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ㅣ동서의학연구가
5년 전 33살의 주부가 내원했다. 망진(望診)과 문진(問診)한 결과 영양 상태는 비교적 좋았다. 하지만 영양 상태가 좋은 것과는 달리 안색이 매우 창백했다. 부인은 3개월 전부터 머리가 짓누르는 것처럼 무겁고, 동계(動悸)가 일어나며, 빈혈이 있다고 했다. 또 왼쪽 하복부에 통증과 함께 소변을 볼 때 불쾌감이 있다고 했다. 잔뇨감(殘尿感)과 함께 간혹 몸이 오슬오슬하면서 소름이 돋아 피모(皮毛)가 일어서기도 한다고 했다. 아울러 입이 마르고, 구기(嘔氣)가 있으며, 식욕이 전혀 없다고 했다. 그밖에 손과 발이 나른하고, 어깨가 쑤시면서 거북하다고 호소했다. 특히 교통수단을 타고 움직일 때마다 멀미가 심하고, 부부관계를 할 때도 불쾌감과 고통을 동반한다고 털어놓았다. 필자는 정확한 병인(病因)을 찾기 위해 촉진(觸診)과 복진(腹診)을 반복한 결과 소파수술(搔爬手術)을 다섯 차례나 했고, 수년 전 난관(卵管)을 결찰(結紮)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맥(脈)과 복부는 매우 연약(軟弱)했다. 아울러 좌측 하복부에 약간의 저항과 압통이 확인됐다. 필자는 혈(血)의 도증(道症), 즉 자궁에 어혈이 울체(鬱滯)되면서 발생하는 제반 질환이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가미소요산(加味逍遙散)’ 10첩을 처방했다. 부인은 10첩을 복용한 뒤 식욕이 좋아지면서 원기가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달간 꾸준히 복용하고 완치됐다. 필자는 이 여성을 치료하면서 소위 갱년기(更年期) 증상에 ‘가 미소요산’을 쓰면 치료 효과가 높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특히 자궁 어혈로 인해 발생하는 대부분의 생식기 질환과 유산을 되풀이하는 경우, 난관을 결찰한 후에 일어나는 증상에 치료 효과가 높다는 사실을 직접 확인했다.
또 다른 치료 예는 일본 도쿄에 거주하면서 대사관 일로 한국에 자주 온다는 44살의 일본 부인이다. 정확한 병인(病因)을 파악하기 위해 문진한 결과, 부인은 빈혈과 함께 수개월 전부터 월경이 끊기고, 각종 불쾌한 증상이 반복된다고 했다. 아울러 두통과 현기증, 차멀미 증상이 있다고 했다. 특히 식은땀이 나면서 작은 일에도 쉽게 흥분하는 등 수시로 기분이 바뀌는 증상이 있다고 호소했다. 다시 복진한 결과 맥이 보통으로 뛰었고, 복부 가운데 아래쪽이 약간 엷었다. 또 긴장하고 흉협고민(胸脇苦悶)이 있는 듯 보였지만, 실만(實滿)은 아닌 것으로 판단되었다. 필자는 환자의 상태를 종합한 결과 월경부조(月經不調), 두목혼수(頭目昏睡), 간적유(肝積有) 상태가 심각한 것으로 결론지었다. 이 부인에게도 역시 ‘가미소요산’ 10첩을 지어 복용하도록 했다. 10일간 복용한 후 부인이 다시 찾아와서 두통현훈(頭痛眩暈) 등 불쾌한 증상이 모두 사라졌다며 고마워했다. 그래서 남아 있는 이상을 완전히 없애기 위해 ‘가미소요산’을 한 달분 더 처방해 줬다. 부인은 40일 동안 ‘가미소요산’을 복용하고서 월경주기가 정상을 되찾는 등 제반 증상이 대부분 완치됐다. 이상 필자가 처방한 ‘가미소요산’은 『화제국방(和劑局方)』 <부인제질문(婦人諸疾問)>에 나오는 ‘소요산’에 목단피와 산치자(山梔子)를 가미한 것이다. 이 처방은 부인의 자궁과 관련된 질환, 즉 자궁에 어혈(瘀血)이 울체되면서 자율신경증(自律神經症) 등에 문제가 있는 경우에 많이 응용된다. 필자도 지금까지 이 처방을 80여 차례나 처방해 대부분 만족할 만한 치료 효과를 보았다. 옛 의서(醫書)를 보면 ‘가미소요산’은 여러 질환 치료에 응용됐다. 예컨대 어혈을 주로 치료하면서 신체 상부의 혈증(血症)에 문제가 있는 경우에 썼다. 또 간기(肝氣)의 항진(亢進)을 돕고, 자율신경(自律神經)의 실조(失調)를 조화롭게 하는 데 썼다. 따라서 두통면열견배강(頭痛面熱肩背强) 등에 쓰면 좋다. 청열(淸熱) 작용도 뛰어나므로 비출혈(鼻出血)에 쓰면 이내 그친다. 또 하부의 습열(濕熱)을 없애거나, 부인의 임질(淋疾) 등에도 좋은 효과가 있다. 아울러 전신에 생기는 피부병인 개선(疥癬)으로 극심한 가려움에 시달릴 때 쓰면 신묘한 효과를 본다. 이 같은 방법을 써도 증상이 낫지 않을 경우에는 ‘사물탕(四物湯)’과 함께 투여하면 빠른 시일 안에 효과를 볼 수 있다. 수장각화증(手掌角化症)에는 ‘소요산’에 지골피(地骨皮)와 형개(荊芥)를 가미하면 증상이 더욱 빨리 낫는다. 그밖에 실열(實熱)로 인한 변비에도 ‘가미소요산’을 쓰면 변비가 감쪽같이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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