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산 자락길 - 임휴사 한바리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
이 말은 인간은 죽지 않는 한 걸어야 제 구실은 할 수있고 걷는 자만이 건강하다는 말로도 읽혀진다.
이 땡볕더위에 대처허는 방법은 두가지이다.
하나는 시원하게 에어컨이나 선풍기 틀어놓고 얼음에 잰 수박을 먹으며 노닥거리는 것이요
또 다른 하나는 땡볕 속으로 과감히 나아가 땀을 뻘뻘 흘리며 걷는 것이다.
그런데 전자를 택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오늘 유감스럽게도 내겐 에어컨이 없다.
선풍기를 틀어 놓으니 덥고 건조한 바람이 훅훅 밀려오니 오히려 안 켜니만 못하다.
그렇다 이제 내게 남은 선택은 단하나 밖으로 나가는 길이다.
안에서 떠 죽느니 차라리밖에서 타 죽을지라도 일단 땀흘리고 걸을일이다.
젊은 시절 나는 다리에 날개단 듯 앞산을 누비고 다니던 때가 있었다.
그래서 얼른 생각해낸 보행 코스로 임휴사를 떠올리고 간편히 행장을 꾸려 집을 나섯다
교통 수단은 물론 대중교통이다.
지하철과 버스를 이용하여 목적지에 도달하는 재미는 자가용을 몰고 네비게이션을 보며 편리와 안락함을 추구하는
모습과 달리 약간의 불편함과 환승의 지루함은 있어도 참으로 여행의 묘미를 맛보게 해주는 영약이다.
도시철도2호선 대구은행역에서 승차, 임휴사에 가까운 상인역에서 하차 5번 출구 나옴~~
조금걸어 653번버스로 환승한 후 상인비들기아파트 2단지에 하차 ~~
상인보도육교 3호기 - 멋지게 만들었네~~ 상인 - 범물 간 도로가 새로 생긴 덕분인듯 ~~
푸른색 차광이 참으로 멋깔스럽네 좋다~~
시원스래 뚫린 상인 - 범물 간 신도로~~ 씽씽 달려라이~~
상인비들기아파트 2단지 모퉁이르 돌아서면 임휴사가는 안내판이 자랑스레 서있다~~
임휴사 올라가는길 - 더위 때문인지 사람 기척이 없네 허참 나원~~
임휴사 진입 숲길 입구의 앞산자락길 안내판이 나를 반기네~~
이 지점이 달비골 입구 입니다요~~ 친절도 하셔라~~
이정표는 말없이 자기 할 일을 다 하는듯~~
임휴사는 신라 경명왕 5년(921년)에 영조(靈照)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임휴사는 팔공산 일대에 산재한 고려 태조 왕건의 설화와 관련된 이야기가 전한다. 왕건이 후백제 견훤과의 공산 전투에서 패해 도망친 뒤 이 곳에 와서 군사를 추스려 쉬어갔다는 전설이다. 왕건이 잠시 쉬어간 절이라 하여 임휴사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후 조선 후기인 1811년에 중창했다.
현대에 와서 2004년에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가 발생하여 주건물인 대웅전과 산실각이 완전히 소실되었다.
불상과 탱화도 꺼내오지 못한 큰 사고였다. 문화재로는 요사 아래쪽 목재 계단 밑에 조선 시대의 부도 1기가 남아 있는 정도이다
임휴사는 관세음보살에게 올리는 기도가 효험이 있다 하여 관음기도처로 유명하다. 왕건의 전설에도 팔공산에서 많은 군사를 잃고 쫓기는 신세이던 왕건이 관세음보살에게 기도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임휴사의 창건배경 및 역사
임휴사는 일찍이 신라 말엽인 921년(경명왕 5년)에 중국 당나라에서 불법을 수행하여 크게 선풍을 진작하고 귀국한 영조대사(靈照大師:870-947)가 창건한 이래 서기 1811년(순조 11년)에 무주선사(無住禪師)가 중창하였으며 1930년에 포산화상(苞山和尙)이 3창을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임휴사(臨休寺)라는 사명(寺名)은 후삼국시대에 백제와 고려의 각축장이 되었던 팔공산 지역에서 고려를 세운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이 일대 격전을 치른 곳으로 동수대전(棟藪大戰)의 발생에서 찾을 수 있다.
서기 927년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를 침범해 오자 이 소식을 들은 왕건이 신라를 돕고자 경주로 가던 중 동수(동화사 인근지역)에서 견훤을 만나 일대 격전을 벌이게 되었다. 이 싸움에서 왕건은 크게 패하여 생명 조차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을 때 왕건의 심복인 김락의 호위를 받은 신숭겸이 왕건의 투구와 갑옷으로 위장하고 달아나자 견훤이 이를 진짜 왕건으로 보고 쫓아가 죽이는 바람에 왕건은 무사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왕건은 그 뒤 자신을 대신하여 전사한 신숭겸과 김락을 위해 지묘사(智妙寺)를 지어 위로하였는데 이 지묘사는 후일 없어지고 말았다. 이 싸움으로 인하여 대구는 왕건에 관련된 지명이 남게되었는데 왕건의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는 파군재(破軍齋), 왕건의 탈출을 비추어 주던 새벽달이 빛났다하여 반야월(半夜月), 왕건이 혼자 앉아 쉬었다는 독좌암(獨坐巖) 등을 비롯하여 앞산의 대덕산은 은적사, 안일사와 왕건이 탈출하다가 임시로 군막을 치고 피곤한 몸을 잠시 쉬어 갔다고 하여 임휴사(臨休寺)라는 사명이 만들어 졌다.
