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巨樹 保護樹 記念物/梅花

남사예담촌 四梅 (하씨고가 원정매, 최씨매, 이씨매, 정씨매)

초암 정만순 2019. 3. 20. 23:30




남사예담촌 四梅

 (하씨고가 원정매, 최씨매, 이씨매, 정씨매)



소재지 : 경남 산청군 단성면 남사리 281-1





남사예담촌

지리산 끝자락에 위치한 산청군 단성면 남사리 남사예담촌.
남사마을의 별칭인 남사예담촌은 아름다운 토담과 돌담을 간직한 마을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담장 너머로 옛 선비들의 기상과 예절을 배우자라는 취지에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즉, 우리의 옛 모습들을 통해 잠시나마 갈수록 피폐하고, 각박한 현실에서 벗어나 여유와 배려 등 선비의 마음을 가져 보게 하는 것이 더 큰 목적이라고 한다.
항간에서는 기와집이 많다고 남사 기와마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지리산 천왕봉 줄기인 웅석봉에서 발원된 물줄기(남사천·사수)와 뒤쪽은 명산이 감싸 안고 있는 형국이다.
마을 뒷산은 공자가 태어난 중국 산둥성 취푸의 산에서 이름을 딴 니구산(尼丘山)이고, 마을 주위로는 사수(泗水·남사천)가 흐르고 있다.
이를 풍수지리적으로 해석해 보면 남사예담촌은 좌청룡 우백호를 거느리고 있으며, 남사천이 마을을 휘돌며 안고 있는 천혜의 명당이다.
쌍룡이 서로 맞물려 원을 그린다는 쌍용교구의 명당자리라고 한다.
그래서 남사예담촌에서는 많은 인재가 나고, 배출됐다.
이같은 자연 환경 탓인지 남사예담촌은 예로부터 학문을 숭상한 선비들이 고고함을 지키며 대대로 살아온 유서 깊은 마을로 자리잡았다.
고려시대에는 마을 윤씨 가문에서 왕비가 나왔고, 고려 말 정당문학(국가행정을 총괄하던 관직)을 지낸 통정 강희백을 비롯하여 조선 세종 때 영의정에 오른 경재 하연도 이 마을에서 태어났다.

남사예담촌을 들어서면 일반적인 전통마을과는 좀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고즈넉한 황토 돌담이 이어지며, 담 너머로 웅장하지는 않지만 아늑한 기와 고가들이 고목들과 함께 고풍스러움을 품어내고 있다.
바로 옆에는 현재의 농가들이 함께 어울려 있어 지금의 농가의 풍경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전통과 현대를 같이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담쟁이넝쿨과 조화를 이룬 높은 돌담, 서원, 정자, 전통한옥의 고가, 그리고 앞 마당에 굳건히 서 있는 고목들, 마치 사극드라마 세트 속으로 들어온 착각에 빠져든다.
돌담은 복원된 형태이나, 고가들은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18~20세기 초에 지어진 40여 채의 기와집들이 황토담 길을 따라 미로처럼 이어진다.
돌담 길이는 약 3200m에 이르며, 돌담 사이를 걷다 보면 어느새 마음의 여유를 찾은 듯 느긋하다.
또 30도를 넘는 무더위에도 전통가옥 처마와 고목들이 만들어 내는 그늘은 우리의 몸을 시원하게 해줄 뿐 아니라 마음까지 청량하게 한다.
남사예담촌은 선조들의 건축양식 지혜와 정서와 삶, 무엇보다도 양반들의 유유자적·절개·고고함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특히 남사예담촌에는 집집마다 오래된 매화나무 한두 그루씩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 중에서도 하씨, 정씨, 최씨, 이씨, 박씨 등 마을의 다섯 문중을 대표하는 다섯 그루의 매화나무 ‘오매불망(五梅不忘)’은 기품이 높아 함부로 범접 못할 선비의 품성을 닮아 있다.
이처럼 마을 역사가 오래됐듯이 남사예담촌에는 문화재가 많다.
등록문화재 제281호(2006년 12월4일 지정)인 남사옛마을담장을 비롯해 도 문화재자료 제117호(1985년1월23일) 남사리 최씨고가, 문화재자료 제118호(1985년1월23일) 남사리 이씨 고가, 보물 제1294호(1999년6월19일·진주박물관 소장) 이제개국공신교서, 문화재자료 제196호(1993년1월8일) 면우곽종석유적, 문화재자료 제328호(2003년4월17일) 이사재, 문화재자료 제453호(2009년1월15일 지정) 남사리 사양정사, 문화재자료 제403호(2006년 7월 20일 지정) 사월리 장수황씨 묘비 및 문인석, 문화재자료 제51호(1983년8월6일 지정) 배산서원 등이 있다.
그 외에 마을의 상징수인 수령 약 300년 된 회화나무와 600년 된 감나무, 700년 된 매화나무 등의 고목들이 남사예담촌을 지리산 명가마을임을 입증하고 있다.

