遠願寺址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모화리 14
대한불교천태종에 속한다.
옛 절터 밑에 새로 지은 소규모의 사찰이 있다.
신라 신인종(神印宗)의 개조(開祖)인 명랑법사(明朗法師)가 세운 금광사(金光寺)와 더불어 통일신라시대에 있어서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의 중심도량이 되었던 사찰이다.
명랑의 후계자인 안혜(安惠)·낭융(朗融) 등과 김유신(金庾信)·김의원(金義元)·김술종(金述宗) 등 국사를 논의하던 중요한 인물들이 함께 뜻을 모아 세운 호국사찰이다.
창건 이후의 역사 및 폐사시기 등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4대덕(四大德)인 안혜·낭융·광학(廣學)·대연(大緣)의 유골이 모두 절의 동쪽 봉우리에 묻혔기 때문에 사령산조사암(四靈山祖師巖)이라 하였다고 한다.
현재는 부도(浮屠) 4기와 동·서 삼층석탑이 남아 있다.
이 탑은 일반적인 신라의 탑들에 비하여 탑신이 가늘어 가냘픈 느낌이 들지만, 이러한 약점을 탑에 조각된 사천왕상과 12지신 상이 보강해주고 있다.
비교적 크고 안정된 이중기단은 상층기단의 12지신 상 조각을 위한 것이다.
이 탑은 1933년에 도괴되었던 것을 일본인이 복원하여 세워놓은 것이다.
또한, 석탑의 동북쪽 500m 거리에 부도 3기가 있고, 서북쪽 300m 지점에 최근 발견된 1기의 부도가 있다.
이들은 모두 고려 이후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 가운데 서북쪽의 부도는 원좌(圓座)내에 범자삼자(梵字三字)를 새겨놓았고, 연화문 등의 조각이 다른 부도와는 구별되는 독특한 조형미가 있다.
옛 절터는 사적 제46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주에서 토함산 서쪽 편을 따라 울산에 이르는 길은 신라시대부터 오가던 매우 중요한 고대 교통로의 하나이다.
당시 무역항이었던 울산 개운포를 통해 들어온 중국과 서역의 문물이 이 길을 따라 수도인 경주로 유입되었다.
동시에 이 길은 왜구들의 주요 침입 루트였으므로 관문성 등 국방 유적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사실은 경주부터 사천왕사지, 망덕사지, 이거사지(移車寺址), 불국사, 감산사지, 숭복사지(崇福寺址) 등 신라시대의
주요한 사찰들이 이 길을 따라 세워졌다는 사실이다.
원원사지는 이들 절 가운데 경주와 울산을 잇는 경계 지점에 위치해 있다.
봉서산과 삼태봉 사이에는 신라 문무왕 때 창건된 원원사(遠願寺)라는 절이 있다.
이 절은 통일신라 때부터 호국사찰로 자리매김했다.
삼국유사 등에 기록된 원원사 창건 이야기만 봐도 그렇다.
이 절은 신라의 삼국통일을 이룩한 김유신이 신라 신인종의 창시자인 명랑법사의 후예인 안혜 남융 등과 함께 창건했는데,
그 목적이 실은 신라의 수도였던 서라벌을 지키는 숨겨진 병영 기지화였다고 한다.
계곡 깊숙한 곳에 자리한 지리적 이점 때문에 서라벌의 관문이었던 관문성(일명 만리성)을 내려다볼 수 있고,
반대로 관문성에서는 이 절이 보이지 않으니 천혜의 전진기지였던 셈이다.
병사들이 일부러 머리를 깎고 승려로 변장해 이 절에 머물렀다고 한다.
절 이름도 '신라의 영원한 번영을 바란다'는 뜻이 담겨 있다.
또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는 경주 일대의 의병장과 승병장들이 이 절에 모여 작전회의를 하고,
동래를 거쳐 경주로 진격하던 왜군과의 일전을 벌여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현재의 천불보전 뒤 언덕은 옛 금당터인데 그 앞에 삼층석탑이 동서 쌍탑 형태로 버티고 서 있다.
보물 제1429호인 원원사지 삼층석탑은 기단부에 12지신을 양각하고 그 위에는 4천왕상을 새겼는데
그 기법과 솜씨가 빼어나기로 명성이 높다.
