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化 遺跡 /문화재 유적

우리땅 역사 기행 - 모명재 / 두사충묘

초암 정만순 2021. 11. 21. 10:10

우리  역사 기행 - 

모명재 / 두사충묘

 

 

 일시 : 2021. 11. 22 (흐림)

 

 담방지 : 명정각 - 모명재 - 두사충묘 - 두한필묘

 

 답방인 : 초암 독행

 

 

 

■ 모명재(募明齋)


대구광역시 수성구 달구벌대로525길 14-21 (만촌2동 716번지)에 소재한다

 

 

모명재의 ‘모명’은 두사충의 호로,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의미다.

모명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각각 이여송과 진린을 따라 조선에 파병됐던 명나라 작전참모 두사충(杜師忠)이 귀화한 후, 그의 후손들이 1912년에 세운 사당이다.

 

 

모명재는 네모 반듯한 대지에 남향으로 배치되었다.
대문을 통해 들어가면 앞쪽에 모명재가 위치하는데,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 기와집이다.
평면은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들였으며, 앞쪽에는 반칸 규모의 툇간을 두었다.
건물 정면의 여모중방1밑은 붉은 벽돌을 쌓아막았다.
가구(架構)는 5량가의 견실한 구조로 종보 위에는 원형 판대공을 세웠으며 앞쪽의 창방2과 장혀3을 끼워 장식하였다.
20세기 초 대구지역 재실 건축의 형식을 잘 보여준다.

모명재는 1912년 경산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구해 짓고 1966년 중수한 것이다. 

 

만동문(萬東門)

 


백천유수필지동(白川流水必之東)이라는 말에서 따온 것인데 이것 또한 그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뜻으로 두사충이 명나라를 잊지 않는다는 뜻이 담겨 있다.

두사충의 묘소앞에 있는 비문을 별도로 다시 새겨 모명재 앞뜰에 신도비를 세웠다.

 


이 비문은 이순신 장군의 7대손인 삼남 수군통제사 이인수(李仁秀)가 지었는데, 임란 당시 이순신과 두사충의 친밀한 관계가 후손들에게까지 접촉을 갖게 했음을 알 수 있다.
모명재(慕明齋)는 1912년 경산 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사와 두사충의 묘소 앞에 지은 것인데 1966년 2월 건물이 너무 낡아 중수하였다.
모명재라고 한 것은 고국인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이다 .

 

이순신 장군의 7대손인 삼남 수군통제사 이인수(李仁秀)가 지은 두사충의 묘소앞에 있는 비문을 별도로 다시 새겨 모명재 앞뜰에 신도비를 다시 세웠다

 

또한 모명재를 다른 말로 형봉재라고 한 편액이 남아있다

 

 

1966년 모명재를 건립했다는 중건기가 걸려있다

 

■ 두사충


두사충은 중국 두릉(杜陵) 출신으로 시성 두보(杜甫)의 후손이기도 한 두사충(杜師忠)은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군 이여송의 부관(지리참모)으로 참전해 활약했다.

직위는 수륙지획주사(水陸地劃主事)로 주변의 지형을 살펴서 적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고 출전 시에는 적을 공략하기 쉬운 곳을 가려서 진지를 구축하는 임무였다

 


그는 조선군과 긴밀한 전략협의를 했고, 그 과정에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도 매우 가까워졌다.
임진왜란이 평정된 후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정유재란(1597)이 일어나자 진린(陳璘) 도독의 비장으로 다시 참전했다.

이 때 바다의 영웅 이순신과도 재회하게 된다.

그 감회를 충무공은 ‘봉정두복야(奉呈杜僕射)’라고 하여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북거동감고(北去同甘苦): 북으로 가기까지는 고락을 같이 하고
동래공사생(東來共死生): 동으로 오면 죽고 사는 것을 함께하며
성남타야월(城南他夜月): 성 남쪽 타향의 밝은 달밤아래
금일일배정(今日一盃情): 오늘 한잔 술로 정을 나누네.

