斷俗寺址 政堂梅
政堂梅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운리에 있는 매화나무
.
신라시대 창건된 사찰인 단속사지에 있는 매화나무이다.
단속사는 조선시대 화재로 소실되고 현재는 3층석탑 2기와 절터만 남아있다.
정당매는 고려말 이 고장 출신의 통정(通亭) 강희백(姜淮伯 1357~1402)이 심었다고 전해진다.
수령은 약 630년이며 높이는 8m, 둘레는 1.5m이다.
강회백이 벼슬길에 나가 정당문학(政堂文學)이라는 벼슬에 올랐는데 이 벼슬이름을 따서 정당매(政堂梅)라고 부르게 되었다
국내 매화 중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매화는
▲강릉 오죽헌 율곡매(484호, 1주)
▲구례 화엄사 매화(485호, 1주)
▲장성 백양사 고불매(486호, 1주)
▲순천 선암사 선암매(488호, 2주) 등 4곳 5그루가 있지만
정당매는 남사예담촌 하씨고가의 원정매와 함께 우리나라 매화나무로서는 수령이 가장 오랜 古梅이다.
강회백이 고향에 들러 정당매를 보면서 지은 시가 전하고 있다.
遇然還訪古山來 우연환방고산래 (우연히 고향에 돌아와 예전의 산을 찾아보니)
滿院淸香一樹梅 만원청향일수매 (한 그루의 매화나무에 핀 꽃의 향기가 가득하네)
物性也能知舊主 물성야능지구주 (나무도 예전의 주인을 알아보고)
慇懃更向雪中開 은근갱향설중개 (은근히 눈 속에서 나를 반겨주네)
[斷俗寺址 政堂梅] (두산백과)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단속사의 창건 시기에 대해 신라 경덕왕(景德王) 22년 계묘(763년)와 당(唐) 천보(天寶) 7년 무자(748년), 두 개의 설이 실려 있다.
전자는 효성(孝誠) - 경덕왕조(朝)의 인물인 신충(信忠)이, 후자는 경덕왕대의 직장(直長) 이준(李俊)이 단속사를 발원해 창건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신충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경덕왕 16년(758년)부터 22년까지 상대등(上大等)을 지냈다고 했고, 이준은 같은 책에 등장하는 대나마 이순(李純)과 동일인물로 보이는데, 일찍이 나이 쉰에 출가해 절을 짓겠다는 서원을 따라 조연(曺淵)에 있던 작은 절을 크게 중창한 것이 바로 단속사이며, 이준 자신도 공굉장로()라는 이름으로 승려로써 20년을 머물고 입적하였다고 한다.
단속(斷俗)이라는 이름에는 신충의 입산과 관련해 '세속(과의 인연)과 절연한다'는 뜻이 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때의 유명한 화공 솔거(率居)가 그린 유마거사상(維摩居士象)이 단속사에 있었다고 적고 있다.
당에서 북종선을 배우고 돌아온 선사 신행이 혜공왕(惠恭王) 15년(779년)에 이곳 단속사에서 입적하였으며, 헌덕왕(憲德王) 5년 계사(813년)에 당시의 병부령 김헌정이 비문을 지은 신행의 비석이 세워졌다(비석 자체는 후에 유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단속사가 위치한 골짜기 입구에는 골 입구에 최치원(崔致遠)이 쓴 '광제암문(廣濟嵒門)' 네 글자를 새긴 돌과 함께 최치원의 독서당(讀書堂)이 있었는데, 그 독서당은 훗날 고려 시대의 고승 대감국사(大鑑國師) 탄연(坦然)의 영당(影堂)으로 쓰이게 되었다고 한다.
《대감국사비》는 고려의 평장사 이지무(李之茂)가 비문을 짓고 탄연 자신이 글씨를 쓴 비석이었다.
이 밖에 한림학사 김은주(金殷舟)가 지은 진정대사(眞定大師)의 비문도 있었다.
이규보가 지은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惠諶)의 비문에는 혜심이 고종(高宗) 7년(1220년)에 단속사에 주지로 머물렀던 적이 있음을 전하고 있다.
조선 초기인 세종(世宗) 6년(1412년) 당시 단속사는 원속전 1백 결에 주석하는 승려가 1백 명 정도로 유지되었다.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강회백(姜淮伯, 1357년 ~ 1402년)이 과거에 급제하기 전에 단속사에서 글을 읽으면서 심었던 매화가 경내에 남아 있었고, 사람들은 강회백이 지낸 벼슬인 정당문학의 이름을 따서 정당매(政堂梅)라 불렀는데, 매화나무가 말라 죽으면 그 후손들이 그 자리에 다른 매화를 이어 심었다고 하며,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알려진 추강 남효온(南孝溫)부터 김종직의 문인이었던 탁영 김일손(金馹孫), 지리산에 자주 올랐던 조선 중기의 문인 조식(曺植)이 정당매를 보고 지은 시가 남아 전한다.
단속사는 조선 후기에 폐사되었다.
현재 절터에는 당간지주와 3층 석탑이 원위치에 있으며, 주변에는 금당지를 비롯하여 강당지 등의 초석이 그대로 남아 있어 신라 시대의 가람배치를 짐작할 수 있다.
