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化 遺跡 /문화재 유적

달성군 현풍면의 문화재

초암 정만순 2018. 8. 2. 22:09




달성군 현풍면의 문화재

 

1.현풍 석빙고


종 목  보물  제673호 
지 정 일 1980.09.16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현풍면 상리 638 
시 대 조선시대


얼음을 저장하기 위해 돌을 쌓아 만든 창고이다.

 

남북으로 길게 축조되어 있으며, 출입구가 개울을 등진 능선쪽에 마련된 남향구조이다. 돌의 재질은 모두 화강암으로 외부에서 보면 고분처럼 보인다. 입구는 길쭉한 돌을 다듬어 사각의 문틀을 만든 후 외부공기를 막기 위해 돌로 뒷벽을 채웠다. 외부는 돌을 쌓고 점토로 다져서 흙을 쌓아 올렸다. 잘 다듬어진 돌로 벽과 천장을 쌓았는데 천장에는 무지개 모양의 홍예(虹霓)를 4개 틀어올리고 그 사이사이에 길고 큰 돌을 얹어 아치형을 이루게 하였다. 천장에는 통풍을 위한 환기구가 두 군데 설치되었고 빗물에 대비한 뚜껑이 있다. 바닥은 평평한 돌을 깔고 중앙에 배수구를 두었다.

 

당시에는 얼음창고가 마을마다 설치된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규모가 작은 현풍고을에 이러한 석빙고가 만들어진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1982년 석빙고 주위의 보수작업 때 축조년대를 알려주는 건성비가 발견됨으로써 조선 영조 6년(1730)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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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현풍향교 대성전


종 목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7호

지 정 일 1995.05.12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현풍면 상리 326-1 
시 대 조선시대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현풍향교를 처음 지은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옛 교동에 다시 지었고 영조(재위 1724∼1776) 때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지었다. 대성전은 영조 26년(1750)경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로는 대성전, 동무·서무, 명륜당, 동재, 서재 등이다.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하여 중국과 우리나라 유학자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지내는 곳이다.앞면 3칸·옆면 3칸 규모로,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꾸몄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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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현풍곽씨 십이정려각


종 목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9호

지 정 일 1995.05.12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현풍면 지리 1348-2 
시 대 조선시대


현풍 곽씨 집안의 유교 도덕에 기본이 되는 삼강을 지킨 28인의 정려비로, 선조 31년(1598)부터 영조 때(재위 1567∼1608)까지 포상된 12명을 한 곳에 모시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인 삼강을 잘 지키면 이를 국가에서 포상하며 기리도록 하였다. 한 마을의 한 성씨(곽씨)에서 12명의 포상자가 나왔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일로서, 정려를 받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임진왜란 때 안음현감 곽준이 황석산성에서 두 아들과 같이 전사하게 되자 며느리와 출가한 딸이 남편을 따라 자결하였기에 선조가 정려했다.

 

곽재훈의 아들 4형제가 임진왜란 때 병환 중에 있는 아버지를 왜적으로부터 보호하였기에 선조가 정려했다.

 

곽재기의 부인 광주 이씨는 임진왜란 때 왜병을 만나자 순결을 지키기 위해 물에 빠져 죽었기에 선조가 정려했고, 곽홍원의 부인 밀양 박씨는 강도가 들어와 남편을 해치려 하자 죽음으로써 남편을 보호하였기에 현종이 정려했다.

 

곽수영의 부인 안동권씨는 남편이 병으로 위독하게 되자 자신이 대신 죽기를 기원했으나, 남편이 죽게 되자 먹지 않고 따라 죽게 되니 현종이 정려했다.

 

건물은 앞면 12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꾸몄다.

 

정려각 안에는 2개의 비석과 12개의 현판이 있다. 건물과 현판은 최근 것이나, 12정려각은 그 유례가 흔치 않은 것으로 중요한 유산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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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이양서원


종 목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2호

지 정 일 1995.05.12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현풍면 대리 907-3일대 
시 대 조선시대


곽안방·곽지운·곽규 등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으로 곽안방은 조선 세조 9년(1463)에 청렴결백한 관리로 뽑혔다.