한편 모화리는 신라 때부터 서라벌의 관문 역할을 한 마을이다.
털 모(毛)자에 불 화(火)자를 쓰며, 도성 전체가 불국토나 마찬가지였던 서라벌에 들어가려던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머리를 깎았고 그 머리털을 태운 곳이라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지금은 머리털 대신 소고기를 굽는 모화숯불단지가 유명하다
.-국제신문 발췌
절 입구 좌우에서 금강력사가 절을 지키고 있었다
사천왕상이 석불로 세워져 있는 것도 특이하다
절이 천년고찰 답게 위엄을 지니고 있으며
전체적인 분위기가 고즈넉하고 아담하다.
절의 배치도 짜임새가 있어 소란스럽지 않다.
절 뒤편에서 절의 배치와 앞산을 바라보면
아주 아늑하게 느껴진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원원사는 신인종(神印宗) 승려인 안혜(安惠), 낭융(朗融) 등과 김유신(金庾信), 김의원(金義元), 김술종(金述宗) 등 당시 주요한 인물들이 함께 뜻을 모아 세운 호국사찰이다.
신인종은 명랑법사(明朗法師)가 중국에서 돌아와 신라에 전한 밀교(密敎)의 일파로 명랑법사는 문무왕의 청으로 사천왕사에서 당나라 군사를 물리치기 위한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을 행하여 호국불교의 선봉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경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자리한 원원사 역시 이러한 문두루비법을 통하여 외적을 물리치고자 했던 호국사찰의 성격을 띠고 있다.
이를 증명하는 흔적이 석탑에 남아 있다.
원원사지석탑은 신라 석탑을 통틀어 1층탑신에 사천왕상이 등장하는 가장 오래된 석탑이다.
사천왕상은 호국적 성격의 사찰에 이미 등장하고 있었는데, 예를 들면 사천왕사는 목탑 내부 사천주에 흙으로 구워 만든 사천왕상을 봉안하였고, 감은사의 경우에는 탑 사리기 외함(外函)에 사천왕상을 만들어 부착했다.
사천왕사지 목탑에 나타나는 사천왕상은 목탑 내부 사천주 사방에 배치되어 사방신(四方神)의 성격을 띠는데 이러한 구조가 석탑화되었을 때 사천왕상은 필연적으로 1층탑신 사면에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때 사리공도 1층탑신에 위치한다.
원원사지석탑도 이와 마찬가지로 1층탑신에 사리공이 있다.
이와 같이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사천왕상은 우리나라 탑의 구조적 측면에서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통일신라 석탑에서 창안된 것이었다.
사천왕은 본래 수미산 중턱에 위치한 사천왕천에 거주하면서 동·서·남·북을 지키는 신장(神將)이다.
그들은 항상 갑옷을 입고 있으며 손에는 각종 무기로 무장하고 발로 악귀를 밟아 항복시키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사천왕상이 들고 있는 지물이나 형상에 대해서는 정해진 바 없다.
그러나 다만 북쪽을 지키는 다문천왕(多聞天王)은 반드시 탑을 들고 있어 사천왕을 살피는 데 하나의 기준이 된다.
그 밖의 천왕들은 칼이나 창, 보주, 금강저(金剛杵) 등을 들고 있는데 일정하지 않다.
삼국시대부터 신라에서는 신라 땅이 바로 부처님 땅이라는 불국토사상(佛國土思想)이 팽배해 있었다.
그러므로 부처님 땅을 지키는 사천왕이 곳곳에 등장하는 것은 자연스런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탑의 구조에 있어서 사천왕은 부처님의 사리(진리)를 지키는 호법(護法)의 개념과 더 나아가 부처님 땅인 나라를 지키는 호국의 개념으로 자연스럽게 확대되어갔던 것이다.
원원사지석탑에 부조되어 있는 사천왕상은 그 자체로는 1층탑신 사면에 부조된 조각상에 불과하지만 실제로는 석탑은 물론이요, 신라 땅 전체를 수호하는 매우 드넓은 공간 개념 속에서 성립된 것이다.
사천왕상을 호법과 호국이라는 동시 개념에서 확대·발전시킨 나라가 또 있었을까.
중국의 거대한 전탑이나 일본 목탑의 스케일에 비교할 수는 없지만 긴 세월 속에서 전개되어온 우리나라 탑의 상징성은 이러한 독창적 창안과 작은 공간 개념에 적합하게 발전되어왔다.
