雲水 天下/近郊山河

초암 - 하목정과 묘골마을을 다녀오다

초암 정만순 2014. 8. 5. 17:05

초암 - 하목정과 묘골마을을 다녀오다

 

하목정(霞鶩亭)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하산리 1043-1번지(대구광역시유형문화재 제36호)
 

하목정(霞鶩亭)은 대구시 달성군 하빈면 하산리 낙동강변에 자리 잡고 있다. 낙동강이 북에서 남으로 흐르다가 동으로 틀어 흐르는 곳에 동호(東湖)를 이루며 5리를 뻗친 형제암 석벽의 멋진 풍경을 선사하고 있다.

 

지금은 도시화로 그 모습이 묻혀 있지만, 예전에는 하목정 바로 앞에 물이 흐르고 십리 명사(明沙)가 펼쳐졌다. 멀리는 가야산과 비슬산이 둘러싸고 있는 지세로, 저녁노을이 낀 명사십리에 하늘을 나는 따오기의 모습이 장관을 이루던 곳이다.

이곳은 조선 중기 전의(全義)이씨 낙포(洛浦) 이종문(李宗文: 1566~1638)이 선비로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으로 활약하다가 왜란이 평정된 후 1604년(선조 37)에 이 정자를 짓고 강산의 풍경에 묻혀 만년을 보낸 곳이다. 

하목정은 다른 정자와 달리, 인조대왕이 왕손으로 능양군(綾陽君)이던 시절에 유숙하고 간 곳이라는 각별한 점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대부가 지은 정자 중에 유일하게 겹처마를 달아낸 부연(婦椽)이 있는 건물이다. 하목정 창수전말 기록에 의하면, 인조대왕이 능양군 시절에 하목정을 다녀간 후 임금에 즉위하였다.

훗날 이지영이 어전에 입시(入侍)하자 인조는 이지영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하교하기를 "너희 집 하목정은 좋은 강산에 점지한 훌륭한 정자인데 어찌하여 부연이 없는가"라고 하자, 이지영이 답하기를 "사서인(士庶人)은 사가(私家)에 부연을 달 수 없는 것이 나라의 제도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인조는 특별히 은 200냥을 하사하며 부연을 달 것을 하명하였다. 그러자 이지영은 "하명을 하시니 부연을 달고 자물쇠로 봉한 후 사처로는 사용치 않겠습니다"라고 하자, 인조는 지혜롭게 답을 내렸다. "거처를 폐하지 말고 내가 유숙한 표적을 남기면 되질 않겠느냐" 라고 하면서 하목당(霞鶩堂) 세글자를 큰 글씨로 써서 현판을 하사하였다.

하목의 뜻은 당나라 왕발이 지은 등왕각서(王閣序)에 '지는 노을은 외로운 따오기와 가지런히 날아가고(落霞與孤鶩齊飛) 가을 물은 먼 하늘색과 한 빛이네(秋水共長天一色)'라고 한 데서 취해온 것으로, 그곳의 강산풍월을 나타낸 말이다.

사랑채로 이용하는 이 정자는  동향으로 평면이 丁자형식처럼 되어 있어 특이하며, 처마 곡선도 부채 모양의 곡선으로 특이한 팔각지붕의 건물이다. 정면4칸, 측면 2칸, 규모로 우측 1칸에는 전면으로 누 1칸을 첨가하고 후면으로 방 1칸을 더 만들어 집 전체 모양이 정자형으로 되었다하목정에는 한음(漢陰) 이덕형을 비롯한 명가들이 읊은 시가 남아있고, 조선조 김명석, 남용익, 채제공, 조선말 강화학파 이건창, 김택영 등 현판들이 걸려있다.

수백 년이 된 배롱나무가 서있는 사당에는 낙포의 현손으로 '이인좌의 난'을 평정한 분무공신 양무공 전양군(全陽君) 익필을 불천위로 모시고 있다.(내부는 보지 못했다.)