 

조선 숙종 33년(1707)에 세운 이 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강당과 외삼문, 관리사만 남기고 철거되었다. 1954년에 제사지내는 곳인 사당을 복원하고 각 건물을 고쳐 세웠으며 1982년에는 동재와 서재를 세웠다.

 

모두 8동의 건물로 이루어졌는데, 사당과 강당을 비롯하여 신문, 읍청루, 고사 등이 있다. 외삼문과 공부하는 곳인 강당을 같은 선상에 두고 왼편과 오른편에 기숙사인 동재·서재를 배치하였다. 강당 오른편에는 청백사로 불리는 사당이 있다.

 

이 서원에서는 해마다 음력 2월과 8월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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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현풍향교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현풍면 상리 326-1
시 대  조선시대


원래 있었던 건물은 임진왜란때 소실되었고, 전후 현감 이영도가 구교동에 중건하였던 것을 영조때 현감을 지낸 김 광태가 지금의 자리로 옮겨 지은 것이다.


그 후 고종 광무5년에 현감 허길이 중수하고, 1931년에 군수 신현구가 다시 대성전, 명륜당 및 동·서무를 중수하였다.


향교는 대지를 3단으로 조성하여 대성전과 명륜당이 축을 이루고 동·서무, 동·서재 등이 조화를 이룬 전학후묘의 기본적인 배치법에 따르고 있다.


대성전(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7호)은 사찰에서 사용된 양각된 연화문이 있는 배례석과 면석 등의 석재로 기단을 구성하고 윗면에는 전을 깔았다. 전면에는 연화문을 새긴 조초석을 사용하였고 후면은 덤벙주초와 탑신석을 주초로 사용하였다. 건물은 기둥 위에만 포를 설치한 주심포계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이다. 건물의 건립년대는 중수상량문에 의하면 1750년대 건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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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소재사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현풍면 용리 4번지 
시 대  신라시대


신라시대에 창건된 사찰로 전해지나, 창건년대 및 창건자는 미상이다.
 

고려 공민왕 7년(1358)에 진보법사가 중창하였고 조선 세조 3년(1457)에 활윤선사가 중건하였으며, 중종 5년(1510)에는 외암선사가, 철종 8년(1857)에는 법노화상이 각각 중수하였으며 1976년 해체 복원된 바 있다. 그리고 사찰 주변에는 부도가, 최근에 조성된 자연휴양림내에는 석탑 3기, 사지 3개소, 석불입상 등 불교 유적이 곳곳에 산재하고 있다.


소재사는 비슬산 남편 중턱에 서향하여 자리잡았는데 경내에는 서향한 대웅전 우측에 북서향으로 명부전이 자리하고 대웅전과 명부전 사이로 산신각이 자리하여 정형적인 배치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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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한훤당 고택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현풍면 지리 1143번지 
시 대  미상


한훤당 김굉필의 11대손인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한 김정재가 1719년 구지면 도동에서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지리는 서흥김씨의 동족부락이 형성되었다. 이 마을명칭은 마을의 형국이 나비처럼 생겨서 마을 앞에 못을 파면 세거할 곳이 되겠다는 말에서 유래하여 못을 파고 못골 또는 지리이라 하였다한다.


마을의 가장 중앙부 우측 산기슭에 남동향으로 자리하고 있는 고택은 서흥 김씨 대종가이며 일명 김굉필의 재청이 있다하여 못골입청이라고도 한다.


본 고택의 공간은 크게 3개영역으로 구분된다. 전면 우측으로 일각문을 낸 김굉필선생의 부조위재청인 광재헌이 자리하고 있으며 우측 뒤편으로 조금 물려 솟을대문을 내고 주거공간이 펼쳐지며 주거공간 뒤편 높은 곳에 사당이 자리하고 있는 제향공간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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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용연재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현풍면 지리 1288번지 
시 대  현대


서흥 김용제와 김영운 양대를 추모하기 위한 재사이나 원래 정면 5간 측면 1간반 규모로 전퇴간을 둔 중당협실형 평면에 박공지붕 건물이었으나 최근 현재와 같이 개축되었다.


