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柱命理 風水地理 229

김제 최영희(최배달) 생가 터 풍수

김제 최영희(최배달) 생가 터 와룡산 정기 가장 많이 모이는 생가 터 바람의 파이터로 유명했던 극진 가라데 창시자 최영의(1923~1994) 생가 터는 전북 김제시 용지면 와룡리 125-18에 있다. 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터는 흙으로 덮여 묘목들이 심어져 있다. 앞에는 호남선 철도가 지나고, 옆은 소음방로 와룡육교가 서있는 막다른 터다. 최영의는 아버지 최승현과 어머니 김부영의 6남1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면장이었고 집 앞 들녘 대부분을 소유할 만큼 부자였다. 형제들도 다 잘 되었다. 큰형은 조선일보 기자, 둘째 형은 전북대학교 교수였다. 그 집안 식구들은 모두 키가 컸고 뼈대가 굵은 강골이었다. 1932년 용지보통학교(1928년 개교)에 입학한 최영의는 어려서부터 무술에 관심이 많았다..

영월 김삿갓 묘 풍수

영월 김삿갓 묘 '산고곡심'의 흉지… 자손이 끊기는 절손 묘 김삿갓으로 유명한 김병연(1807~1863)의 묘는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 897-2에 있다. 김병연의 묘가 발견되고 지역이 외부에 알려지자 영월군은 관광 활성화를 위해 2009년 면의 명칭을 하동면에서 김삿갓면으로 바꾸었다. 본래 하동은 상동에서 발원하여 중동을 지나온 옥동천이 남한강과 합류하는 곳이다. 남한강을 따라 내려가면 단양과 충주, 여주, 이천, 양평을 지나 한양으로 갈 수 있다. 옥동천을 따라 상류로 올라가면 십승지로 알려진 상동이다. 숨어살면서도 외부 소식은 접할 수 있는 지역이다. 김병연은 안동김씨로 순조 7년(1807) 경기도 양주에서 김안근과 함평이씨 사이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조부는 선천부사인 김익순이다. 다섯 살..

옥천 중봉 조헌 묘 풍수

옥천 중봉 조헌 묘 산과 물이 음양의 조화 이뤄 임진왜란 때 고경명, 김천일, 곽재우와 함께 4대 의병장의 한사람인 중봉 조헌(1544~1592)의 묘는 충북 옥천군 안남면 도농리 산63-1에 있다. 조헌의 본관은 백천(白川)이다. 백천조씨가 명문으로 소문난 것은 조헌이 문묘에 배향되었기 때문이다. 문묘(文廟)란 공자의 사당을 말하고, 배향(配享)은 문묘에 신위를 모시는 것을 말한다. 문묘배향은 신라 성덕왕 16년(717) 왕자 김수충이 당에서 공자와 10철·72제자의 화상을 가져와 국학에 안치시키면서부터 시작하였다. 문묘에는 공자를 정위로 하여 4성(四聖: 안자·증자·자사·맹자), 공자의 뛰어난 10명의 제자인 공문십철(孔門十哲: 안연·민자건·염백우·중궁·재아·자공·염유·계로·자유·자하), 송나라 유학..

부산 동래정씨 발복지 정문도 묘

부산 동래정씨 발복지 정문도 묘 선산 지키려 공원조성… 한눈에 봐도 명당 동래정씨 2세조인 정문도 묘는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양정동 464-1(동평로 335)에 있다. 이곳은 조선팔대명당으로 알려진 곳이다. 조선팔대명당은 풍수가들마다 꼽는 곳이 다르다. 이는 8개의 명당이 정확하게 정해진 것이 아니란 의미다. 좋은 경치를 가리켜 팔경이라 하는 것처럼 좋은 터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팔대명당이라 부른다. 전국을 대표할 만큼 좋은 곳이면 조선팔도명당, 지역을 대표할 만큼 좋은 곳이면 경기팔대명당, 호남팔대명당, 영남팔대명당, 충청팔대명당, 강원팔대명당 등으로 불린다. 정문도 묘는 화지공원 내에 있다. 묘역에 들어서면 도시인데도 숲이 잘 보존된 것에 놀란다. 도시화가 이루어지면 보상금의 유혹 때문에 선산을 파는 문..

남명 조식 선생의 유적 산천재

남명 조식 선생의 유적 산천재 하늘의 창조적 힘 갈무리 산천재. 한 시대의 위대한 인물이나 그의 세계관을 아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가 남겨놓은 글이나 동시대인 혹은 제자들이 쓴 글을 읽어보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땅을 택하여 살았는지를 보는 방법도 있는데, 풍수에서는 살았던 터를 통해 그 사람의 인품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자연과 인간의 합일이라는 기본 전제에서 본다면 이는 당연한 말이다. 인간과 대지는 혈연관계로 서로를 닮아가기 때문이다. 남명 조식 선생의 산천재와 무덤도 한 가지 좋은 예다. 남명의 터잡기(卜地)에 대한 공식 기록은 성운이 지은 묘갈문(墓碣文)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묘갈문에 의하면 “남명은 61세 때 지리산에 산천재를 짓고 깊이 잠기어 스스로 닦으며 세월을 보내다가 72세에 운명하여,..