 

하목정 정문

 

정문을 통해봉 사랑채

 

특이하게도 부연이 있는 하목정
附椽(부연)이란?
처마 서까래 끝에 덧얹는 네모지고 짧은 서까래이다.
처마를 위로 돌리게 하여 날아갈 듯한 곡선미를 연출한다. 고급주택이나 사원건축에 많이 사용되었다.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사랑채로 이용되었던 이 집은 전체적으로 T자형 구조로 되어있어서 처마곡선도 부채 모양의 곡선으로 처리되었다.
내부에는 김명석·남용익 등 많은 유명인들이 쓴 시가 액자가 걸려있다.

 

하목정 편액

 

측면 모습 - 지붕 옆면이 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정원에 붉게 핀 배롱나무 

 

 

서녁 담장 너머로 낙동강이 아스라히 보인다 

 

북녁 계단식 담장 너머로 대숲이 울창하다

 

함께 역사기행에 나선 사진예술가 현암선생 - 바쁘다 바빠!

 

 석축대와 토담이 맛깔스럽다

 

담장을 격하여 자리한  강창장어음식점 - 많은 미식가들이 즐겨 찿는 맛집이다

 

 

 묘골마을과 육신사 등등

순천박씨 충정공 박팽년 후손의 500년 집성촌

 

 

묘골마을은 달구벌대로를 따라 성주 방면으로 가다가 문양역을 지나 성당식물원에서 곧장 우회전 한 후, 안내판을 따라 5분 정도 가면 도착한다. 도시철도 문양역에서는 달구벌대로(30번 도로)를 따라 서북쪽으로 10분 정도의 거리이다. 행정상의 위치는 대구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이다.

묘리(妙里)는 ‘묘하게 생긴 마을’이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밖에서는 마을을 볼 수 없고 안에서도 마을 밖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묫골’이라고 부르고 있다. 풍수지리적으로 이 마을은 용산(龍山)을 배산으로 등지고 있으며, 용의 꼬리와 머리에 해당되는 부분이 골짜기에 의해 떨어져 마주보는 형상에 자리하여 명당으로 일컬어진다. 낙동강변의 성주대교 인근에 위치하여 오늘날 대구와 성주를 잇는 30번 도로의 요충지로서도 주목 받는 곳이다.

사찰의 일주문처럼 생긴 ‘충절문’을 지나 마을에 도착하면 입구에 ‘사육신기념관’이 있다. 2010년 개관한 기념관에는 사육신과 관련된 다양한 자료들을 볼 수 있어서 탐방객이 관람하기에 좋은 곳이다.

기념관을 지나 마을로 들어서면 길 양쪽에 전통한옥이 늘어서 있다. 묘골마을은 충정공 박팽년(1417∼1456)의 유일손인 박일산부터 500여 년 동안 후손이 거주한 순천박씨 집성촌이다. 마을의 가장 높은 산 밑 끝자락에는 종택이 자리 잡고 혈연의 위계에 따라 가옥들이 배치되어 있다. 이 마을은 또 일제강점기 전까지만 해도 약 300여 호의 가옥이 꽉 들어차 있었다고 전하는데, 지금은 30여 가구만이 남아 있다. 하지만 오래된 한옥들을 정비 보수하여 마을 전체가 깨끗하고 잘 정돈된 느낌을 준다.

마을 안쪽에는 사육신을 향사하는 사당인 육신사(六臣祠)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세조에게 왕권을 빼앗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병자사화로 숨진 사육신(박팽년, 성삼문,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들을 모신 사당이다. 후손에 의해 박팽년만 배향되다가 나중에 현손 계창이 박팽년의 기일에 여섯 어른이 사당 문 밖에서 서성거리는 꿈을 꾼 후 나머지 5위의 향사도 함께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사육신 사당은 이곳 육신사를 비롯해 서울 노량진동의 의절사, 강원도 영월군의 창절사 등 전국에 세 곳이 있다.