◇최씨고가(도 문화재자료 제117호)=
남사마을 중앙에 자리잡은 가장 큰 집으로 안채와 외양간채, 사랑채가 안채를 중심으로 ㅁ자형 평면을 갖추고 있으며 1930년대 지은 집이다.
남녀 사용공간을 나누어 공간의 독립성을 부여한 뛰어난 배치로 사대부가의 유교적 전통을 엿볼 수 있는 집이다.

◇이씨고가(도 문화재자료 제118호)=
남사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집으로 1700년대 건축이다.
남북으로 긴 대지에 안채와 사랑채, 외양간채와 곳간채가 안채를 중심으로 ㅁ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시각적으로 막혀있는 특이한 배치를 보이고 있고, 일반 사대부 주택 안채에 있는 부엌 위치가 사당 방향과 반대인 점과 달리 이 집은 같은 방향으로 놓여 있는 점이 특이하다.

◇면우 곽종석 유적(문화재자료 제196호)=
▲이동서당:면우 곽종석 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유림과 제자들이 1920년 설립한 서당이다.
이곳에서 태어난 곽종석(1846∼1919) 선생은 유학자이며 독립의사로 많은 후진을 양성하였다.
1919년에는 파리평화회의에 보낼 파리장서를 작성하여 보내는 과정에서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투옥되었다.
▲유림독립기념관:일제 강점기 파리장서 사건 등 유림들의 독립운동을 기리는 위해 2013년 10월 8일 건립된 기념관. 면우 곽종석 선생의 출생지 주변 2900여㎡ 터에 연면적 397㎡규모의 전통한옥양식으로 지어졌다.
유림독립기념관은 전시실과 영상실, 수장고 및 사무실 등을 갖췄다.
전시실에는 파리장서 사건 당시 유림 대표를 맡았던 면우 곽종석, 김복한 선생과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던 심산 김창숙 등 파리장서에 서명한 유림 137명의 독립운동 활동사항과 독립 이후 훈·포장 내용 등이 기록돼 있다.

◇이사재(문화재자료 제328호)=
대사헌·호조참판 등을 지낸 송월당(松月堂) 박호원의 재실이다.
상량문에 세정사팔월(歲丁巳八月)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1857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형적인조선 후기의 건축 양식이다.
백의종군 길에 나선 충무공 이순신은 1597년 6월 1일 해질녘에 남사예담촌에 도착해 유숙한 장소로도 유명하다.

◇사양정사(문화재자료 제453호)=
구한말의 유학자 정제용의 아들 정덕영과 장손 정정화가 남사로 이전한 선친을 추모하기 위해 마련한 정사로 1920년대에 지어졌다.
사양정사란 남쪽의 학문을 연마하는 집이라는 뜻으로 남사마을 뒤에 있는 개울을 사수라 부르고 정사가 개울의 남쪽에 있어 사양정사라 이름했다.

◇하씨고가=
고려 말의 문신 원정공 하즙이 거주한 고가.
원정공이 심었다는 매화나무 ‘원정매’와 조선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하연이 7세 때 심었다는 600여 년 된 감나무가 심어져 있다. 또 원정공이 살던 옛집이라는 의미로 대원군이 직접 쓴 ‘원정구려(元正舊廬)’ 당호가 걸려 있다.

◇기산국악전수관=
산청에서 태어난 국악계 태두 기산 박헌봉(1907∼1977) 선생을 기린 국악전수관. 기산 선생은 일제시기부터 민족음악을 되찾는 민족 문화 운동에 주력했으며, 해방 이후에도 우리나라 최초로 국악예술학교와 국악관현악단을 각각 창립한 교육가인 동시에 국악운동가이다.
기념관에는 전시실을 비롯해 기산 선생 흉상 등이 있다
.◇기타=
이 씨 문중 소유로 월포공이 과거에 급제했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후학을 가르친 ‘초포정사(草浦精舍)’, 아버지를 해치려는 화적의 칼을 몸으로 막아낸 영모당 이윤현의 효심을 기리는 ‘사효재(思孝齋)’ 등이 있다.

