賢者 殿閣/조용헌 살롱

장성택의 교훈

초암 정만순 2014. 2. 25. 14:34

장성택의 교훈

 

1인자인 김정은과 목숨을 건 대결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을 모르고, 2인자로 그럭저럭 처신하면서 살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 판단착오였다는 생각이 든다. 김정일 시대에서는 자신이 2인자로 처신하면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아들 대인 김정은 시대에는 2인자 노릇이 애당초 불가능한 상황으로 변해버렸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다. 지나고 보니 장성택은 모든 벼슬을 다 버리고 초야로 물러나 낚시나 하며 살든가, 아니면 목숨을 걸고 선제공격을 하든가, 양자택일을 했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는 장성택의 출신 성분이 야전에서 전투를 지휘하는 무인(武人)이 아니고, 펜대를 다루는 문민(文民)이었다는 점도 한계로 작용한 것 같다. 권력 쟁취의 결정적인 수단은 무력이다. 무력을 다뤄보지 못한 문민들은 결정적인 거사의 순간에 머뭇거리고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 무장이었던 이성계의 1388년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도 따지고 보면 고려 정권에 대한 반란이자 선제공격이었다. 이 결단으로 결국 왕이 된 것 아닌가. 그 아들 이방원도 왕자의 난을 일으켜 고모부 격(?)에 해당하는 정도전의 목을 벤 것이 1398년이다. 이방원의 나이 31세 때이다. 이것도 역시 선제공격이었다. 문민 출신인 장자방(張子房)은 선제공격을 하지 않고, 장자제로 도망가서 숨어 버리는 명철보신(明哲保身)의 선택을 하였기 때문에 유명하다. 한족 문민 출신인 증국번(曾國藩)은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한 후에 여세를 몰아 만주족 정권이 세운 청나라의 북경을 향해 그대로 밀고 올라가 공격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였다. 증국번 휘하에 있던 왕양명(王陽明)의 후손이 왕양명이 생전에 쓰던 검(劍)을 바치며 '이대로 북경으로 치고 올라갑시다' 하고 제안하였지만 결국 거절하였다. 이때 증국번이 군대를 몰아 북경으로 치고 올라가 섞어버린 서태후 정권을 타도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19세기 말에 중국이 서구 열강과 일본에 사방을 뜯어 먹히는 상황은 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이 많다. 2인자 처신의 전범으로 저우언라이를 꼽지만, 한국의 역대 총리들도 흠잡을 데 없는 처신을 보여준 사례가 대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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