처음에는 육신사의 전신인 낙빈사(洛濱祠)를 지어 제향하여 오다가, 숙종 17년(1691) 부터는 낙빈서원을 건립하여 제사를 지냈다. 1866년 대원군의 서원 철페령으로 낙빈사가 서원과 함께 철거되었으며, 1924년 낙빈서원이 재건되면서 위패를 다시 봉안하게 되었다. 이후 1974년 ‘충효위인유적정화사업’에 따라 현재의 위치에 육신사로 이름을 붙여 사당을 재건하였다고 한다.

사우 건물인 숭정사에는 사육신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에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어 웅장한 느낌을 준다. 제사 때 외에는 일반인에게 개방하지 않기 때문에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어느 사당보다도 엄숙함이 더한 것은 온 가문이 멸문의 화를 당하면서도 절의를 굽히지 않았던 사육신의 절개 때문일 것이다. 경내에는 이외에도 정면 5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인 숭절당, 외삼문, 홍살문, 내삼문, 삼층각 등이 있고 사당 앞에는 사육신의 행적을 기록한 육각기념비가 1979년 건립되어 세워져 있다.

육신사 경내의 오른쪽에는 태고정(보물 제554호)이 자리잡고 있다. 태고정(太古亭)은 충정공의 후손인 박일산이 1479년 건립했다. '일시루(一是樓)'라고도 불리는 태고정의 건축학적 묘미는 지붕에 있다. 오른쪽은 팔작지붕, 왼쪽은 맞배지붕에 부섭지붕(서까래의 윗머리를 다른 벽에 지지시켜 달아낸 지붕)으로 마감한 보기 드문 형태를 띠고 있다. 건물 한채에 세가지 건축 양식이 각각 적용되어 있으며, 조선 전기 건축의 특색을 잘 보여주고 있어 건축사적인 가치가 크다고 한다. 지금도 이곳에서 순천박씨 문중이 매년 음력 9월에 사육신을 위한 제사를 지내고 있다.

최근 이곳 육신사에는 찾는 사람들이 많이 늘고 있다고 한다. 단체 방문객도 많지만 특히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 탐방객이 역사 교육을 겸해서 많이 찾는다고 한다. 시내버스(성서2번)도 1시간 간격으로 마을을 드나든다. 도심과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이곳에서 사육신의 절개와 불사이군의 올곧은 선비 정신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은 대구의 자랑이다.

 

 묘리 마을 입구에 우람하게 솟은 충절문 - 길 양편으로 배롱나무가 한창 꽃을 피우고 있다

 

마을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반기는 사육신기념관 - 시간 관계상 관람은 생략했다 

 

육신사, 삼가헌 녹색길 안내기둥 

 

충효당


박팽년의 7대손인 금산군수를 지낸 박숭고가 후손들을 가르치기 위해 1844년 지었다는 충효당은 후손들이 자리를 옮겨지었다.

충효당 안내 표시판 

 

충효당 전경   

 

 

 

 

아담하게 조성된 연지에 금잉어가 한가로이 노닌다

 

육신사로 향하는 입구의 모습 


실제 주민들이 거주하는 한옥 -골목마다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는

한옥마을의 모습에 마음마저 따뜻해진다.

 

 

 도곡재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2호


도곡재는 사육신 중 한분인 박팽년의 선생의 후손들이 세거하고 있는 묘골마을 내에 자리하고 있다. 이 건물은 대사성을 지낸 서정공 박문현이 1778년(정조 2)에 주택으로 건립하였던 것을 19세기 중엽부터 도곡공 박종우의 재실로 사용하면서 선생의 호를 따서 도곡재라 부르게 되었다.
박종우는 인조 때의 문신으로 낙재 서사원을 사사하였고 한강 정구 문하에 출입하였으며 문장과 행의가 추앙되었다고 「대구읍지」 등에 기록되어 있다.
도곡재는 조선시대 남부지방 양반가옥의 실례를 잘 보여주며 안채, 사랑채, 대문채 등이 3개 권역으로 분리되어 일곽 안에 잘 보존되어 있다. 좌측으로 낸 대문채를 들어서면 남향하여 사랑채에 대당하는 도곡재가 자리하고 사랑채 우측에 연한 중문채를 들어서면 ㄱ자형의 안채와 우측의 고방채가 자리하여 튼구형의 배치를 이루고 잇다.
사랑채인 도곡재는 원래 정면 4칸, 측면 1칸 규모였으나 우대에 재실로 사용하면서 왼쪽에 퇴칸 1칸을 달아 내고 대청을 넓혀 누(樓)처럼 꾸몄다.

