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柱命理 風水地理/정경연의 풍수기행 83

강화도 철종 외가

강화도 철종 외가 용맥과 혈 갖췄지만 2% 아쉬운 명당 철종 외가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선원면 냉정리 246번지에 있다. 사도세자의 증손인 철종이 강화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할아버지 은언군 때부터다. 은언군의 장남 상계군이 홍국영의 모반죄로 몰려 유폐 당한 후 음독자살하였다. 이 사건으로 그 일가족 모두가 강화로 유배되었다. 여기서 부인 송씨와 며느리 신씨는 세례를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이로 인해 신유박해 때 은언군은 부인·며느리와 함께 사약을 받고 사사되었다. 강화에는 은언군의 차남인 전계군만 홀로 남게 되었다. 그에게는 부인 최씨와 염씨·이씨 2명의 첩이 있었다. 철종의 어머니 용담염씨(龍潭廉氏)는 강화 출신이다. 전계군은 순조의 특명으로 유배에서 방면되어 도성에서 거주하게 되었다. 이때 철종..

명당의 부활 - 용산 미군기지 터

명당의 부활 - 서울 용산 미군기지 터 전란 때마다 타국에 내줬던 군사요충지 수도 서울 한복판에 130년간 외국군대가 주둔하고 있던 땅이 있다. 용산이다. 조선시대 용산은 교통의 요지이자 한양의 관문이었다. 한강 포구 중에서 수심이 깊고 숭례문(남대문)까지 거리가 10리 이내에 있었다. 이 때문에 전국에서 세곡과 진상품을 실은 조운선이 몰려들었다. 용산에서 남대문까지 만초천을 따라 난 도로가 넓고 평탄하여 물류집산지로 발전하였다. 또한 군사 요충지로 외적이 침략할 때는 외국군대의 주둔지가 되었다. 고려 몽고침략기에는 몽고군이 용산 지역을 병참기지로 활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임진왜란 때는 평양까지 올라갔던 왜군이 조선·명나라 연합군에 패퇴하여 내려와 용산에 주둔하였다. 조선 말기에는 청이 임오군란을 계기로..

양평 한음 이덕형 묘

양평 한음 이덕형 묘 좌청룡 우백호 못만난 아쉬운 묏자리… 오성과 한음의 일화로 유명한 한음 이덕형(1561~1613)의 묘는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 638-9에 있다. 이곳에 가면 영정을 모신 재실이 있고, 그 뒷산으로 올라가면 두기의 묘가 있다. 위는 지중추부사를 지낸 아버지 이민성과 어머니 문화류씨 합장묘고, 아래는 한음과 부인 한산이씨 합장묘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자 선영이 있는 이곳에 묻혔다. 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 묘에 합장했고, 자신의 묘 자리도 그 아래에 정했다. 한음은 광주이씨(廣州李氏)로 6대조는 우의정을 지낸 이인손, 5대조는 좌의정으로 연산군의 폭정을 바로잡으려고 애쓰다 조카 이세좌와 함께 사사된 이극균, 증조부는 이수총, 조부는 이진경이다. 지금의 서울 남대문과 ..

양산 통도사

양산 통도사 독수리가 날개 펼쳐 새끼 품은 '영취포아형' 삼보사찰 중의 하나인 통도사는 경남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583(통도사로 108)에 위치한다. 삼보는 불교의 귀의대상인 불보, 법보, 승보를 가리킨다. 불보사찰은 부처의 진신사리와 가사를 봉안한 양산 통도사, 법보사찰은 부처의 말씀인 팔만대장경을 간직하고 있는 합천 해인사, 승보사찰은 보조국사 지눌 이래 열여섯 명의 국사를 배출한 화순 송광사를 꼽는다. 통도사는 신라의 자장율사가 선덕여왕 15년(646) 창건한 절이다. 스님은 진골 출신으로 636년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계율종의 본산인 종남산과 문수보살의 주처인 오대산에 머무르며 화엄사상을 터득하였다. 유학 7년만인 643년 귀국하면서 석가모니가 입었던 가사와 부처의 진신사리, 대장경을 선물 받아..

수원 화성과 행궁

수원 화성과 행궁 물 많은 水原… 보국지형 만나 탄탄대로 수원은 계획에 의해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신도시다. 이 때문에 국토교통부와 대한국토·도시계획학회는 수원화성이 완성된 날인 10월 10일을 기념해 ‘도시의 날’로 정했다. 본래 수원의 읍치는 지금의 융건릉이 위치한 화산 아래에 있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이곳으로 이장하면서 수원 팔달산 동쪽 기슭에 신읍을 건설하여 관아와 민가를 옮기도록 하였다. 당시 구읍에는 민가 221호에 676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다. 정조는 10만 냥의 돈을 들여 백성들이 안심하고 이주할 수 있도록 이주대책을 세웠다. 그리고 매년 아버지 묘를 참배할 때마다 머물 행궁을 건립하였다. 행궁이란 임금이 궁궐 밖으로 행차할 때 임시로 머물던 거처다. 팔달산 아래는 국세..