그러나 문의 높이가 높고 벽체도 시멘트몰탈로 마감되어 옛 맛은 반감되었다. 정면만 원주를 사용하였고 기둥상부는 살미를 두지 않은 무익공 소로수장으로 처리하였다. 그리고 상부구조는 원형판대공으로 종도리를 받게 한 간결한 5량가구이며 지붕은 양 측면에 합각을 둔 팔작지붕이다.


마을 초입부에 남동향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재의 출입문인 평삼문을 두고 주변은 방형 시멘트담장을 돌렸다. 어칸과 좌협칸에 걸쳐 마루를 두고 좌측에 1칸 온돌방을, 우측으로 별실로 구획된 온돌방 2칸을 설치하였으며 전퇴칸을 둔 중당협실형의 평면을 지니고 있다. 온돌방 정면문은 하부에 궁판을 끼운 띠살문을 설치하고 마루 뒤편에는 쌍여닫이 골판문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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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유연재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현풍면 대리 713번지 
시 대  일제강점기


현풍곽씨 곽삼길선생과 곽수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재사로 솔례마을 뒷편 산기슭에 남향하여 자리잡고 있다.


재실의 배치는 남향으로 자리한 재실과 대향하여 출입문인 솟을삼문이 자리하고 재실 전면 우측에 관리사를 두면서 주변은 한식 토석담장을 둘러 일곽을 형성하고 있다. 기단은 99년 개축하면서 화강석 판석과 탱주를 세우고 상부에 얇은 갑석(甲石)을 두른 후 난간을 세운 일종 가구식 기단을 만들었다. 그리고 가운데에 석계를 설치한 후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중당협실형의 평면을 앉혔다. 가운데 2칸 마루를 두고 좌우에 정면 1칸 측면 1칸반 정도의 온돌방을 배치하고 앞쪽에 4칸에 걸친 퇴칸을 두었다.

 

또한 양쪽 온돌방 뒤편에 벽장을 두었고 마루 뒤편에는 퇴를 두었다. 정면에만 원기둥을 세우고 마루 상부 대량은 전후를 건너지르는 통재를 얹었고 온돌방 부분은 퇴량과 대량이 내진주 위에서 합보시켰다.


상부구조는 장식하지 않은 납도리 3량가구이며 마루부분은 제형판대공을 세우고 방 부분은 동자주대공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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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추보당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현풍면 대리 667-2번지 
시 대  조선시대


추보당은 청백리 곽안방의 제청으로 솔예마을의 뒤편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곽안방의 자는 여주이고 본관은 포산이다.


시조 곽경의 12대손으로 한훤당 김굉필과 함께 점필재 김종직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좌익공신 원종이등훈에 녹선되었고 청백리로서 국승에 올랐다.

추보당 정면에 「포산고가」라는 편액이 걸려있고 대청에는 「추보당」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솔례마을 뒤편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본 당은 주변에 담장이나 출입문을 두지 않고 당으로 오르는 계단만 설치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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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추원당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현풍면 지리 722-1번지
시 대  현대


곽순종을 위한 재사로 포산사 바로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곽순종(1438-1458)은 자를 이원이라 하고 1454년(단종 2) 무과에 급제하였다. 세종 때 진주목사, 안주목사 등을 거쳐 훈련원판사가 되었다. 나라의 부름을 받고 서울로 가던 중 개령역관에서 죽었고 포산사에 배향되어 있다.


곽안방을 모신 추보당과 거의 동일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당으로 들 수 있는 대문채는 별도로 두지 않고 계단을 두고 담장을 둘린 방형 대지 안에 남동향으로 당이 자리하고 있다. 추보당보다 1칸이 적은 정면 4칸 측면 1칸반 규모의 건물이며 평면은 중당협실형이다. 다만 추보당과의 차이점은 마루와 방사이에 분합문을 설치한 점과 상부구조가 3량이며 종도리 하부에 뜬장여를 설치한 점 외에는 동일하나 일식기와를 얹고 회분벽하여 전통적인 맛은 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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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포산사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현풍면 지리 751번지 
시 대  현대


포산사는 원당마을 뒷산인 대니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배향인물은 1123년(인종 1) 송나라에서 고려에 귀화하여 문하시중평장사를 지낸 시조 정의공 곽경(1117-1179)을 비롯하여 이부상서 포산백 곽기정, 병부상서 정간공 곽한정, 교위공 곽자의, 진주․안주목사 및 훈련원판사를 역임한 목사공 곽순종 등 5위를 봉안하고 매년 음력 정월 초엿새날 유림봉사하고 있다.


