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化 遺跡 /山寺 情報

여주 신륵사

초암 정만순 2014. 2. 10. 14:04

여주 신륵사

 

 

곰곰이 떠올려 보아도 이토록 너른 강가에 인접해 있는 절집은 기억 속에 없었다. 넘실대는 남한강 물결 저편에는 예의 산악 병풍이 농도를 달리하며 중첩되어 있었고, 강물은 잔잔하게 서해를 향해 흘렀다. 오늘날 주요 사찰이 대부분 산 속 깊은 곳에 있는 이유는 명상과 수련의 최적성과 함께 500년 조선조의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의 역사적인 배경에도 원인이 있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를 거쳐 오며 도심지에 인접하여 번성했던 평지 가람들은 잦은 외침(外侵)과 더불어 사대부들의 세력에 의해 흔적을 감추었고, 상대적으로 산 속에 자리해 인적이 드물었던 사찰들은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사실 불교의 기원이 된 인도에는 산이 거의 없었다. 게다가 탁발에 의존했기 때문에 가람 안에는 공양간마저 없었다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사찰의 위치를 “마을과 너무 가깝지도, 그렇다고 너무 멀지도 않은 곳에 만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사찰들이 산 속에 특히 많은 이유는 아마도 불교가 전파되는 과정에서 중국문화와 융합하면서 지역에 맞게 변천해 온 것으로도 생각된다.

도심지와 멀지 않은 신륵사가 건재한 배경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역사가 있다. 다름 아닌 강 건너에 자리한 영릉(세종대왕릉)의 원찰(죽은 이의 명복을 빌기 위한 절)로 정해졌기 때문이다. 원래 내곡동에 있던 영릉은 풍수지리에 의해 터가 좋지 않다고 해서 예종원년(1469년)에 이곳으로 옮겨졌던 것이다.

본래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 오지만, 이를 뒷받침해 줄 만한 근거는 없고, 고려 말 나옹화상이 머물렀던 것으로 특히 유명하다. 뛰어난 고승 나옹화상은 수천명의 제자가 따랐을 정도로 명성이 드높았는데, 조선 초 태조와 함께 역사 속에 등장하는 무학대사가 그 제자들 중 한 스님이었다는 사실은 나옹화상의 위상을 미루어 짐작하게 해 준다.

그의 법회에 몰려든 백성들이 얼마나 많았으면 당시 고려 임금이 제동을 걸 정도였을까. 결국 나옹화상은 왕명으로 다른 사찰로 이동하던 중 신륵사에 머물러 열반을 맞게 됐는데 그의 마지막 길에는 오색구름이 산마루를 덮고 용이 하늘로 승천하는 등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고 전해진다.

 

   
 

사찰 답사를 다니다 보면, 무얼 담을까 고민을 하게 되는 곳이 있는가 하면, 담고픈 것이 너무 많아 반대의 고민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신륵사는 후자의 경우다. 겨울만 아니었다면 바로 스케치북을 꺼내 몇 번이라도 주저앉고 싶은 마음을 추스르며 경내에 머물렀다.

솔숲 우거진 봉미산을 거닐며 겨울 소나무 줄기 사이로 내비치는 신륵사의 가람과 그 너머의 남한강 물빛이 햇살에 반짝거리는 걸 바라본다. 산 중턱에 있는 나옹화상의 묵직한 석종형 승탑도, 그 앞 석등의 화사석에 조각된 아름다운 비천상도 강물의 빛을 머금은 듯 반짝거리는 것만 같다.

다시금 다층전탑 놓인 강변의 언덕 위에 올라 남한강을 내려다본다. 나옹스님의 다비식이 열렸다는 강가의 커다란 바위 위에는 석탑 하나 홀로 서서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모습은 왠지 외롭다기보다 도도하면서도 고결해 보인다.

끊임없이 변해가는 이 풍경들 속에 다비식에 참석했을 수많은 군중들을 생각하며 나는 그들이 떠난 자리에 오롯이 남은 작은 탑을 어루만져 본다. 더 멀리, 더 깊은 곳까지 흘러가고 싶은 배들의 일렁이는 마음을 담아 강 물결은 잔잔하게 탑을 비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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