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과의 對話/한국의 숲

배롱꽃 찿아가는 길 - 신숭겸유적지

초암 정만순 2022. 7. 27. 12:33

배롱꽃 찿아가는 길 - 

신숭겸유적지

 

 

 

■ 신숭겸장군유적지

 

 

 

 

1982년 대구광역시 기념물로 제1호로 지정되었다.

 

 

신숭겸 장군은 태봉(泰封)의 기장으로 있으면서 배현경 등과 포악한 궁예(弓裔)를 내몰고 왕건(王建)을 받들어 고려를 개국하였다.

그 뒤 대장군이 되어 927년(태조 10) 태조와 신라를 도와 후백제를 공격하고자 하였으나 대구 공산(公山) 싸움에서 후백제군에 포위되어 태조가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이 때 자신이 왕으로 변장하여 김락(金樂)장군과 같이 싸우다가 왕건을 대신하여 전사하였다.

왕건은 이틈을 타 장졸로 변장하여 적의 포위망을 뚫고 단신 탈출하였다.

 

 

태조는 장군의 죽음을 애통하게 여겨 그의 시신을 거두어 광해주(光海州, 지금의 춘천)에 예장(禮葬)하고, 전사한 자리인 이 곳 대구 공산에 순절단(殉節壇)지묘사(智妙寺, 美理寺)를 세워 그의 명복을 빌게 하는 한편 일품전지 삼백무(三百畝)를 하사하여 이를 수호하게 하였다.

그 후 지묘사는 고려의 멸망과 함께 폐사되었으나 1607년(선조 40) 경상도 관찰사 유영순(柳永詢)이 이 자리에 표충사·표충단·충렬비를 건립하여 공의 혼을 위로하고 충절을 추모하였다.

 

 

그 후 조정에서는 1672년(현종 13)이 서원에 사액을 내려 관리하도록 하였으나 1871년(고종 8) 서원훼철령에 의해 표충사가 훼철된 뒤로 후손들이 재사(齋舍)를 신축하여 지켜오고 있다.

 

지금도 표충사 앞쪽 동화사와 파계사로 갈라지는 고개를 왕건의 정예군이 크게 패하였던 고개라 하여 파군재라 부른다.

 

▼ 파군재

 

파군재 남쪽 산기슭의 봉무정 앞에 있는 큼직한 바위는 왕건이 탈출하여 잠시 앉았다고 해서 독좌암이라 부르며, 표충사의 뒷산은 왕산(王山)이라 부른다.

이밖에도 대구에는 이 싸움에서 유래된 안심, 해안, 반야월 등의 많은 지명이 남아 있어 당시 격전지였음을 알 수 있다.

 

 

신숭겸장군유적지왕산을 배경으로  표충사, 표중서원 건물이 좌우로 배치되어 있고 그 전면 아래쪽에 순절단이 배치되어 있다

 

 

▼ 왕산과 홍살문 

 

 표충재

표충재는 뒤로 높다랗게 사당을 업고, 순절단이 내려다보이는 왕산 중턱에 있다.

표충재라는 편액이 걸려있는 중심 건물과 동재와 서재가 있다.

 

표충재 현판은 충익공 신정희가 썼다.

표충재 왼쪽 문을 열고 들어가면 신숭겸 장군의 높은 절개를 추모하여 건립된 강당인 '상절당'이 있다.

 

 

 

표충사(표중서원)

 

표충사는 일명 표충서원으로 불리면서 유림에서 지켜오다가 1871년 (고종 8)에 훼철된 뒤에는 순절단을 단소로 후손들이 향사를 받들었다.

여러해 동안 영남 족친들이 건축비를 모아서 1888년(고종 25)에 표충사 옛터에 완공했다.

 

 

 

● 배롱나무 보호수

 

 순절단 경내 담장 안에는 400년 묵은 배롱나무 한그루가 있는데 시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그 외에도 수백년 먹었음직한 나무들도 다수 있는데 단 경내 전체가 배롱나무꽃으로 둘러싸여 장군의 충열정신을 대변하는 듯 하다

 

 

 

● 순절단

 

왕건이 세운 지묘사는 고려멸망과 더불어 폐사 되었으나 1607년 선조 40년에 경상도관찰사 유영순이 폐사된 지묘사 자리에 표충사, 장군이 피 흘린 흙을모아 단을 건립한 표충단,충렬비를 건립하여 공의 혼을 위로하고 충절을 추모 하였다.

 

 

▼ 순절지 비각 / 순절비

 

 

 

● 태조왕건나무

 

400년된 팽나무로서 보호수이다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을 기려 그 이름을 붙였다

 

 

 

◆ 사진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