원원사지석탑의 사천왕상은 통일신라시대 사천왕상 가운데 가장 고부조로 거의 원각에 가까워 마치 탑에서 걸어나올 듯하다.
그래서인지 일부 상들은 이미 떨어져 결실되었다.
사천왕상은 소형임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강력한 힘과 안정적인 균형 감각을 가지고 있으며 발에는 두 악귀를 밟고 있다(통일 초기에만 악귀가 둘이고 차츰 하나로 남다가 통일 말기에는 아예 생략되어버린다).
원원사지석탑 사천왕상이 갖는 호국적이며 방위신적인 개념은 기단부에 새겨진 십이지상에서 보다 구체화되어 나타난다.
상층기단은 두 개의 안기둥으로 자연스럽게 마련된 면석에 세 구씩 네 면 총 12면에 각각 십이지상을 새길 수 있었다.
1층의 사천왕이 갑옷을 입고 있는 것에 반하여 십이지상은 천의(天衣)를 흩날리는 평복을 입은 채 다소곳이 앉아 있다.
상층기단 십이지신상상층기단을 두 개의 안기둥으로 분리하여 마련된 세 개의 면석에 네면 총 12구의 십이지상을 자연스럽게 안치할 수 있었다. 십이지상은 평복을 입은 채 다소곳이 앉아 있으나 흩날리는 천의를 통하여 동적인 모습으로 변모한다.
탑 표면에 새겨진 부조상을 제외하더라도 원원사지석탑은 비슷한 시기의 다른 석탑에서 나타나지 않는 큰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상층기단부의 경우 일반적으로 네 매의 넓은 판석으로 결구되는 것에 비하여 원원사지석탑은 네 모서리를 'ㄴ'자형 돌로 결구하고 중앙에 한 매의 면석을 끼워넣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이는 다른 석탑에서는 볼 수 없는 원원사지석탑만이 갖는 결구 방식이다.
이것이 십이지상을 조각하는 것과 연관이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구조상으로 볼 때 상층기단 네 모서리의 구조를 강화시켜 상층으로부터 받는 무게에 보다 안정적일 수 있다.
『동경잡기』에 의하면, 원원사는 인조 8년(1630)에 중수되었고, 효종 7년(1656)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중건되었다고 하였다. 또한 18세기 후반 불국사 중창 공사에 원원사의 스님이 시주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적어도 1700년대 후반까지는 법등이 이어졌다고 생각된다.
이를 증명하듯이 절터 동북쪽으로 300여 미터 되는 지점에 조선후기 부도가 남아 있다.
그 이후 절이 폐사된 것으로 추측되는데 어떠한 이유에서인지는 알 수 없다.
더구나 2기의 석탑은 1900년대를 전후한 시기에 금당지 앞에 무덤을 쓰면서 탑이 무너진 채로 방치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발간된 책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석탑의 복원 연대에 대하여 1932년 혹은 1933년으로 잘못 기록하고 있는 것이 많으나
1930년 교토(京都)제국대학의 노세 우시조오(能勢丑三)가 조선총독부에 건의하여 1931년 가을 경주고적보존회에서 노세의 제도(製圖)로 탑을 복원하였다.
삼국유사에는 "신라의 동남 쪽 20여리 되는 곳에 원원사가 있는데 세상에 전하기로는 안혜 등 4대덕(안혜,낭융,광학,대연)과 김유신,김의원,김술종 등이 함께 소원을 빌려고 지은 것이다.
4대덕의 유골이 모두 이 절의 동쪽 봉우리에 묻혀 있기 때문에 이것을 사령산(四靈山) 조사암이라 하였다"고 적어놓았다.
여기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인물이 보인다.
삼국통일의 주역 김유신. 그리고 김유신의 부사(副師)가 되어 삼국통일에 큰 공을 세운 죽지랑은 김술종의 아들이다.
나머지 스님들도 나라가 위급할 때 문두루 비법으로 적을 물리친 명랑법사로 대표되는 밀교의 후계자로 서로의 공통점은 신분을 떠나 나라 위한 일편단심으로 힘을 합쳤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무엇을 염원하며 빌었을까. 통일의 영광과 글자 그대로 영원히 변치 않는 신라의 번영을 빌었을 것이다.