각 방의 후면에는 개흘개가 설치되어 있으며, 네모기둥을 세우고 납도리를 돌린 팔작집으로 소박한 구조의 건물이다.

 

 

도곡제 정문

 

도곡재 안내

 

도곡재 본채와 정원 

 

옆뜰에 조성된 사각연못 

 

육신사


이 마을 가운데로 곧게 올라가면 맨 끝에 육신사가 있다. 사육신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 육신사이다.

 

온 집안이 멸문의 화를 당한 사육신가운데 유일한 핏줄, 박팽년의 유복손 박일산이 뒷날 성종의 사면을 받고 후손이 없는 외가의 재산을 물려받아 묘골에 정착하였다.

 그 후손들은 절의묘(節義廟)라는 사당을 세우고 할아버지 박팽년의 제사를 지냈다. 그런데 박팽년의 현손 계창이 선생의 제삿날 여섯 분의 선생들이 사당문 밖에서 서성거리는 꿈을 꾸었다. 놀라 다섯 분의 제물도 함께 차려 제사를 지냈고, 이로 말미암아 하빈사를 세워 사육신을 함께 배향하였다.

대원군의 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 1974~5년 ‘충효위인 유적정화사업’으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이름도 육신사로 바뀌었다. 그러나 박팽년의 부친 중림의 위패도 봉안하고 있어 사당에는 ‘숭정사(崇正祠)’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육신사 외삼문 

 

홍살문 

 

육신사 앞뜰 전 -숭정사  내삼문과 사육신 유각비 등이 보인다

 

사육신육각비  

 

뜰옆에 박준규선생 생기터도 있다 

 

성인문 

 

태고정(보물  제554호)

 

이 건물은 조선 성종 10년(1479) 박팽년의 손자인 박일산이 세운 별당건축이다. 지금 있는 건물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불타서 일부만 남았던 것을 광해군 6년(1614)에 다시 지은 것이다. 일명 ‘일시루(一是樓)’라고도 한다. 현재 대청에는 임진왜란 후 치찰사로 온 윤두수의 한시를 새긴 현판과, 정유재란 후 명군 선무관이 남긴 액자 들이 있다.

네모난 모양의 단 위에 서 있으며 앞면 4칸 ·옆면 2칸 크기로, 동쪽 2칸은 대청마루이고, 서쪽 2칸은 방으로 꾸몄다. 대청 앞면은 개방되어 있는데 옆면과 뒷면에는 문을 달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대청 앞 기둥 사이에는 2층으로 된 난간을 설치하였다.

 

서쪽에는 온돌방과 부엌을 마련해 놓았는데 단순한 아궁이가 아닌 부엌을 한쪽 구석에 둔 것은 흔치않은 것이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은 건물이지만 가구나 세부가공이 정교한 편이다

 

 

 

 태고정 전경

 

태고정 현액


 

일시루 현액

일시루 낙관의 비해당(匪懈堂)은 안평대군<1418(태종 18)~1453(단종 1)>을 의미한다. 세종의 셋째 아들로 송설체의 대가인 안평대군은 이 집이 처음 지어진 해보다 훨씬 앞선 1453년 계유정난으로 사사되었다.  전하는 말로는 안평대군이 쓴 이 편액을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어지러울 때 한 지관이 감추어두었다가 되돌려준 것이라 한다


 

태고루 내부

 

태고루 측면

 

이제 슬슬 묘골 뒤산 등산로로 접어들어 정상으로 향한다~~

 

묘골 뒤산 전망대인 육각정

 

낙동강 도도한 물줄기를 바라보며 오늘의 답사행을 마무리 한다


하산길에서 바라보는 묘골의 아름다운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