출처 : 경남일보(http://www.gnnews.co.kr)



원정매


산청군 단성면 남사마을은 500여년전에 형성된 마을로 조선조의 전통적인 고택이 많으며 이 마을에는 매화의 고목이 많기로 유명하다.

하씨(河氏)의 원정매(元正梅:汾陽梅라고도 함), 최씨매, 이씨매, 정씨매가 있으며 고택 마다 고매 한 두 그루가 매향을 풍기고 있다.

이 마을의 고택 중 하나로 진앙 하씨가 32대 살아온 '분양고가(汾陽古家)'가 있다.

이 집은 원정공 하집(1303~1380) 선생이 살았던 집이다.

그는 21세 때인 1324년에 급제하여 경주부윤, 문화찬성을 거쳐 진천부원군에 이르렀다.

이 집은 동학란 때 소실되어 그의 31대손인 하철이 새로 집을 짓고 '汾陽古家'라는 액자를 걸어 엤 명문가의 흔적을 나타내고 있다.

이 집 사랑방 앞에 하집이 심은 고매 한 그루가 6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윽한 매향을 이어오고 있다. 

이 매화 앞에는 매화시비가 있어 원정공의 매화 사랑을 였볼 수 있다.

 

'원정공 매화시'

집 양지바른 곳에 일찍 심은 한 그루 매화

찬 겨울 꽃망울 나를 위해 열었네

밝은 창에 글 읽으며 향 피우고 앉았으니

한점 티끌도 오는 것이 없어라.

 

이 집 뒤 뜰에는 조선조 세종때 영의정을 지낸 하연이 손수 심었다는 580년된 감나무도 있다.

진양 하씨 대동보에 의하면 1377년 이후에 원정공은 몇간의 집을 짓고 '송헌'이라 이름하엿으며, "일찍이 매화 한 그루를 심었다"라고 적혀 있으며 그의 손자가 심은 감나무가 580년이 되었음을 볼 때에 매화는 수령이 610년이 넘었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 고매의 옛등걸은 세월을 견디지 못하여 고사하고 옆에 새로운 싹이 나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사진첩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53호 산청 남사리 사양정사,

 

'사양정사(泗陽精舍)'란 '泗水(사수)' 남쪽의 학문을 연마하는 집이란 뜻이다.

'사수'란 공자의 고향인 중국 산동성 곡부에 있는 강 이름인데, 공자를 흠모하여 남사마을 뒤를 흐르는 개울을 '사수'로 불렀다.



1920년대에 건립된 정사이다. 

한말의 유학자인 정제용(1865~1907)을 기리기 위해 그의 아들 정덕영()과 장손 정정화()가 만들었다.

건립 후 정덕영이 자식들을 교육하거나 손님들을 맞이하는 장소로 이용하였다.

면적은 약 1,400㎡이다.

본채와 대문채로 이루어져 있다.

본채는 앞면 7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 집이며 왼쪽부터 누마루, 방 2개, 대청 2칸, 누마루가 배치되어 있다.

지붕은 홑처마에 천장이 높고 부재가 튼실하다.

다락이나 벽장 등의 수납공간이 풍부하며 유리를 사용한 부분이 있어 근대한옥의 변화상을 볼 수 있다.

대문채는 7칸 규모이며 그 중 4칸이 광으로 이용되고 솟을대문이 달려 있다.

근대에 들어 한옥의 변화양식을 연구하는 데에 중요한 자료이다. 

2009년 1월 15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53호로 지정되었다.


 


△ 계재 정제용 초상화, <사진; http://blog.naver.com/il0202/220918908868>



정제용(鎔, 1865~1907)의 본관은 영일, 호는 계재().

고려의 충신 포은 정몽주의 후손으로 후산() 허유에게 학문을 익혔고, 허유의 사후에는 면우() 곽종석에게 배웠다. 정제용은 일생을 선비로 살았으며, 옛 선현들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른 성정이 올곧은 인물이었다.

경상 대학교 소장 계재 정제용 초상화(慶尙大學校 所藏 溪齋 鄭濟鎔 肖像畵)는 화가 채용신(臣, 1850~1941)이 50대

초반에 그린 초상으로 2013년 1월 3일 경상남도 유형 문화재 제532호로 지정되었다.

<출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건물의 중앙에 걸려 있는 커다란 '泗陽精舍(사양정사)' 편액은 성당(惺堂) 김돈희(金敦熙, 1871~1937)의 글씨다. 






