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柱命理 風水地理/정경연의 풍수기행 83

부산 동래정씨 발복지 정문도 묘

부산 동래정씨 발복지 정문도 묘 선산 지키려 공원조성… 한눈에 봐도 명당 동래정씨 2세조인 정문도 묘는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양정동 464-1(동평로 335)에 있다. 이곳은 조선팔대명당으로 알려진 곳이다. 조선팔대명당은 풍수가들마다 꼽는 곳이 다르다. 이는 8개의 명당이 정확하게 정해진 것이 아니란 의미다. 좋은 경치를 가리켜 팔경이라 하는 것처럼 좋은 터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팔대명당이라 부른다. 전국을 대표할 만큼 좋은 곳이면 조선팔도명당, 지역을 대표할 만큼 좋은 곳이면 경기팔대명당, 호남팔대명당, 영남팔대명당, 충청팔대명당, 강원팔대명당 등으로 불린다. 정문도 묘는 화지공원 내에 있다. 묘역에 들어서면 도시인데도 숲이 잘 보존된 것에 놀란다. 도시화가 이루어지면 보상금의 유혹 때문에 선산을 파는 문..

홍성 만해 한용운 생가 풍수

홍성 만해 한용운 생가 시적 감성과 기개가 동시에 느껴지는 용맥 생가로 내려오는 맥 변화무쌍… 일제에 저항한 기세 엿보여 우물 있는 쪽 분수령에 해당… 지기가 모인 혈에 세워진 집 특별한 모양 없는 안산이 흠 만해 한용운(1879~1944) 생가는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492(만해로 318번길 83)에 있다. 스님은 청주한씨 집안에서 아버지 한응준과 어머니 온양방씨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 이름은 유천이고, 법명은 용운이며 법호는 만해다. 스님은 어릴 때부터 부친으로부터 의인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으며 자랐으며 14세 때는 전정숙과 결혼도 하였다. 의인이 되고자 했던 만해는 1894년 동학혁명이 실패하자 여기저기 방황하며 다녔다. 속리산 법주사와 오대산 월정사에 머무르다가 18세 때는 설악..

최영 장군 묘 풍수

최영 장군 묘 '웅크린 용' … 조선 망하자 후손 두각 대자산서 현무봉까지 맥 이어져 험한 氣 못 털어내 기운순화 안돼 지형의 맥 사람처럼 윤회하는데 노년기 장군묘에 장년기운 남아 고려말기 명장 최영(1316~1388) 장군 묘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70-2에 있다. 주차장에 내려 입구 계단에 들어서면 ‘최영장군묘’라고 쓴 표지석이 보인다. 표석 후면을 보니 기증한 사람이 전주이씨 종손이다. 전주이씨인 이성계가 위화도회군 후 최영을 참형한지 600년이 지났다. 최영의 후손인 동주(철원)최씨들은 조선시대 크게 빛을 보지 못했다. 후손들이 이성계가 세운 조선의 녹을 먹지 않겠다고 벼슬에 나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왕실의 견제와 차별이 더 큰 이유다. 당연히 두 집안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

논산 명재고택 풍수

논산 명재고택 풍수 옥녀탄금 뿌리내리자 가문 융성 충청도 양반집으로 유명한 명재고택은 충남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306에 위치하고 있다. 논산은 육군훈련소가 있어 병영 도시로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학문의 고장으로 기호학파의 중심지였다. 흔히 ‘충청도 양반’이란 말은 논산 때문에 생겼다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주변에는 노성향교와 공자의 영정을 모신 권리사가 있어 조선 유학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교촌이라는 지명은 향교가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파평윤씨가 노성면 일대에 뿌리를 내린 것은 입향조인 윤돈이다. 선조 때 공조판서와 예조판서를 역임한 인물이다. 그런데 그의 책임 하에 조성된 선조의 능이 장마에 무너지는 일이 생겨났다. 그 책임을 지고 낙향한 그는 지금의 이구산 서쪽 자락에 터..

강릉 허난설헌·허균 생가 풍수

강릉 허난설헌·허균 생가 허씨집안의 흥망성쇠 강릉 허난설헌·허균 생가 허균과 허난설헌 생가는 강릉시 초당동 475-3(난설헌로 193번길 1-29)에 위치한다. 백두대간 곤신봉(1,131m)에서 내려온 산줄기가 동해바다에 이르러 멈춘 야트막한 야산자락이다. 입구에는 허균·허난설헌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이곳에서 허난설헌이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허균을 빼고 허난설헌 생가로만 부르기도 한다. 동생 허균은 외가인 강릉시 사천면 사천진리 교산 아래 애일당(愛日堂)에서 태어나 친가인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공원길을 따라 생가 가까이 이르면 다섯 개의 시비가 서있다. 이른바 허씨오문장가의 시비다. 아버지 초당 허엽(1517~1580)과 그의 자녀들인 악록 허성(1548~1612), 하곡 ..

