雲水 天下/近郊山河

[스크랩] 우미산 남지장사 녹동서원에 다녀오다~~

초암 정만순 2014. 2. 5. 19:31

 

 

우미산 남지장사 녹동서원에 다녀오다~~

 

 

달성군 가창면에 있는 우록동의 지형은 참으로 묘하다

한마디로 호리병처름 생겼는데 삼성산, 우미산 청산등이 우록과 백록을 거의 원형으로 둘러싸고 있으며 그 입구는 병 주둥이 처름 좁고 골 안에 들어서면 넓게 펼쳐지는데 그렀다고 평야가 전개되는 것은아니고 서서히 높아지는 구릉이 펼쳐진다. 물론 작은 논과 밭도 있지만 큰 면적은 아니다.

골 안에는 녹동서원(유교), 남지장사(불교) 등 크고 작은 문화유적이 산재하여 옛부터 이곳이 예향의 고향이었음을 말해준다.

 

 

<남지징사>

 

남지장사(南地藏寺)는... 약간 독특한 이름을 가졌습니다.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의 우록리에 최정산(最頂山) 자락에 있는 사찰로서 소나무로 둘러쌓인 깊은 산중에 자리하여 더없이 한적하고 복덕의 기운이 가득한 절집입니다.

지장사(地藏寺)라는 것이 원래 지장보살을 섬기는 절인데 이 지장사라는 절 이름앞에 남(南)자가 붙은 것은 현재 대구 팔공산 갓바위에서 내려오다 보면 우측으로 난 산길 속에 있는 북지장사(北地藏寺)와 구분을 위하여 서로가 앞에 방향표시를 넣어 만든 이름입니다. 서로가 특별한 관계는 없으며 다만 오래 전 대구에는 5개의 자장사가 있었다고 전해지기도 합니다.

 

남지장사는 서기 684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곧이어 지어진 사찰로서 유서깊은 절이나 우리나라 여느 사찰과 마찬가지로 목조건물로서의 수난을 연이어 받아 폐사와 중창을 거듭한 절입니다. 임진왜란때는 사명대사가 이 절을 승병 훈련장으로 이용하였고 이에 왜군들이 절을 점령한 후 모두 불을 질러 전소하는 비운을 맞기도 하였구요.

 이후 조선 효종와 영조시대에 다시 중창되었지만 사세는 이전과는 달리 많이 줄어 들었습니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들은 대개가 최근에 조성되어 진 것들이 많아 그 유구한 역사와 비견되는 감흥은 덜 하지만 그래도 산과 산으로 둘러쌓인 깊은 산중에서 천년의 역사를 지켜온 그 내력은 여전하겠지요

 

 남지장사 초입에 들어서면 우선 높은 축대가 방문객을 압도한다. 환영 인사가 거창하군~~

 

 

 

 

우록마을 등산 안내판. 우록마을 기점 으로 많은 등산로가 있으며 안내판의 등산로는 가벼운 산행이나 초보자릉 위한 좋은 코스이다, 그외에 원형회귀등산로는 약 5시간 걸리는 장거리 등산로인데 여기에는 소개되지 않았다~~

 

 

절 입구 주차장에 설치된 수조에는 차고 맑은 물이 콸콸 쏟아져 나그네의 갈증을 단번에

해소해 주네~~

 

대웅전

 

대웅전에 모셔진 삼존불(석가모니불, 문수보살, 보현보살)

 

 

탑 오개석 위의 앙증스런 동자승들의 모습이 나를 미소짖게 하네~~

 

절 일주문이 없는 대신 현관문 역할을 하는 광명루. 마음을 밝혀 본래 나를 찿는게 불문의 진리이던가~~ 

 

극락보전

 

극락보전에 모셔진 삼존불(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도량 가운데 우뚝솟은 노거수~~

 

총련암 가는 길의 노송 숲길. 이런 숲길 걷는 재미에 산다~~

 

풍수지리 이론에 명당을 중심으로 좌청룡 우백호가 있듯이 남지장사를 중심으로는 오른쪽으로는 백련사가 있고(우측 서쪽은 백색을 상징함) 왼쪽으로는 청련암이 있다(좌측 동쪽은 청색을 상징함). 참으로 멋진 위치에 교묘히 이름의 지었으니 선조들의 지혜가 참으로 돗보인다 하겠다. 