임휴사 관람 포인트
1.현재 임휴사는 반야당(般若堂)이라는 요사와 옛 관음전 건물을 고쳐놓은 임시 대웅전, 승방 1동만 남아있다. 따라서 경내에는 현재 이렇다할 문화재는 없으나 반야당 아래 쪽 목조로 된 축대계단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조선시대 부도 1기가 외롭게 서있는데 조금 처량해 보이기도 한다.
2.임휴사는 세인들 보다 특히 스님들 사이에 유명한 관음기도처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관음기도로 성취를 이루고자 하는 불자들에게 여타의 사찰보다 수승한 도량이 되고 있다.
3.임휴사가 자리한 대덕산(앞산) 달비골은 수림보호가 잘 되어 있어 등산로 이용되고 있어 등산객들이 많이 몰리고 있다. 또 이 골짜기에는 위장병에 효험있는 석샘과 황룡샘이 있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동수대전과 왕건의 피난길
왕건은 율하천을 따라 남진했다고 본다. 주로 야간에 이동했는데, 음력 9월말이라 강 주변에 갈대와 억새가 많아 몸을 숨기기에 좋았을 것이다. 율하천을 따라간 왕건은 금호강과 율하천이 만나는 두물머리에서 가장 물이 얕고 좁은 팔현습지를 이용했다. 팔현습지에서 현재의 햇살교를 지나 수성구 고모동으로 숨어들었다.
왕건은 고모동에서 모봉(대구구치소 뒷산)을 지나 연호네거리∼방공포병학교 뒷산을 거쳐 두리봉 터널 위 능선으로 잠입했다. 수성구에서 왕건은 형제봉(만촌동)과 무학산(황금동), 두리봉(황금동)과 수성못 뒤 법이산을 이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법이산자락을 지나 파동∼신천을 건너 앞산에 다다른 왕건은 고산골∼큰골로 들어간 다음 은적사에 몸을 숨겼다.
왕건이 사흘간 머물렀다는 은적사 내 굴. |
◆은적사
은적(隱跡)은 ‘숨는다’는 뜻으로 왕건이 숨었던 절이라고 해 ‘은적’이란 명칭이 붙었다는 전설이 있다. 이 절은 926년 경애왕 때 영조대사가 창건한 절로 앞산 큰골에 있다. 은적사 대웅전 오른쪽에는 사람 한명이 들어갈 만한 조그만 굴이 있다. 왕건은 이 굴에서 사흘간 머물렀다고 한다. 허주 은적사 주지스님은 “7년 전 1m정도의 땅을 파서 굴을 넓히고 정비해 지금은 불자들의 소원성취 기도굴로 이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안지랑골
안지랑골은 지렁이 탄생설화를 가진 견훤과 연관이 깊다. 견훤이 앞산 안지랑골까지 왔다는 사실을 토대로 ‘왕지렁이’가 ‘안지랑이’로 바뀌었다고 전해온다.
◆안일사
왕건은 사흘간 머물렀던 은적사를 떠나 보다 안전한 은신처를 원했다. 안일사(安逸寺)는 은적사보다 더 깊숙한 골에 위치한다. 왕건이 ‘편안하게 머물렀다’고 해서 안일사가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견훤은 안일암에서 왕건이 머무르고 있다는 정보를 얻고 이곳까지 추격했지만 왕건은 500m 위 안지랑골 9부 능선에 위치한 풍화동굴인 왕굴로 다시 거처를 옮긴다.
◆왕굴
왕굴은 안일사 위 남서쪽 0.5㎞지점에 있다. 경사가 45도 정도로 몹시 가파르다. 약 30분 정도 올라가면 거대한 바위 2개가 보인다. 오른쪽 바위 밑에 3평(9.9㎡) 남짓한 굴이 있다. 굴 내부에는 현재 무속인들이 켜놓은 촛불 10여개가 일렁이고 있다. 오른편에 신기하게도 샘이 있다. 왕건과 그의 부하들이 마신 장군수다. 이곳 표지판에는 ‘왕건이 장수였을 당시 이곳을 찾았다’로 쓰여 있다. 하지만 이는 오류다. 왕건은 고려를 세운 왕으로 동수전투 때는 벌써 10년째 왕 노릇을 하고 있었다. 왕건이 견훤에게 다시 쫓겨 안일암에서 왕굴로 숨어들었을 때 운무가 앞산에 덮이고 왕거미가 거미줄을 쳐 견훤의 군사가 못 올라오게 했다는 전설이 있다.