남양주 김번 묘 풍수

남양주 김번 묘 조선 8대 명당… 세도정치의 시작점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석실마을 주변 산자락에는 신안동김씨 조상 묘가 즐비하다. 그중에서 김번(金?, 1479~1544) 묘는 조선8대명당으로 알려진 곳이다. 그 후손들 중에 왕비 3명, 정승 15명, 판서 35명, 대제학 6명, 청백리 3명, 120여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였으니 8대명당이란 말이 나올 만 하다. 이들은 조선 후기 외척으로 왕권보다 더 강한 세도정치를 하였다. 여기서 조선8대명당이란 8곳이 정해진 것이 아니다. 단지 대단히 좋은 자리를 강조하여 부르는 말이다. 유명한 명당이 그러하듯 김번 묘에도 전설이 있다. 이곳은 본래 김번의 처가인 남양홍씨들의 땅이었다. 김번의 백부인 학조대사가 양주 회암사에 머물고 있을 때 이곳을 지나다..

여주 세종대왕 영릉 풍수

여주 세종대왕 영릉 부모 묘 근처가 반드시 '명당'은 아니다 ▲ 여주시 능서면 왕대리에 위치한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합장릉인 영릉.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왕대리에는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합장릉인 영릉이 있다. 세종대왕을 이곳으로 이장하고 나서 조선왕조가 100년은 더 연장됐다고 하는 명당이다. 이 때문에 풍수지리를 공부하는 사람들의 필수 답사 코스다. 주말이면 일반인도 많이 찾는데 풍수지리를 알면 더 유익한 여행이 될 것이다. 본래 세종대왕의 능은 서울 강남구 내곡동 지금의 국정원 자리에 있었다. 세종대왕은 생전에 아버지 태종이 묻힌 헌릉 서쪽에 수릉(壽陵)을 정했다. 수릉이란 임금이 죽기 전에 미리 자신의 무덤을 만들어 놓는 것을 말한다. 일반인의 경우는 신후지지(身後之地)라고 한다. 수릉을 정한지 1..

맹사성 생가 풍수

맹사성 생가 풍수 벼슬은 있지만 재물 안모이는 이유 있었네 우리 역사상 가장 뛰어난 재상으로 손꼽히는 맹사성의 생가는 충남 아산시 배방읍 행단길 25에 있다. 이곳을 맹씨행단(孟氏杏亶)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맹사성의 아버지가 이곳 은행나무 아래서 강학을 열었기 때문이다. 본래 행단이란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에서 제자들을 가르친 데서 연유한다. 인걸은 지령이라는 말이 있다. 맹씨행단은 설화산 정기가 집중된 북향집 명당이다. 마을 앞에서 설화산을 바라보면 끝이 뾰족하게 솟은 봉우리가 보인다. 붓끝처럼 생겼다하여 문필봉이라 부르는데 주로 대학자나 큰 인물의 배출을 의미한다. 그러나 문필봉이 보인다 하여 모든 집들이 인물을 배출하는 것은 아니다. 산의 정기가 집중되는 집이라야 가능하다. 산의 정기는 산줄기를 따라 ..

양주 한확 부인 남양홍씨 묘 풍수

양주 한확 부인 남양홍씨 묘 귀한 여자 나올 자리 후세 인수대비 배출 조선시대 유일하게 여성의 묘에 신도비가 세워진 곳이 있다. 경기도 양주시 은현면 용암리 산54-1에 위치한 한확의 부인 남양부부인 홍씨 묘다. 신도비란 정2품 이상의 벼슬이나 학문과 덕행이 높아 후세의 사표가 될 만한 사람의 묘지 입구에 세우는 비석을 말한다. 내용은 그 사람의 가족 내력과 생전의 업적을 적는다. 이때 글과 글씨는 당대의 문장가와 명필에게 부탁한다. 신도비 첫머리를 보면 신도비명과 함께 누가 글을 지었고 누가 글씨를 썼는지를 알 수 있다. 글 지은 사람은 찬(撰) 글씨를 쓴 사람은 서(書)로 표시하고 있다. 또 비석 제일 위의 비명은 전서로 쓰는데 누가 썼는지를 전(篆)으로 표시하고 있다. 남양홍씨 부인(1403~145..

양주 남양홍씨 홍지 묘 풍수

양주 남양홍씨 홍지 묘 조상덕에 대대손손 벼슬길 양주 남양홍씨 홍지 묘 남양홍씨 당홍파의 발복지로 알려진 홍지 묘는 경기도 양주시 남면 상수리 산15에 위치한다. 옥녀가 머리를 풀어헤친 모습인 옥녀산발형 명당으로 유명한 곳이다. 옥녀산발형은 사방으로 뻗은 산자락을 머리카락으로 본다. 머리카락마다 혈을 맺는다고 본다. 이 때문에 망당산(203.8m) 자락에는 능선마다 남양홍씨 당홍계의 수많은 묘가 있다. 이중 제일 가운데 능선에 홍지의 묘와 그 아래에 부인 개경왕씨 묘가 자리 잡았다. 홍지(洪智)는 고려 말 임진도승(臨陣渡丞)을 역임한 학자로 이성계·무학대사와 친구처럼 지내는 사이였다. 그러나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려하자 이에 반대하였다. 자신이 고려왕실 수연대군 왕규의 사위이기 때문이다. 조선이 개국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