 

<청련암>

 

 

 

 

 

 

 

현판 글씨체가 우아하면서도 도타우니 명필의 서체가 분명한듯 ~~

 

창고와 채마밭

 

청련암에서는 억세동산을 거쳐 최정산을 오르는 기점이 되고 마을을 거쳐 녹동서원으로

하산할 도 있다~~

 

(백련암>

 

 

 

백련암 전경

 

관음전

 

 

 

 

 

 

앞 뜰의 백련(수련)

 

청련(수련)

 

 

 

(백록마을)

우록동의 가장 상층부 골짜기에 위치하며 남지장사, 억새밭 올레길 가는 기점이 된다.

주위에 아름다운 전원주택이 많이 있는 곳이다.

 

 

배록동은 우록 분지의 가장 높은 곳으로 억새밭 올레길과 남지장사로 가는 기점이다

 

백록동의 어여쁜 전원주택

 

(녹동서원>

 

<녹동서원>

임진왜란에 왜군 장수로 참전 했다가, 조선의 문화 문물에 반해서 귀화하고,

조총과 왜군의 전술을 조선군에 전파하여, 큰 공을세운 '왜장 사가야'가

선조에게서 '사성 김해김씨'를 받고, '충선'이라는 이름 까지 하사받아,

만년에 대구 가창 우록동에 자리잡고 '사성 김해김씨'의 시조가 되어 자리 잡은 곳입니다.

 

녹동서원 전경

 

 

 

- 모하당 김충선 :

본관 김해. 자 선지(). 호 모하당(). 본명 사야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가토 기요마사[]의 좌선봉장으로 내침하였으나, 조선의 문물이 뛰어남을 흠모하여 경상도병마절도사 박진()에게 귀순하였다. 누차 큰 공을 세워, 가선대부()를 제수받았다. 이어 도원수 권율(), 어사 한준겸()의 주청()으로 김해 김씨성과 충선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자헌대부()에 올랐으며 임금이 하사한 성씨라고 해서 사성 김해 김씨라고 부른다. 정유재란 때 전투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그 뒤 오랑캐의 침입으로 변경이 소란하자, 자청하여 10년 간 국경방어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 정헌대부()가 되었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 때, 부장() 서아지()를 잡아 죽인 공으로 사패지()를 하사받았으나, 사양하고 수어청의 둔전()으로 삼게 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소명()을 기다리지 않고, 광주() 쌍령()싸움에 출전하여 오랑캐 500여 명을 베었다. 화의()가 성립되자, 통곡하여 대구의 녹리(鹿)로 돌아갔다. 진주목사 장춘점()의 딸과 혼인하여 우록동(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에 정착하여 살면서 가훈 ·향약 등을 마련하여 향리교화에 힘썼다. 문집에 《모하당문집》이 있다

 

향양문 - 유교에서는 음을 멀리하고 양을 가까이 하였으니 양이란 인간 품성의 밝은 면을 말함이다. 따라서 이 편액의 내용은 유학의 사상을 ㅐ표한다 하갰네~~

 

 

 

솟을대문- 삼문이라고도 하며 지체높은 양반집이나 서원 등에 세워지는 정문이다

 

 

 

 

 

 

숭의당 - 의를 숭상함은 유학의 기본 범절이거니와 특히 김충선 장군은 왜국 출신으로 의를 위해 조선에 귀화하였으나 숭의의 의미는 한층 무겁게 내 가슴에 파고드네~~

 

뒤뜰 석축 정원 앞에 우뚝 선 괴석

 

<우미산 등산로 입구>

우미산은 우록동 동쪽에 위치한 산으로 삼성산 , 청산과 함께 우록 골짜기를 만들어 내는 원형 산맥 중 한 봉우리 이다. 많은 등행 사진이 있으나 연재 매수 한정으로 이만 줄이니 양해 바라며 직접 산행하여 심신의 건강을 도모해 보시길 권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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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보급 행정인의 모임
글쓴이 : 초암 정만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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