 


두사충은 1598년 정유재란이 끝나자 매부이기도 한 진린을 압록강까지 마중한 뒤 장차 명나라가 망할 것을 감지한 그는 자신은 맏이 산(山)과 둘째아들 일건(逸建)을 데리고 조선에 귀화해 대구에 자리 잡았다.
처음에 경상감영공원 일대의 땅을 하사받았는데, 경상도 감영이 그 곳에 들어서면서 계산동 쪽으로 주거지를 옮겼다.
계산동 일대는 두씨들의 세거지가 되었는데...두씨들은 계산동으로 옮기자마자 주위에 많은 뽕나무를 심었고 그 때문에 이 일대를 뽕나무 골목이라 부르게 됐다.

 


그러나 사람이 늙으면 누구나 고향이 그리운 법!
수만리 떨어진 타국에서 편안한 생활을 하는 두사충이었지만 고국에 두고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두사충은 최정산(最頂山=현재의 대덕산)밑으로 집을 옮겨 고국인 명나라를 생각하는 뜻에서 동네 이름을 대명동(大明洞)이라 붙이고 단을 쌓아 매일 초하루가 되면 고국의 천자쪽을 향해 배례를 올렸다고 한다.

 

모명재 입구에는 중국 단풍나무를 비롯해 배롱나무, 회화나무, 박태기나무 등 5천여그루와 포토존, 긴 의자, ‘두사충’을 소개한 스토리보드판으로 꾸며진 작은 공원이 자리 잡았다.

또 소공원 옆에는 산책을 위한 데크로드가 만들어져 있다

 

■ 명정각

 

 

두사충의 후손 두한필의 효자각이다

모명재 입구에 명정각이라는 작은 정려각이 있다. 두사충의 7대손인 두한필(1823~1893)의 효행을 알리기 위하여 조정에서 정려를 내린 것이다.

두한필의 묘가 두사충 묘와 20미터정도 떨어져서 자리하고 있다.

 

 

두한필의 효행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어느 추운 겨울날, 효성이 지극한 아들이 몸져누운 어머니를 간호하는데 여념이 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갑자기 송이버섯죽이 먹고 싶다고 하셨다.

엄동설한에 송이버섯을 구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들은 차마 어머니께 버섯이 없다는 소리를 하지 못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마을 뒷산에 올랐다.

나무 밑을 샅샅이 뒤져가며 버섯을 찾기 시작했다.

아들의 정성에 하늘이 감복하였는지 눈 덮인 큰 소나무 밑에서 버섯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들은 버섯을 품안에 넣고 한 걸음에 달려가 어머니께 버섯죽을 끓여드렸다.

그 후 어머니는 점차 원기를 회복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두사충의 7대손인 두한필이다.

 

 

모명재 서쪽으로 1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아담한 효자각이 바로 명정각으로 두한필의 효행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조정에서 내린 정려(충신,효자,열녀 등이 사는 동네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던 일)이다.

두한필이 세상을 떠난 후 조정에서는 이 같은 정려와 함께 종3품에 해당하는 '통훈대부 규장각직각'이란 벼슬을 증직(충신,효자,학식이 높은 사람 등에게 죽은 뒤에 품계,관명 등을 높여주는 일)하고 그의 효행을 기렸다.

 

 

 

■ 두사충 묘

 

 

모명재 옆으로 등산로를 따라 200미터쯤 걸어가면 두사충의 묘가 있다..

 

풍수지리에 밝은 그는 일찍부터 장차 묻힐 곳으로 지금의 고산서당 일대를 잡아 두었다고 한다.

어느 날 그가 미리 보아두었던 묘 터를 아들에게 일러주기 위해 담티 고개에 이르렀으나 너무 몸이 쇠약해 높은 고개를 넘지 못하자 가까운 형봉을 가리키며 ‘저 산 아래 계좌정향(癸坐丁向) 묻어 달라’고 하여 사후 쓴 묘 자리가 지금의 유택이다.

 


(담티 고개에 대해서도 두사충이 노쇠해 담(痰)이 끓어 넘지 못한데서 유래 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대동여지도등의 대장현(大墻峴), 장현(墻峴)이라는 기록과 달구벌(1977년 대구시)의 자료를 보면 당시로서는 높은 담처럼 큰 재이기 때문에 넘지 못한 것을 알 수 있다)

 


저서로 풍수지리서인<모명유결(慕明遺訣)>이 있다.