# 설렘은 끝이 없고
지금은 원원사 절 밑에 모화 암소 불고기단지가 생기고 새 길도 나 있지만 나는 옛길을 택해 갔다. 제일 먼저 250여년이 되었다는 귀티 나는 회화나무가 이 나그네를 반겨준다.
집들도 개조하여 옛 맛은 많이 사라졌지만 아직도 남아있는 돌담길을 돌아서는 돌담장은 아련한 옛 그리움을 애잔하게 움켜쥐고 있는 듯하여 마음이 아렸다. 마을 들머리에 있는 수용소 같은 흉물스러운 연립아파트 건물도 70~80년대 섬유산업이 전성기일 때 이웃의 태화방직 여공들의 숙소였다. 섬유산업이 사양길로 접어들어 공장도 문을 닫았지만 강 건너 공장 굴뚝의 시커먼 연기에 핑크빛 꿈을 안고 시골의 부모형제를 떠나온 어린 여공들의 삶의 애환이 묻어나는 듯하여 슬픔이 울컥했다. 마을과 붙어 있는 불고기단지가 끝나자 원원사(1.5㎞) 팻말에서부터 마사흙길이 여인의 백옥 살결처럼 부드럽게 깔려 있었다. 차도 못 다니던 옛길은 넓어졌지만 참으로 많이도 설레며 가슴 벅차게 걸어왔고,또 얼마나 많은 아름다운 사람들을 데리고 왔던가.
조금 오르자 옮겨 복원해 놓은 '제철유구'가 휑 하니 놓여 있었다. 대한민국 어디나 마찬가지로 찜질방,식당은 절 입구까지 점령했다. 그래도 산은 말없이 붉음을 토해내고 침묵으로 울고 있었다. 가파른 경사길의 절 입구에는 조잡한 금강역사상을,앞마당 입구에도 어울리지 않는 사천왕상을 감동 없이 세워놓았다. 얼른 빨리 침묵의 감동을 안겨주는 원원사 절터를 올랐다.
내 키보다 큰 선돌이 빙그레 미소를 짓고 가파른 층계가 신라의 흔적을 안고 있었다. 정교하지 않은 신라 석축이 완벽한 수도풍의 세련미가 아닌 소박한 지방미를 흘리고 있어 오히려 마음이 편안했다. 층계를 다 오르자 이 아름다움을 내 가슴에 다 담을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미어터졌다. 입구의 아름드리 소나무는 세련 우아한 탑을 호위하면서 자신의 준수한 S라인의 미끈함을 드러내고,건물 잃은 금당 터는 짙은 소나무 숲을 이루었고,떨어진 낙엽은 발길에 쌓이고,계곡의 물소리는 바람에 실려 오고,상처 입은 석탑은 원망 없이 허공을 울리고,머리 잃은 석등은 침묵의 불을 밝혀,신라의 향기는 그칠 줄 모르고,해는 서산에 넘어가는데…. 흐르는 이 아름다움을 어찌 할까,어찌 할까…. 아! 가슴 아련히 저미어 오는 말 못할 아름다움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여전히 은행잎은 노랗게 물들어 가을은 깊어만 가는데 나는 혼자서 고요한 격정의 감동을 안고 있다.
# 슬픈 아름다움은 산천을 울리고
나는 먹이를 찾는 하이에나처럼 아름다운 감동의 먹이를 찾아 이리저리 오가며 흥분하고 있었다.