동·서 3층석탑은 전형적인 신라석탑으로 비례미와 균형미가 잘 조화되어 안정감이 있고, 또한 치석의 수법이 정연하여 우아하다. 삼국 통일 이후에는 이같은 쌍탑 가람형식이 경주를 떠나 지방의 깊은 산골에까지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밖에도 절터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와당을 비롯한 석물들이 출토되고 있으며, 주변 민가의 담장이나 집안에 많은 석물들이 흩어져 있다.
단속사터에서 수습된 대감국사비의 파편은 이후 동국대학교 박물관과 숙명여자대학교 박물관에서 각각 소장하고 있다.
(워키백과)
산청 단속사지 동 서 삼층석탑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운리 단속사지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쌍탑 (동탑. 서탑)
단속사지 동서삼층석탑은 각각 보물 제 72호, 73호로 지정되어 있다
쌍탑 가운데 동탑은 서탑보다 상태가 양호하고 이중기단에 삼층의 탑신을 지닌 전형적인 신라 석탑이다.
상륜의 일부가 결실된 것을 제외하면 보존상태도 양호하며 옥개석의 체감과 비례가 알맞아 단아한 양식의 석탑으로 평가된다.
탑이 위치한 단속사는 경덕왕 7년(748)에 대나마 이순(李純)이 창건했다는 설과 경덕왕 22년(763) 신충(信忠)이 창건했다는 2가지 설이 전한다.
신행(神行)의 제자인 삼륜이 헌덕왕 5년(813) 헌덕왕비의 적극적 후원을 받아 크게 성장하였는데, 석탑은 이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조선 초 유생들에 의해 가람의 일부가 훼손되고 불상과 경판이 파괴되기도 하였으나, 명맥을 유지하다가 정유재란 때 전소된 것으로 전한다.
지금도 최치원이 쓴 것으로 전하는 ‘광제암문(廣濟嵒門)’의 명문이 남아 있다.
김헌정(金獻貞)이 지은 신행선사비(神行禪師碑), 고려 평장사 이지무(李之茂)가 지은 대감국사비(大鑑國師碑), 한림학사 김은주(金殷舟)가 지은 진정대사비(眞定大師碑)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1999년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에서 사지 일부를 발굴하여 일부 건물지 확인과 여러 유물을 수습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동탑을 기준으로 설명하면
기단은 상하층 이중으로 구성되었는데, 기단의 외곽을 장대석과 자연석을 두르고 내부를 토단으로 다져 넣었다.
하층 기단은 지대석과 면석을 1매로 하고, 4개의 면석으로 결구되었다.
하층 갑석은 총 6매로 상단 중앙에 낮게 2단의 호각형 받침을 새겨 상층기단 면석을 받치고 있다.
상층 기단 면석은 4매의 판석을 이용하여 엇물림 결구하고 중앙에 1주의 탱주를 모각하였다.
상대갑석은 동서로 이음이 있는 2매로 구성하였는데 하단에는 1단의 갑석 부연을 두었고 상단에는 2단의 각형 괴임을 두어 초층 탑신을 받치고 있다.
상하층 갑석은 거의 기울기를 두지 않아 다소 직선적인 느낌을 준다.
탑신부는 삼층 모두 탑신석과 옥개석이 각각 1매로 되어 있는데, 탑신석은 모두 네 모서리에 우주를 두었고 면석 표면에는 문비 등의 장식을 새기지 않았다.
옥개석은 3층 모두 5단의 옥개받침을 두었으며 상단에는 1단의 괴임을 두어 위층 탑신을 받치고 있다.
옥개석의 처마는 모서리에서 경쾌한 반전을 두었으며 모서리 전각부 양쪽에 각각 1개씩의 풍경공이 남아 있다.
상륜은 노반, 복발, 앙화가 남아 있는데, 노반은 정방형 직육면체로 상단에 2단의 띠돌림이 있다.
복발은 편구형으로 사방에 꽃장식을 두고 띠매듭을 둘렀고 앙화는 3단의 받침 위에 8엽형의 꽃을 양각해 놓아 화려함을 보여준다.
전형적인 신라석탑의 양식을 따르면서 세부적으로는 변용이 엿보인다.
먼저 탑 외곽을 두른 토단은 7∼8세기 석탑에서 나타나는 탑구와는 달리 지대석과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있다.
이 토단은 탑구라기보다는 탑의 공간과 외부공간을 구획하려는 의도로 9세기 신라 석탑에 유행하였다.
하층 기단은 8세기 석탑 양식을 보이고 상층기단은 9세기 석탑 양식을 보여 8세기와 9세기 석탑의 변화상을 보여주는 과도기적 석탑으로 인식할 수 있다.
또한 상하층 기단 갑석의 기울기가 급하게 나타나는 9세기 석탑에 비해 거의 기울기를 표현하지 않았다.
한편 동탑은 서탑과 크기나 양식에 있어 유사하나 각 층 옥개석 상단의 괴임이 1단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옥개석 상단 받침 1단은 옥개받침 5단의 신라 석탑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고 이 탑의 가장 큰 특징으로 지목된다.
