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柱命理 風水地理/정경연의 풍수기행

김제 최영희(최배달) 생가 터 풍수

초암 정만순 2021. 4. 20. 17:21

김제 최영희(최배달) 생가 터

 

 

와룡산 정기 가장 많이 모이는 생가 터

 

 

바람의 파이터로 유명했던 극진 가라데 창시자 최영의(1923~1994) 생가 터는 전북 김제시 용지면 와룡리 125-18에 있다.

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터는 흙으로 덮여 묘목들이 심어져 있다.

앞에는 호남선 철도가 지나고, 옆은 소음방로 와룡육교가 서있는 막다른 터다.


최영의는 아버지 최승현과 어머니 김부영의 6남1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면장이었고 집 앞 들녘 대부분을 소유할 만큼 부자였다.

형제들도 다 잘 되었다.

큰형은 조선일보 기자, 둘째 형은 전북대학교 교수였다.

그 집안 식구들은 모두 키가 컸고 뼈대가 굵은 강골이었다.

1932년 용지보통학교(1928년 개교)에 입학한 최영의는 어려서부터 무술에 관심이 많았다.

집안 머슴 중에 함경도에서 온 사람이 있었는데 그로부터 택견을 배웠다고 한다.

둘은 날마다 와룡산에 올라 무술을 연마했다.

특히 주먹이나 손날로 상대를 가격하는 수박(手搏)·당수(當手) 수련을 열심히 했다.

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1939년 일본으로 건너가 실전 가라테를 익혔다.

입산하여 혹독한 훈련을 한 결과 1947년 전국가라테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였다.

1948년 2차 입산 후 전국의 유명 도장을 돌며 도장 깨기 시합을 벌였다.

그는 모두 승리하였다.

1950년대는 맨손으로 소와 대결하여 뿔을 부러뜨리고, 한방에 죽이는 등 가공할 능력을 보여주었다.

1952년 미국으로 건너가 전국을 돌며 무술시범을 보였다. 또한 프로레슬링이나 권투·유도·검도 등의 고수들과 100여 차례 격투기를 벌여 모두 승리했다. 당시 일본은 2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좌절감에 빠져 있었다. 최배달이 서양인들을 쓰러뜨리는 것을 본 일본인들은 열광했다.

1953년부터는 자신의 가라테를 세계화하기 시작했다.

미국 30여개 도시를 비롯하여 세계 140개국에 지부를 두었다.

그러나 한국에는 가라테 지부를 두지 않았다.

태권도의 발전을 위해서다.

1964년 극진가라테연맹을 발족하여 초대 총재를 역임하였다.

그는 한국의 태권도가 세계로 진출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 공로로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문화훈장을 받기도 했다.

최영의는 오야마 마스다츠(大山倍達)로 개명하고 일본으로 귀화하였다.

그를 최배달로 부르는 까닭이다.

일본 부인에게서 딸 셋, 50세 넘어 한국인 부인과 아들 셋을 두었다.

아들 세 명은 모두 한국 국적이다.

최영의의 일대기를 다룬 방학기의 만화 ‘바람의 파이터’는 인기가 매우 높았다.

당시 스포츠서울에 연재되면서 100만부의 판매부수를 올렸다.

영화로도 만들어져 양동근이 주연을 맡았다.

 

 

 

이곳의 태조산은 모악산(795.2m)이고, 중조산은 매봉산(251.4m)이다.

매봉산에서 서쪽 김제 승반산(26.2m)까지 해발 20~60m 정도의 야산 줄기로 이어진다.

이를 풍수에서는 평강룡이라고 한다.

산은 높지 않아도 변화가 활발하면 대혈을 맺을 수 있는 용맥이다.

효정에서 북쪽으로 뻗은 야산 자락이 마항과 수하마을 사이를 지나 와룡산(33m)을 세웠다.

용이 누워있는 모습과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정상에 오르면 30리(12km) 떨어진 익산까지 평야가 펼쳐진다.

와룡산에서 여러 갈래로 산줄기가 갈라져 나간다.

그중에서 중심맥 자리에 최영의 생가 터가 있다.

와룡산의 정기가 가장 많이 모인 곳이다.

이곳을 중심으로 주변의 야산들이 청룡과 백호가 되고, 안산은 들판 건너 상리 마을 언덕이다.

평야지대이지만 들판은 넓어 보이지 않는다.

야트막한 산들이 사방으로 감싸주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각 지자체는 역사인물을 활용하여 관광 상품을 만들고 있다.

최영의가 창시한 극진 가라테는 2018년 기준 전세계 130여국에서 약2천500만 명의 수련생이 있다고 한다. 이들에게 창시자의 생가는 성역이 될 수 있다.

김제시는 이를 활용한 지역 활성화 방안을 마련해보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