서쪽 저기쯤 건물 속에 신라 우물은 여전히 퐁퐁 솟는 물소리를 내는데 예전에 없던 자물통을 굳게 채워 놓았다. 얕은 홈 두 개를 파서 찌꺼기를 거르고 10m쯤 떨어진 곳에는 그 맑은 물을 담는 큰 수조가 아름다움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다시 주인공 석탑에 갔다. 살결 고운 동탑보다 서탑은 피부색이 안 좋은 것도 서러운데 얼마나 모진 수난을 당했기에 깨어지고 살점까지 떨어지는 아픔을 당했을까. 호국의 염원으로 세운 이 절이 일본의 침략에 의한 임진왜란으로 불타고 언제 다시 지었는지 모르지만,숭정(崇禎) 경오년(인조8년,1630년)에 중수기록이 나오고 27년 뒤인 병신년(효종7년,1656)에 화재로 불탔다고 '동경잡기'에 기록해 놓았다. 아마 이 이후로 폐사가 되었다가 80년 전인 1927년 일제강점기에 불국사에서 여관업을 하던 일본사람 스기야마(杉山)에 의해 알려지게 되었다. 1930년 800원의 예산으로 이 폐사의 동 서탑을 복원하자고 사람들이 조선총독부에 건의서 제출하였고 다음해 가을에 경도제국대학(京都帝國大學)공학부 건축학교실 능세축삼(能勢丑三) 조수가 복원한 것을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다. 절터는 다 명당인 줄 알고 무슨 복을 받겠다고 금당과 석탑 삼각형의 중간에 묘를 쓰고 이 아름다운 탑들을 무너뜨려 아래로 굴려 버렸었을까. 남을 해치고 자기만 잘 되면 무에 그리 좋을까. 착한 사람에게는 선과 복을 주고,악한 사람에게는 악과 벌을 준다는 1층 탑신에 있는 동쪽 지국천이 자기의 역할을 했을까. 이 묘를 쓴 후손은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다 한다. 절세의 미인은 가까이서도 예쁘듯이 1층 탑신에 있는 사천왕상은 가까이 갈수록 짜릿한 울림을 준다. 어쩜 저리도 잘 새겼을까. 동·서탑의 형식은 같으나 새긴 조각과 피부가 동탑이 더 준수하여 서탑은 은근슬쩍 보고 동탑은 아예 뚫어지게 보고 또 보면서 하얀 종이 위를 까만 먹물로 채워가고 있었다,
# 명작을 보고 또 보고
신라 사천왕상 가운데 가장 우수한 작품을 아무도 없이 혼자서 볼 수 있는 나는 행복했다. 약사불의 권속인 12지신상은 한 면에 각각 3개를 새겼는데 얼마나 편안하게 지키는지 전부 다 앉아 있다. 얼굴은 짐승이라도 몸은 사람 복장을 하고 마치 앉아서 상모 돌리는 듯한 율동감을 준다. 그런데 북쪽에서 시작하는 쥐부터 전부 얼굴을 우측으로 돌렸는데 옆에 있는 소만 왼쪽으로 돌려 서로 마주보고 있다. 그 위에는 아주 준수한 사천왕상을 새겼는데 나쁜 것을 없애주고 착한 일을 권장한다는 동쪽 지국천은 오른쪽 얼굴 3분의 1이 날아가 버려도 원망 없이 입을 다물고 있다. 높은 안목으로 중생에게 이익을 준다는 서쪽 광목천은 약간 통통하지만 애교 부리듯,어리광 부리는 순박한 모습으로 얌전히 서 있다. 남의 증장천은 없어졌는데 얼마나 예뻤으면 동·서탑의 것을 다 떼어가 버렸을까. 중생의 이익을 증대시킨다는 이걸 떼어갔으니 우리 모두 살아가기가 이렇게 힘이 들구나. 그래도 용케 어둠 속에 방황하는 중생을 제도하는 북의 다문천이 오른쪽 무릎 아래는 떨어져 나가도 바람 부는 삭풍을 온몸으로 견디며 어리석은 우리들을 지켜주고 있구나. 서탑의 지국천은 왼쪽 눈과 머리가 잘려나가 복수의 칼을 뺄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 듯하다. 서의 광목천은 머리만 날아갔고,남의 증장천은 몽땅 떼어갔고 북의 다문천은 왼쪽 눈이 애꾸 같이 뻥 뚫려 허공만 응시하고 있었다.
어둠은 순식간에 달려와 소나무 사이로 저 멀리 도시의 욕망의 불은 반짝이고 솔바람은 온몸으로 울고 동쪽 골짜기의 물 흐르는 소리는 내 가슴으로 흐른다. 여전히 살결 고운 동탑은 살결 하얀 미인 같아 어둠이 짙게 엄습해 와도 나는 떠날 줄 모르고 내 현실의 슬픔에 울먹이며 높은 안목 있다면 나의 소원도 들어달라고 수더분한 광목천께 하염없이 빌고 빌었다. 짙은 구름에 별도 달도 없는 하늘이 나와 같이 슬픈 아름다움에 울먹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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