정의공 곽경은 호를 암곡이라 하며 송나라 관서인 홍농인으로 문연각의 한림학사로서 7명의 학사들과 함께 고려 인종 11년(1133) 고려에 입국하였다. 인종 16년(1138)에 과거에 급제하여 문하성의 최고관직인 문하시중평장사에 이르렀고, 금자광록대부의 작위와 포산군에 봉해짐에 따라 본관을 포산으로 하였다. 조선조에 이르러 포산현이 현풍현으로 개편됨에 따라 현풍으로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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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자모리 모원재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현풍면 자모리 268번지 
시 대  조선시대


증 가선대부 차순라를 추모하기 위해 1905년 9월 25일 건립한 재사이다.

대부분 연안차씨들이 모여 사는 자모리 회나무 옆 이 마을의 구심점이 되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서향한 대문채를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모원재는 남향하여 자리잡고 있다. 재는 가운데 2간 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 1간씩을 들인 평면으로 앞쪽으로 퇴칸을 설치하고 양 측면과 배면에 퇴를 덧 붙였다. 그리고 온돌방 뒤편에 벽장을 설치하고 마루와 온돌방과는 모두 4분합 들어열개문을 달아 4간을 하나의 공간으로 확장할 수 있도록 하였다. 온돌방 전면은 문지방 아래에 머름을 두고 쌍여닫이 띠살문을, 마루 뒤편 역시 온돌방과 마찬가지로 머름을 두고 골판벽에 쌍여닫이 골판문을 설치하였다.


기단은 외부노출면을 다듬질한 돌로 축조한 후 정형주초를 놓고 기둥을 세웠는데 정면에만 원기둥을 사용하고 그 외는 모두 네모기둥을 사용하였다.


상부구조는 대량 위에 동자주를 세워 종량을 받게 한 후 원형판대공을 세운 건실한 5량가구이며 주간사이에는 창방 위에 소로를 넣어 처마도리 장여를 받게 한 소로수장 굴도리집이다.


벽체는 회분벽하고 목부에 니스칠하여 깨끗하다. 대문채는 가운데 대문간을 두고 좌우에 방을 넣은 3량구조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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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공신정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현풍면 성하리 275번지 
시 대  현대


영월 엄씨의 재사이다. 현풍에 입향한 엄씨의 시조는 엄계이며, 엄계의 부친인 통정대부행이조참의 엄산수가 성종 때 폐비사건에 연루되어 연산군에 의해 유배될 때 장남인 계도 현풍으로 낙남하게 된다. 현풍 성하 수문리에 살면서 현 공신정 자리에 설단하여 조석으로 북향재배하다가 연산군 말년인 병인년에 사사되었다.


그 유지에 후손들이 약 400년 전에 공신정을 건립하였으나 없어지고 1978년에 중건하고 1989년에 중수한 바 있다.

 
육각형 대지 위에 공신정이 가운데 북동향으로 자리하고 전면 우측에 관리사가 동향하고 있다. 그리고 정과 대향하여 출입문이 있는 대문채가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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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월계정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현풍면 지리 803번지 
시 대 일제강점기


월계정은 포산곽씨 27세손 휘 기연선생과, 휘 기준선생 두 형제분이 강학을 했던 장소로서 1925년 창건하였으나 6.25동란으로 소실되었고, 현재의 건물은 1976년 중건한 건물로 3단의 기단위에 정면 3칸 측면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을 이어 좌우칸에 방을 들이고 중앙에 마루를 들인 형식의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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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임서정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현풍면 지리 621 
시 대  현대


포산곽씨 복사공파 문중의 휘 기영 호 신고 어른이 서당으로 사용하기위해 1946년에 건립한 건물로써 정면3칸, 측면2칸반에 기억자 형식으로 된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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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16. 18: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