원주 강원감영

원주 강원감영 길함이 많은 터 조선시대 팔도감영 중 하나인 강원감영은 원주시 일산동 54-2(원일로 85)에 위치한다. 감영은 감사(監司)가 근무하는 영문(營門, 관청)이란 뜻이다. 감사는 종2품으로 관찰사라고도 부르는데 오늘날의 도지사와 같다. 조선은 전국을 경기·충청·전라·경상·강원·황해·함경·평안 8도로 나누고 각 도에 감영을 두었다. 경기도는 서대문 밖, 충청도 충주(선조 때 공주로 옮김), 전라도 전주, 경상도 상주(선조 때 대구로 옮김), 강원도 원주, 황해도 해주, 함경도 함흥(선조 때 영흥으로 옮김), 평안도는 평양에 있었다. 이들 감영의 감사를 ‘팔도감사’라고 해서 출세의 대명사로 여겼다. 원주는 남한강과 섬강을 경계로 경기도와 충청도가 접하고 있으며 강원도 내륙과 강릉으로 가는 길목에 ..

김제 정구례 가옥

김제 정구례 가옥 김제들녘만큼 넉넉했던 만석꾼 쌀뒤주 만석꾼 쌀뒤주로 유명한 정구례가옥(현재는 정종수고택)은 전북 김제시 장화동 210-1(장화2길 150-5) 후장마을에 있다. 삼한시대 저수지인 벽골제에서 불과 2.5km 떨어진 곳이다. 1989년 김제군이 시로 승격되기 이전에는 월촌면 장화리였다. 1998년 교촌동과 월촌면을 병합하면서 관할은 교월동이 되었다. 이곳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김제평야 한 가운데 있는 마을이다. 마을 입구에는 효녀가수 현숙이 기증한 ‘전장·후장’ 마을 표석이 서있다. 현숙은 이 마을에서 태어나 월촌초등학교와 김제여자고등학교를 다녔다. 본래 마을 이름은 꽃잔 또는 화산이었다. 마을 서쪽의 야산 이름은 화초산이다. 이로 보아 꽃잔은 마을 모양이 넓게 퍼진 꽃받침처럼 생긴데서..

군포 정난종 묘

군포 정난종 묘 인재 풍년… 풍수가 발길 끊이지 않는 곳 조선 전기 이조판서와 우참찬(정2품)을 역임한 허백당 정난종(鄭蘭宗, 1433~1489)과 그의 후손들 묘는 경기도 군포시 속달동 산3-1에 있다. 동래정씨(東來鄭氏)는 조선시대에 정승(영의정·좌의정·우의정) 17명, 대제학 2명, 호당 6명, 공신 4명, 판서 20여명, 문과급제자 198명, 무과급제자 484명을 배출하였다. 상신 수로는 왕족인 전주이씨 22명, 외척인 안동김씨 19명에 이어 세 번째다. 이중 13명의 정승이 정난종의 후손에서 나왔다. 이 때문에 풍수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묘역은 신도비·상석·혼유석·향로석·장명등·문인석·동자석 등이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어서 묘제·석조미술·금석문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자주 찾는다...

화성 수원백씨 백천장 묘

화성 수원백씨 백천장 묘 살아있는 脈 꿈틀… 고려시대 문신이자 수원백씨 9세조인 문익공 백천장 선생 묘는 경기도 화성시 태안읍 기안동 산7(기안길 65)에 있다. 당시의 묘지 양식은 남아 있지 않지만 경기도 내 몇 안 되는 고려시대 묘다. 사도세자와 정조의 융건릉에서 직선거리로 2km에 위치한다. 본래 왕릉이 조성되면 반경 10리 이내의 산소는 모두 이장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정조는 백천장의 묘가 있다는 것을 알고 주변에 깃발을 나열하여 꽂고 그 안쪽은 옮기는 것을 제외시켜 주었다. 기안동은 깃발 안쪽이라는 뜻에서 비롯된 지명이다. 백천장은 고려 충렬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학사와 정당문학을 역임하였다. 원나라에 가서 유학하고 금자광록대부 이부상서를 거쳐 우승상에 올랐다. 당시는 원나라가 세계를 ..

익산 미륵사지

익산 미륵사지 용맥 없어 기가 없거나 약한 땅… 길지는 아냐 세계문화유산인 미륵사지는 전북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에 위치한다. 뒤로는 익산·논산·군산 지역에서는 가장 높은 미륵산(429.6m)이 솟아 있다. 앞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만경평야가 펼쳐져 있다. 절은 온데간데없고 석탑만 최근 복원되었다. 국내에서 현존하는 석탑 중 가장 크고 오래되었으며, 미술사적으로는 목탑에서 석탑으로 나아가는 과정의 형태라고 한다. 이곳은 얼핏 배산임수 지형의 명당처럼 보인다. 그러나 풍수에서 가장 중요한 용맥이 없다. 용맥을 따라 기가 전달되는데, 용맥이 없으면 기가 없거나 약한 땅이 된다. 사람도 기가 약하면 오래 살 수 없다. 땅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주변 산세가 좋아도 길지로 보기 어렵다. 미륵사는 백제 제30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