요즘 풍수지리설이 각광을 받고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박사과정이 개설된 대학도 있는데 두사충의 모명유결을 읽지 않고는 올바른 풍수이론가라 할 수 없다고 할 만큼 내용이 충실하다고 한다.

 

어쨌든 그의 묘는 모명재 뒤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의 후손이 두릉두씨 역시 지금까지 이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두사충의 무덤 근처에는 배롱나무가 심어져있다. 

 

배롱나무

 

 

배롱나무는 꽃이 백일동안 피고 지어 백일홍이라고도 불리며 꽃말은 '떠나는 벗을 그리워하다'로 묘지에 잘 어울리는 나무다.

또한 나무껍질이 얇아 속이 비치는 것처럼 보이는데 삿된 생각을 하지 않고 청렴하게 살겠다는 선비들이 삶의 자세를 상징한다하여 향교나 서원에 많이 심기도 했다.

중국이 원산지로 명나라 장수 두사충은 이 땅의 흙이 되었지만 중국에 뿌리를 둔 배롱나무가 그를 한껏 끌어안으며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주고 있다.

 

호석(護石

능원이나 공신묘의 봉토를 둘러쌓은 돌을 일컫는 말인데, 능원에는 상석과 병풍석으로 쌓여져 있다. 이를 통속적으로는 "도래석"이라 일컬으며, 예장이 아닌 봉분에는 단지 봉토를 보호하기 위하여 막도를 둘러쌓은 경우가 있는데, 이를 사대석이라 일컫는다

 

봉토 앞면 낮은 쪽에 문관석(文官石)과 무관석(武官石)을 각기 1∼2쌍씩 세우고 문무 돌사람[石人] 뒤에는 각각 돌말[石馬]을 하였다

 

무인석 [武人石]

 

 

능(陵) 앞에 세우는 무관(武官)의 형상으로 만든 돌. 제삼단(第三段)의 왼편과 오른편에 각각 하나씩 세운다.

무관석(武官石)무석인 (武石人)장군석 1 (將軍石) 이라고도 한다

 

석마(石馬)

 

 

말의 형상으로 조각된 석상을 일컫는 말이다

 

문인석 [文人石]

문관 형상으로 만들어진 돌. 일반적으로 왕, 왕비의 무덤 앞에 세운다.

문관석 (文官石)문석인 (文石人)이라고도 한다

문인석 가슴에는 "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어 대명제국의 자손임을 표상한다

 

상석(床石)

무덤 앞에 제물을 진설하기 위하여 설치하는 상돌을 일컫는 말인데, 정자각에서 제향을 모시는 능원에서는 혼유석을 따라 설치하지 아니하고 이로써 대신한다

 

혼유석(魂遊石)

상석 뒤 무덤 앞의 놓은 장방형의 작은 돌인데, 영혼이 나와서 놀게 하기 위하여 설치한 것인데 상석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향로석(香爐石)

묘제 때 향로와 향약을 올려놓는 돌로서 마석 앞에 설치하는데, 이를 향안석이라고도 한다

 

준석(樽石)

묘제 때 술통이나 술병을 올려놓기 위하여 향로석 우측에 설치하는 납작한 돌이다

 

신도비(神道碑)

 

 

임금이나 고려시대는 종3품, 조선시대 종2품 이상의 벼슬을 지낸 사람의 무덤이 있는 근처 길가에 세우는 큰 비석으로서, 그 비명(碑銘)은 통정대부(정3품 당상관) 이상의 벼슬을 지낸 사람이 시부(詩賦)의 형식으로 운문(韻文)을 붙여서 찬술하여 세운 비이다.

대개 무덤 동남쪽에 위치하여 남쪽을 향하여 세우는데, 신도(神道)라는 말은 죽은 사람의 묘로(墓路, 즉 신령(神靈)의 길이라는 뜻이다.

두사충의 묘에는 신 구신도비 두개가 있다

 

구 신도비

 

 

■ 두한필의 묘

 

 

 두사충의 묘 바로 아래 위치하고 있다

 

 

■ 두한필의 부인 최씨묘

 

 

모명재와 두사충묘 숲길은 모명재길 1코스 형제봉길 초입과 연결되어 있다.

 

 

◆ 사진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