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柱命理 風水地理/정경연의 풍수기행

최영 장군 묘 풍수

초암 정만순 2021. 4. 11. 18:44

최영 장군 묘

 

'웅크린 용' … 조선 망하자 후손 두각

 

대자산서 현무봉까지 맥 이어져 험한 氣 못 털어내 기운순화 안돼
지형의 맥 사람처럼 윤회하는데 노년기 장군묘에 장년기운 남아

 

고려말기 명장 최영(1316~1388) 장군 묘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70-2에 있다.

주차장에 내려 입구 계단에 들어서면 ‘최영장군묘’라고 쓴 표지석이 보인다.

표석 후면을 보니 기증한 사람이 전주이씨 종손이다.

전주이씨인 이성계가 위화도회군 후 최영을 참형한지 600년이 지났다.

최영의 후손인 동주(철원)최씨들은 조선시대 크게 빛을 보지 못했다.

후손들이 이성계가 세운 조선의 녹을 먹지 않겠다고 벼슬에 나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왕실의 견제와 차별이 더 큰 이유다.

당연히 두 집안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비록 작은 표지석이지만 이를 보면서 이제 두 집안이 화해를 했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최영 장군 묘 가는 길은 좁은 협곡이다.

청룡 자락이 백호 자락을 완전히 감싸고돌기 때문에 그 사이가 좁은 것이다.

풍수에서는 이를 교쇄라고 한다.

‘자물쇠를 잠그다’의 뜻인데, 대문의 빗장을 위와 아래 것을 서로 어긋나게 가로질러 잠그는데서 유래된 말이다.

협로를 따라 올라가면 둥글게 생긴 작은 공간이 나온다.

예전에는 농사를 지었던 땅인데 지금은 잡초만 무성하다.

이곳으로 주변 골짜기 물들이 다 모인다.

물뿐만 아니라 하늘의 햇볕도 밤에는 달빛과 별빛이 모인다.

비록 규모는 작지만 명당은 평탄원만하며 수구는 좁게 관쇄되었다.

이렇게 깊은 골에도 어딘가 기가 모인 땅 즉, 혈이 있다는 뜻이다.

안내판이 있는 곳에서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최영 장군과 부친인 최원직의 묘가 상하로 있다.

두 묘 모두 아래 기단이 사각형인 방형묘다.

전형적인 고려 양식으로 조선 초기까지 유행되었다.

당시만 해도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다다는 천원지방의 우주관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이 죽으면 우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묘지를 그렇게 꾸민 것이다.

이후 땅도 둥글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묘지 아래가 둥글게 변했다.

80년대 이전 교과서에는 풀이 나지 않는 ‘붉은 무덤’으로 소개하였다.

장군이 처형될 때 “내 평생 탐욕을 가졌으면 무덤에 풀이 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풀이 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예언 했는데 정말 풀이 나지 않았다.

후손들에 의하면 1970년대 후반까지는 실제로 풀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곳의 주산은 크게 자비롭다는 뜻의 대자산(210m)이다.

한북정맥 호명산(423m)에서 갈라져 나와 앵무봉(621m)과 개명산(560m), 우암산(328.6m)을 거쳐 내려온 맥이다.

대자산에서 현무봉까지 많은 변화를 하면서 험한 기를 털어 내려고 했지만 완전히 순화시키지는 못했다.

그러다보니 현무봉에서 묘지로 내려가는 맥도 험한 살기를 가지고 있다.

빗물에 골이 파이고 할퀴며 삭박작용이 진행 중이다.

지형도 사람처럼 유년기·장년기·노년기·준평원을 거치며 윤회를 한다.

최영 장군 묘의 맥은 노년기이지만 아직도 장년기의 기운이 남아있어 생전의 장군 모습을 보는 것 같다.

묘 뒤의 입수도두는 생기가 모여 있으므로 순하고 부드러운 것이 특징이다.

그런데 이곳은 풍화작용 중인 돌들이 돌출되어 있다.

기의 탈살이 다 이루어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땅은 혈을 맺지 못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최영 장군 묘까지 맥이 내려가면서 험한 기운을 한꺼번에 다 떨어버린다.

불과 10m도 안 되는 거리다.

풍수이론의 탈살정혈법(脫殺定穴法)에 딱 맞는 자리다.

그러나 최영 장군 부친 묘는 탈살 전 자리에 썼기 때문에 좋지 않다.

봉분의 잔디 상태를 보면 그 차이를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이곳은 산들이 가까이 있어 외부 산이 보이지 않는다.

산이 가까이 있으면 혈은 높은 곳에 있는 법이다.

이곳이 명당에 비해 높은 곳에 위치한 이유라 할 수 있다.

이곳의 전체적인 모습은 용이 또아리를 틀고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다.

이를 은산반룡형(隱山蟠龍形)이라고 한다.

최영의 후손들이 조선시대 내내 웅크리고 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조선이 망하고 나서야 동주최씨들의 세상 밖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개화사상가로 한국의 근대사상을 성립시킨 최한기, 국학의 대가인 육당 최남선,

 

 

국무총리를 역임한 최두선을 비롯해서 무장의 후예답게 장군을 많이 배출하였다.

최영 장군은 본관이 동주(철원)이지만 충남 홍성에서 사헌부 간관을 지낸 아버지 최원직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리고 아산 설화산 자락 지금의 맹씨행단에서 자랐다.

최영이 16세 때 아버지는 아들에게 “황금 보기를 돌같이 여겨라”라는 말을 남긴다.

오늘날까지 최영 장군이 존경을 받는 가르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