사양정사의  대청에 걸려 있는 편액들 


韋堂書室(위당서실), 

계재 정제용의 아들인 위당(韋堂) 정덕영(鄭德永, 1885~1956)을 기리는 당호이다.


尊道齋(존도재), 사양정사의 옛 이름이라고 한다.

'尊道'란 '德性而問學(존덕성이도문학, 덕성을 높이고 학문을 하는 것),

중용 제27장'에서 따온 두 글자로 소전(素筌) 손재형의 아우인  긍전(肯筌) 손재복이 썼다


花山書寶(화산서보)








선명당 단풍나무







오천고가 현판


정씨고가 선명당


선명당



정씨매

정씨매는 남사예담촌 사매 중 가장 늧게 피는 매화로 알려져 있다 






백목련

















분홍동백




















최씨 고가' 입구 골목과 대문,





최씨고가 월광고택

산청 남사리 최씨 고가」는 마을 중앙에 자리잡은 가장 큰 집으로 안채와 외양간채, 사랑채가 'ㅁ'자형 평면을 갖추고 있으며

1930년대 지은 집으로 남녀 사용공간에 독립성을 부여한 배치로 사대부가의 유교적 전통을 엿볼 수 있다.

현재는 살림을 하고 있는 안채는 관람할 수 없고 사랑채 영역만 관람객에게 공개하고 있다.

안채는 앞면 6칸·옆면 3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뒤쪽 툇마루의 폭이 커서 각 방 뒤편으로 물품을 보관하기 위한 벽장을 두었다. 부엌과 건넌방 뒤에는 따로 방을 만들었다.

동향한 아래채는 앞면 4칸·옆면 2칸으로 지붕은 앞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지붕으로 꾸몄다.

남쪽에 개방된 대청이 있고 이어 온돌방을 두었다.

광채는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이며 서쪽을 향하여 서 있다.

사랑채는 앞면 5칸·옆면 2칸 반 규모인데 앞뒤로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사랑채 좌우에 안마당으로 통하는 중문을 2곳에 만들었는데 동쪽 중문을 통과하면 안채가 한 눈에 보이고, 서쪽 중문은 외양간채와 안채가 직접 눈에 띄지 않도록 안으로 담을 둘러 놓았다.

남녀 사용공간을 나누어 공간의 독립성을 부여한 뛰어난 배치로 사대부가의 유교적 전통을 엿볼 수 있는 집이다.

<출처; 문화재청>
























남호정사













 이씨 고가' 진입로

좁은 고샅에 'X'자형으로 서있는 두 그루의 회화나무는 이 마을 최고의 사진촬영 포인트 중 한곳이다.











경남 문화재자료 제118호 '산청 남사리 이씨 고가' 안채 <사진; 문화재청>


산청 남사리 이씨 고가

남사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집으로 1700년대 건축. 남북으로 긴 대지에 안채와 사랑채, 외양간채와 곳간채가 안채를 중심으로 ㅁ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집터의 서남방에 자리잡은 대문간을 들어서면 바로 사랑마당이고, 이 마당 북쪽으로 앞면 4칸·옆면 2칸 반의 크기를 가진 사랑채가 동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사랑채 지붕은 옆에서 보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사랑채 남쪽에 자리잡은 외양간채는 앞면 3칸·옆면 1칸 규모로 외양간과 광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사랑채 동쪽에는 앞면 3칸·옆면 1칸 크기의 중문간채가 자리잡고 있는데, 중문과 광이 있고 출입문은 안마당 쪽으로 터 놓았다.

중문을 들어서서 보이는 안채는 앞면 7칸·옆면 2칸 반 크기로 동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건넌방 1칸·대청 2칸·안방 2칸을 두고 방과 대청 앞면에 1칸 폭의 툇마루를 두었는데 뒷면에는 작은 벽장을 달았다.

대청 뒷벽으로 개방된 툇마루를 단 것이 특색있다.

아래채는 앞면 4칸·옆면 1칸 반 크기로 동향하였는데, 남측단에 부엌과 방·대청 등을 배치하고 앞면에는 개방된 툇마루를 만들었다.

서향한 광채는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로 안쪽은 칸을 나누지 않았다.

시각적으로 막혀있는 특이한 배치를 보이고 있고, 일반 사대부 주택 안채에 있는 부엌 위치가 사당 방향과 반대인 점과 달리 이 집은 같은 방향으로 놓여 있는 점이 특이하다.


<출처; 문화재청>









이씨고가 회화나무




부부나무가 보인다



남사예담촌 전망대




여기서 남사예담촌 전경을 조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