌다.

근대식 한옥형태로 지어졌으며, 대구근대문화골목에 위치하고 있다.

고택 내부에는 서상돈이 작성한 《국채보상취지서》등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기록물이 전시되어 있다.

대구시는 2008년 계산동 이상화 고택 옆에 있었던 서상돈의 생가를 이전복원하였고 국채보상공원을 조성하고 동상을 세우는 등 그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있다.

 

 

# 동영상

 

 

 

 

$ 사진첩

 

계산성당 오른쪽 골목길이 이상화, 서상돈 고택 가는 입구이다

 

이상화 선생~~

 

근대문화체함관 계산예가

 

이상화 고택 입구

 

 

대문과 담장

 

 

안마당 과 석류나무

고택 전경

고목 석류나무

 

세월의 아픔과 인고의 정염

 

상화선생 진영

 

바로 곁의 계산예가

 

 

주위를 둘러싼 빌딩들

 

본채 방안에 전시된 선생과 연관된 자료들

대문을 나서면 바로 앞이 서상돈 선생 고택이다

 

선생 관련 유품들

 

 

 

선생 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