단속사지 동서삼층석탑은 기본적으로는 전형적인 신라 석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8세기에서 9세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양식들을 잘 보여주는 석탑이다.
또한 선종가람의 성립과 유행에서 확산된 9세기 신라 석탑의 선두적 양식이라는 점에서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는 탑으로 평가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강회백(姜淮伯, 1357∼1402)
고려말과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백보(伯父), 호는 통정(通亭).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시(蓍)의 아들이다.
1376년(우왕 2) 문과에 급제, 성균좨주가 되었으며, 밀직사의 제학·부사·첨서사사(簽書司事)를 역임하였다.
1385년에는 밀직부사로서 사신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388년 창왕이 즉위하자 밀직사로 부사 이방우(李芳雨)와 함께 명나라에 다녀왔다.
뒤에 창왕을 폐할 때 지밀직(知密直) 윤사덕(尹師德)과 함께 부고(府庫)를 봉한 공이 있어, 1389년 공양왕이 즉위하자 추충협보공신(推忠協輔功臣)의 호를 받았다.
이 해에 조준(趙浚) 등과 함께 세자사부에 임명되었으나 나이 어린 것을 이유로 사퇴하였다.
이어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에 이조판서를 겸임하였다.
이 때 상소하여 불교의 폐해를 논하고 한양천도를 중지하게 하였으며, 이어 교주·강릉도도관찰출척사(交州江陵道都觀察黜陟使)로 나갔다.
돌아와 정당문학 겸 사헌부대사헌(政堂文學兼司憲府大司憲)이 되었다.
이때 정몽주(鄭夢周)의 사주를 받은 간관 김진양(金震陽) 등이 조준·정도전(鄭道傳) 등을 탄핵할 때 이에 동조, 대관을 거느리고 상소하였다.
1392년 정몽주가 살해당하자 처음에는 동생인 회계(淮季)가 공양왕의 사위였기 때문에 탄핵을 면하였으나, 곧 진양(晉陽)에 유배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뒤 1398년(태조 7) 동북면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가 되었다.
저서로는 《통정집》이 있다.
사진첩
도로에서 단속사로 들어가는 입구
남명(南冥) 조식(曺植)선생 시비(詩碑)
단속사지 들어가는 입구의 길 오른쪽에 남명 조식선생의 시비(詩碑)가 있다.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이고 영남학파의 거두인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선생은, 합천군 삼가면 토동 출신으로 영남의 대표적인 유학자로서 명종과 선조로부터 중앙과 지방의 여러 관직을 제안 받았으나 한 번도 벼슬에 나가지 않고 평생 제자를 기르는 데 힘썼다고 한다.
비석에 적혀있는 시는 남명 선생이 단속사에 머물 때, 단속사를 방문한 사명대사에게 지어준 시(詩)라고 한다.
증 산인유정(贈 山人惟政) - 단속사에 들린 사명당(유정대사)에게 준다.
화락조연석(花落槽淵石) 꽃은 조연의 돌에 떨어지고
춘심고사대(春深古寺臺) 옛 단속사 축대엔 봄이 깊었구나
별시동기취(別時動記取) 이별하던 때 잘 기억해 두게나
청자정당매(靑子政堂梅) 정당매 푸른 열매 맺었을 때
※ 조연(槽淵)-단속사 앞에 있었던 작은 연못
단속사지 쌍탑(왼쪽 서탑, 오른쪽 동탑)
뒤쪽 마을안에 정당매가 있다
보물 제73호로 지정된 서 삼층석탑, 파손의 정도가 심한 편이다.
보물 제72호로 지정된 동 삼층석탑
단속사지 주위의 매화
분홍매와 백매
정당매각과 정당매
정당매
정당매각(政堂梅閣)
정당매 옆에는 정당매각(政堂梅閣)이 있다.
증손되는 강용휴(姜用休)가 정당매를 가꾸고 후손들이 그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비각을 짓고 비를 세워 오늘에 전하여 오고 있다.
매각(梅閣)은 1915년에 매비의 걸립과 함께 건립된것이다.
매각에는 "정당매각"이라는 현판,매각 안에는 매각을 세운 연유를 기록한 "정당매각기"가 있다.
비문에는 매각을 세운 연유와 통정공의 매화원운(梅花原韻)의 시와 후손들의 시들이 걸려있다.
비 : 좌측 '통정강선생수식정당매비'와 우측 '정당문학통정강선생수식매비'
비문 글씨는 하용제(河龍濟)가 썼다고 되어 있는데 약헌(約軒) 하용제(河龍濟,1854~1919)는 산청(단성면) 남사마을 출신인 약헌은 무과 급제 후 벼슬을 하기도 했으나 면우 곽종석의 가르침을 받으며 유학에 천착한 인물로, 1919년 유림의 독립운동인 파리장서운동에 동참했다가 투옥된 뒤 고문의 여독으로 사망했다.
가까운 곳의 덕천서원에도 그의 글씨가 향기로 남아 있다 .
주위의 매화림
봄동
마을
광대나물
백목련
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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