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른 바다의 고요함이란 어떤 것일까. 거칠게 몰아치던 격랑이 멈춘 뒤 잔잔해진 바다. 그 수면위로 비춰지는 우주의 온갖 삼라만상의 참된 모습이 나타나는 곳. 가야산 중턱 깊은 숲속 해인사(海印寺)는 화엄종의 근본경전인 화엄경의 한 구절에서 비롯된 ‘해인삼매(海印三昧)’의 경지를 소리 없이 보여 주는 듯 했다.
예로부터 화재, 수재, 풍재의 3재가 없다는 가야산은 조선 8경에 드는 명산으로 꼽혔다. 이런 내력이 강화도에서 만들어진 대장경판을 내륙 한가운데 가야산으로 옮겨오게 한 계기였을까. 하지만, 호란(胡亂)이나 왜란(倭亂) 등의 피해도 빗겨간 해인사였지만 화재만은 어쩔 수가 없어 여러 번의 불로 대부분의 전각들은 소실되었고, 중창을 거듭하며 오늘날까지 이어져 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대장경을 품은 장경판전 만큼은 오롯이 예전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니 이 또한 놀랍고 다행스럽기만 하다.
해인사를 찾아가는 홍류동(紅流洞) 계곡의 겨울은 을씨년스럽다. 봄빛 붉은 꽃들도, 가을빛 노란 단풍들도 자취를 감춘 계곡의 차가운 물소리는 홍류라는 이름을 무색케 한다. 하지만, 청명한 하늘은 이내 마음속에 새로운 청류(靑流)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일주문을 지나 봉황문으로 향하는 넓지 않은 길. 그 옆으로 도열한 전나무 거목들이 웅장하다.
고찰의 오랜 역사를 크기로 말하려는 듯 나무들은 서로 하늘을 가리며 경쟁하듯 뻗어나간다. 그런 삶 한켠에 죽어 고목이 된 느티나무가 눈에 띈다. 해인사 창건 때 심었다고 전해지는 나무다. 천년을 넘게 살아 온 나무는 천수를 마치고 1945년의 생을 마감하여 그루터기만 남았다. 이 땅에 생명이 있는 것들 중에서도 가장 오래 산다는 나무의 마지막 모습은 많은 화두를 던져준다.
존재감만 남은 나무를 뒤로 하고 봉황문과 해탈문을 지나 경내로 들어선다. 구광루 옆을 지나 본전 마당으로 올라가면 대적광전의 거대함이 순례자를 압도한다. 그 뒤로 살짝 내비치는 장경판전의 무게감도 한 몫 보태주고 있으리라.
해인사의 본전인 대적광전은 화엄종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있다. 802년 처음 지어질 당시 비로전으로 불렸던 2층 규모의 금당은 정선이 그린 해인사도에서도 볼 수 있는데 안타깝게도 화재로 사라졌다. 지금의 것은 순조 때 지어진 것을 1971년에 다시 지붕을 높여 대폭 수리한 모습이다. 전면 6개의 기둥을 채우고 있는 주련 가운데 왼쪽 4개는 흥선대원군의 글씨이고 오른쪽 2개는 고종황제가 7살 때 쓴 글씨라 하니 아이 글씨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드디어 장경판전을 향해 오른다. 하지만, 장경판전 일대는 당분간 출입이 금지되어 겉에서만 맴돌아야 할 뿐이다. 바깥 기단을 따라 천천히 거닐던 지난 기억들이 못내 아쉬워 서성거려보지만, 소중한 문화재 보호라는 현실적인 이유에 이내 체념하고 학사대에서 잠시 쉬다 대적광전으로 되돌아온다.
대적광전의 비로자나불은 산스크리트어로 큰 광명, 즉 태양을 의미한다고 한다. 대적광전 기단 위에서 내려다 본 해인사 전각 지붕들의 줄 이은 기와 물결이 아득한 사유가 되고, 바다가 된다. 나는 그 곳에서 금빛 비로자나불을 보며 바다 위로 떠오르는 일출을 상상한다.
깊은 숲속의 산사에서 바다를 생각하고, 금당 처마 아래서 태양을 생각하는 건 해인사이기에 가능한 일이었을까. 해인사의 주요가람의 배치 또한 유선형이라고 한다. 유선형은 바다의 돛을 상징하는 의미가 되어 해인사가 너른 바다를 유유히 떠가는 뜻을 담는다는 것이다.
다소곳이 올 한 해의 순항을 빌어 본다. 이내 기와 너머 깊은 가야산의 고요는 어둠이 되고, 그 위로 짙은 밤하늘의 우주가 쏟아질 듯 내비친다. 아마도 해인삼매의 경지는 내 평생 도달할 수 없겠지만 지금 이 순간, 시린 겨울 해인사의 풍경 속에서 나는 가장 오래된 바다를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