◆임휴사
임휴사(臨休寺)는 왕건이 ‘임시로 쉬었다’가서 임휴사가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하지만 임휴사는 조선시대 해동지도 등 지리지에 임수사(臨水寺)라고 쓰여 있다. 임휴사(921), 은적사(926), 안일사(927)는 모두 영조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봐 왕건의 대구 탈출을 도운 듯하다.
임휴사에서 원기를 회복한 왕건은 달비골을 따라 진천천∼화원토성을 거쳐 낙동강으로 향했다. 이어 금호강과 낙동강 두물머리인 달성습지를 지나 다사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곳은 강변이라 숲과 풀이 많아 숨기엔 안성맞춤이다. 하지만 금호강 하류 낙동강 두물머리는 호수와 같이 넓다. 왕건은 야밤에 나룻배를 이용해 강을 건넜다고 봐야 한다.
▲왕선재
왕선재는 원래 ‘왕이 쉬어간 고개’라고 해서 ‘왕쉰재’로 불렸다. 한자로 지명을 적기 위해 ‘쉰’을 ‘선’으로 바꿔 왕선재가 됐다. 왕선재는 현재 다사읍내 왕선주유소 앞이다. 맞은편에 다사우체국이 있다. 왕선재는 현재 성주로 가는 대로가 아닌 일제강점기 당시 만든 옛 도로에 있다. 왕선재 아래 동서타운 뒤는 큰왕선마을, 그 앞은 작은 왕선마을로 불린다. 왕선초등과 왕선중학교도 있다. 최원관 다사향토문화연구소장은 “왕건은 이곳을 거쳐 30번 국도를 따라 성주∼김천∼문경∼충주를 거쳐 송악으로 갔을 것”이라고 했다
임휴사 올라가는 고갯길에는 많은 이들의 염원이 깃든 모음 돌탑이 만들어져 있네~~
제일 먼저 해우소가 보이고 옹골찬 암산 봉우리가 위엄을 더한다~~
드디어 대웅전 앞마당에 들어서니 알산의 시원한 바람이 이마를 스쳐 지나간다~~
반야당 인데 용도를 잘 모르겠네~~ 반야란 지헤란 말의 범어이다~~
현판 글씨체가 범상치 않다. 아마 명필의 작품인듯~~
오백나한전 - 나한이란 부처님 제자를 뜻하는 범어이다~~
오백나한전 초석 밑의 봉선화가 너무나 곱다~~
요건 비단풀~~ 비단풀은 약재로서 아주 귀중하게 쓰이며 특히 두통의 명약이다~~
대웅전 벽화 중 팔상도(이건 설산수행상임) - 설산이란 에베레스트산을 뜻한다
추녀끝 풍경 너머로 보이는 최정산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가슴이 아프네~~
대웅전에 안치된 삼존불(중앙: 석가모니, 우: 보현보살 좌: 문수보살)
용마루에 걸린 용조각이 참으로 섬세하고 화려하네~~
이 글씨도 참으로 웅혼한 기백이 깃드니 볼만 하네~~
대웅전 정면 계단에 연꽃과 길상화 조각이 너무나 섬세하고 황홀하다~~
도량 마당에서 바라본 최정산의 모습이 참으로 시원쿠나~~ 흰구름아 어디로 흘러가니~~
도량 뜰 가장자리의 석등 - 화엄사 쌍사자 석등을 본받은듯~~
절 뒤편은 그야말로 숲의 바다이다 소나무도 너무나 멋있어~~
대웅정 반야당 백팔나한전 전경~~
해우소 - 해우소라 변소를 말함인데 근심을 풀어 내린다는 뜻이다~~
수각 - 오고가는 이들을 위해 수각을 뜰 모퉁이에 설치해 놓았네
목마른 이들이여 마음껏 마사라~~ 물이 너무도 차고 달다~~
축대 옆에 무리지어 식생하는 환삼덩굴 - 환삼덩굴도 고혈압 치료 약재이다~~
산초나무의 열매가 맺혀 여물기 시작하네~~ 아직 넌 꼬마야~~
원기사 방향으러 난 앞산 자락길~~ 가자 가자~~
건너편과 이쪽 자락길을 잇는 멋진 고가교 - 돈 많이 들고 신경 많이 썻네~~
길 옆에 핀 무궁화꽃 - 요즘 보기 드물었는데 이제 보니 반가워~~
요건 무슨 나무 꽃인지(?) - 아는 사람 토 달아줘요~~
월곡지 - 가뭄으로 물이 많이 줄었네 너도 목마르겠다~~
계곡 바위 틈에 숨어 있는 여치 - 위장색으로 잘 치장했네~~
이쯤에서 돌아 가자 덥고 목마르고 피곤하니 다음 여정은 다음에 생각하고 되돌아 가자~~
'雲水 天下 > 近郊山河'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천둔치 도보 탐방(대봉교-희망교-중동교-상동교 구간) (0) | 2016.07.20 |
---|---|
김광석거리에 다녀오다 (0) | 2016.07.20 |
서당골 - 법이산 연결 등산 (0) | 2016.07.20 |
근교 산을 찿아서(달서구 죽곡 모암봉) (0) | 2016.07.09 |
근교산을 찿아서(천을산 한바리) (0) | 2016.0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