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 한음 이덕형 묘
좌청룡 우백호 못만난 아쉬운 묏자리…
오성과 한음의 일화로 유명한 한음 이덕형(1561~1613)의 묘는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 638-9에 있다.
이곳에 가면 영정을 모신 재실이 있고, 그 뒷산으로 올라가면 두기의 묘가 있다.
위는 지중추부사를 지낸 아버지 이민성과 어머니 문화류씨 합장묘고, 아래는 한음과 부인 한산이씨 합장묘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자 선영이 있는 이곳에 묻혔다.
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 묘에 합장했고, 자신의 묘 자리도 그 아래에 정했다.
한음은 광주이씨(廣州李氏)로 6대조는 우의정을 지낸 이인손, 5대조는 좌의정으로 연산군의 폭정을 바로잡으려고 애쓰다 조카 이세좌와 함께 사사된 이극균, 증조부는 이수총, 조부는 이진경이다.
지금의 서울 남대문과 필동 사이의 성명방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두뇌가 명석하고 글을 잘 하였다.
소년시절 포천 외가에서 자랐는데 외삼촌이 영의정 류전이었다.
이때 어린나이임에도 당대의 문장가인 양사언·양사준·양사기 형제들과 시를 주고받으면서 어울렸다.
토정 이지함은 한음의 관상을 보고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영의정인 조카 이산해에게 사위 삼으라고 권하였다.
이런 인연으로 한음은 17세 때 이산해의 딸인 한산이씨와 결혼한다.
18세에 생원시에 수석, 진사시에는 3등으로 합격하여 이름을 날렸다.
20세에 문과별시에 을과로 급제한다.
이때 25세인 오성 이항복은 알성시에 병과로 급제한다.
둘은 이때부터 친하게 지냈으며 대제학 이이의 눈에 들어 승승장구한다.
한음과 오성은 서로 같은 벼슬을 물려주고 받았다.
나이는 어리지만 한음이 조금씩 앞섰고 그 후임을 오성이 하였다.
한음은 31세 때 대제학이 되었는데 조선시대 최연소 기록이다.
32세 때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두 사람은 선조의 의주 피난과 명나라에 원군을 청하는 등 국난극복에 혼신을 다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와 한음은 38세의 젊은 나이로 우의정에 오르고 이후 좌의정이 된다.
그리고 42세 때인 1602년 영의정에 오른다.
그러나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고, 임해군의 처형과 영창대군의 사사를 반대했다가 삭탈관직 되었다.
그는 영의정이던 45세 때 부친을 모시려고 운길산 수종사 아래 송촌마을에 대아당(大雅堂)이란 별서를 지었다.
이곳 묘역에서 10리 쯤 떨어진 거리다.
용진강(북한강)이 보여 경치도 좋지만 모친과 부인 묘소를 참배하기 쉬워서 터를 잡은 것이다.
벼슬에 물러난 그는 실의에 빠져 대아당에 머물다 5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야사에 의하면 사망한 후에도 눈을 감지 않았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들은 오성이 찾아와 곡을 하고서야 눈을 감았다고 한다.
오성은 한음의 시신을 직접 염습해주었다.
그리고 부인 한산이씨가 먼저 묻힌 이곳에 합장으로 장사지냈다.
그러나 이곳은 풍수지리적으로 그렇게 좋지는 않다.
주산인 청계산(656m)에서 내려온 맥의 끝자락이긴 하지만 생기가 모여 있는 땅은 아니다.
생기가 있으려면 묘 뒤로 이어진 용맥이 구불구불 변화를 해야 한다.
그런데 이곳은 거의 일직선에 가깝다.
일자로 뻗은 산줄기는 사룡이다.
묘역 좌우에 있는 청룡·백호도 제대로 감싸주지 못한다.
청룡과 백호 끝자락이 서로 교차하여야 하는데 그 길이가 짧아 도열하듯 양쪽으로 서있다.
그 사이로 하정천 물은 곧장 빠져나간다.
집이나 묘 앞으로 물이 일직선으로 나가는 것을 견동토우(牽動土牛) 또는 줄여서 견우수(牽牛水)라고 한다.
소가 쟁기를 끌 때 앞으로만 곧장 나가는 것을 빗댄 말이다.
물은 땅의 기를 가두고 멈추게 하는 역할을 한다.
물이 일직선으로 나가면 기도 앞으로 쭉 빠져나가므로 좋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풍수에서는 앞의 들판을 명당이라고 한다.
좋은 명당은 평탄하고 원만해야한다.
그래야 그 안의 기운이 순조롭게 순환되기 때문이다.
명당이 원만하려면 좌청룡과 우백호가 서로 다정하게 끌어안듯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곳은 좌청룡과 우백호가 서로 안아주지 못한다.
그러다보니 명당도 물길 따라 길쭉하게 생겼다.
명당의 물이 외부로 빠져나가는 곳을 수구라고 한다.
수구는 혈에서 대략 백보 정도의 적당한 거리에 있어야 좋다.
너무 가까우면 답답하고 너무 멀면 허하기 때문이다.
이곳의 수구는 너무 멀리 있다. 기가 허한 곳이라는 뜻이다.
수구 밖 멀리 보이는 조산은 북한강 건너편 남양주시 소재 운길산이다.
그 산 자락에 대아당이 있다.
아마도 한음은 죽어서도 자신이 생전에 살았던 대아당을 바라보고 싶었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