홍성 만해 한용운 생가 풍수

홍성 만해 한용운 생가 시적 감성과 기개가 동시에 느껴지는 용맥 생가로 내려오는 맥 변화무쌍… 일제에 저항한 기세 엿보여 우물 있는 쪽 분수령에 해당… 지기가 모인 혈에 세워진 집 특별한 모양 없는 안산이 흠 만해 한용운(1879~1944) 생가는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492(만해로 318번길 83)에 있다. 스님은 청주한씨 집안에서 아버지 한응준과 어머니 온양방씨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 이름은 유천이고, 법명은 용운이며 법호는 만해다. 스님은 어릴 때부터 부친으로부터 의인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으며 자랐으며 14세 때는 전정숙과 결혼도 하였다. 의인이 되고자 했던 만해는 1894년 동학혁명이 실패하자 여기저기 방황하며 다녔다. 속리산 법주사와 오대산 월정사에 머무르다가 18세 때는 설악..

최영 장군 묘 풍수

최영 장군 묘 '웅크린 용' … 조선 망하자 후손 두각 대자산서 현무봉까지 맥 이어져 험한 氣 못 털어내 기운순화 안돼 지형의 맥 사람처럼 윤회하는데 노년기 장군묘에 장년기운 남아 고려말기 명장 최영(1316~1388) 장군 묘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70-2에 있다. 주차장에 내려 입구 계단에 들어서면 ‘최영장군묘’라고 쓴 표지석이 보인다. 표석 후면을 보니 기증한 사람이 전주이씨 종손이다. 전주이씨인 이성계가 위화도회군 후 최영을 참형한지 600년이 지났다. 최영의 후손인 동주(철원)최씨들은 조선시대 크게 빛을 보지 못했다. 후손들이 이성계가 세운 조선의 녹을 먹지 않겠다고 벼슬에 나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왕실의 견제와 차별이 더 큰 이유다. 당연히 두 집안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

유씨(劉氏), 강릉유씨(江陵劉氏)

유씨(劉氏), 강릉유씨(江陵劉氏) ◆유씨(劉氏)는 유(劉)씨의 성인 유(劉)의 뜻이 ‘죽이다’의 뜻으로 쓰여, 별칭으로 묘금도 유(劉, 묘+금+도)씨라고 한다. 원래 유씨는 중국에서 시작된 성씨로 시조는 중국에서 항우와 쟁패를 다투고 한나라를 세운 고조 유방(劉邦)이다. 우리나라 유씨가 시작된 것은 고려시대 임팔급(평택임씨 시조)과 함께 송나라에서 건너온 팔학사(八學士)의 한 사람인 유전(劉筌)부터이다. 전 세계의 유(劉)씨들은 항우를 꺾고 한나라를 세운 한고조 유방을 시조로 삼고 있다 전북 부안에 있는 강릉유씨 사당 영성재 내부전경. 그는 고려 문종 때 임팔급 등 팔학사와 함께 건너왔는데, 유씨의 시조인 한나라 고조 유방(劉邦)의 41세손이다. 송나라에서 병부상서를 지냈으며, 재상 왕안석(王安石)이 제..

논산 명재고택 풍수

논산 명재고택 풍수 옥녀탄금 뿌리내리자 가문 융성 충청도 양반집으로 유명한 명재고택은 충남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306에 위치하고 있다. 논산은 육군훈련소가 있어 병영 도시로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학문의 고장으로 기호학파의 중심지였다. 흔히 ‘충청도 양반’이란 말은 논산 때문에 생겼다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주변에는 노성향교와 공자의 영정을 모신 권리사가 있어 조선 유학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교촌이라는 지명은 향교가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파평윤씨가 노성면 일대에 뿌리를 내린 것은 입향조인 윤돈이다. 선조 때 공조판서와 예조판서를 역임한 인물이다. 그런데 그의 책임 하에 조성된 선조의 능이 장마에 무너지는 일이 생겨났다. 그 책임을 지고 낙향한 그는 지금의 이구산 서쪽 자락에 터..

주산(主山)의 의미

주산(主山)의 의미 조화와 균형 이룬 터잡기의 기준점 ① 바위를 주산으로 한 어느 무덤. ② 곰소초등학교의 주산. ③ 봉화군 토일 마을에 있는 안동 권씨 종가의 주산. ④ 여수 향일암의 주산. 조선 초기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주산을 어디로 할 것이냐를 두고 무학대사와 정도전이 논쟁을 벌였다는 야사가 전해진다.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정도전은 북악산을 주장했는데, 인왕산을 주산으로 할 경우 궁궐뿐 아니라 도읍 전체의 공간 배치가 동향으로 이루어지고 북악산을 주산으로 하면 남향으로 이루어진다. 결국 정도전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는데, 이때 무학대사가 탄식하며 “분명 200년 후에 내 말이 생각날 것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과연 200년 후 임진왜란과 더불어 국가의 위기가 닥쳤으며, 무학대사의 신묘한 풍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