雲水 天下/나는 자연인이다

우리땅 영지 순례 - 금곡산 금곡사

초암 정만순 2021. 3. 21. 16:01

우리땅 영지 순례 -

금곡산(삼기산) 금곡사

 

 

♣순례일 :

2021. 11. 04 (목) 맑음

 

♣순례자 : 

초암 단독행

 

 

 

 

■ 삼기산(금곡산)

 

 

삼기산은 경주 안강읍 두류리, 검단리와 현곡면 내태리, 무과리에 걸쳐 있는 해발 524m의 산이다.

늙은 여우 귀신이 원광법사에게 자신의 팔뚝을 보여줬다고 해서 비장산이라고도 한다.

지금은 금곡사가 있는 산이라고 해서 금곡산라고 부른다.

원광법사의 족적은 삼기산 금곡사지에 뚜렷하다.

 

 

원광과 밀본이 수행하던 고찰 금곡사

 

금곡사 터는 금계포란형의 명당으로 참으로 아늑하고도 푸근하다

금곡산과 금욕산이 어머니의 품처름 안아주니 길지임에 틀림이 없다

 

 

창건연대는 미상이나 신라시대에 원광(圓光)이 수행하던 사찰이다.

원광은 30세부터 4년 동안 이 절에서 수행하였고, 산신의 권유에 따라 중국에 유학하였다.

귀국한 뒤에도 원광은 이 절에 머물렀는데 뒷날 그의 부도를 이곳에 세웠다 한다.

선덕여왕 때에는 밀본(密本)이 머물렀다고 하나, 그 뒤의 자세한 사적은 전하지 않는다.

이 절은 조선 후기까지 존립하였으나 6ㆍ25때 폐허가 되었던 것을 정효각(鄭曉覺)이 인법당(人法堂)을 중건하고 ‘백련암(白蓮庵)’이라 개칭하하였고 그뒤 금곡사로 재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절터에는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97호로 지정된 금곡사지원광법사부도탑이 있다.

 

그외 당우들은 근세에 건립된 겄이다

 

 

원광국사 부도탑

 

금곡사의 자랑거리는 단연 원광법사부도탑이다

 

약사전 앞마당에 원광법사부도탑이 있다.

부도는 신라시대의 삼층석탑 형태를 갖추고 있다.

부도를 탑 형식으로 으로 만든 경우는 희귀하다.

 

 

부도는 부서진 채 일부만 남아있던 것을 최근에 복원했다.

널따란 바닥돌을 깔고 높은 1층 기단에 3층의 탑신을 올려놓았다.

1층 몸돌과 3층 지붕돌만 원래의 것이고 나머지는 짜 맞췄다.

탑신의 1층 몸돌은 네 면마다 문 모양의 무늬를 새기고 그 안을 파내어 불상을 도드라지게 새겨 두었다.

통일신라 이전에 세운 것이다.

 

 

원광법사는 진평왕의 49년에 병환이 난 지 7일 만에 맑고 간절한 마지막 교훈을 남기고 단정히 앉아 그 자리에서 세상을 마쳤다. 춘추는 99세였다.

황룡사 동북쪽 허공에 음악소리가 가득하고 이상한 향기가 절을 채웠으므로, 온 나라 사람들이 슬퍼하면서도 경사로 여겼다.

장례의 도구와 의식은 왕의 장례와 같이 하였다.

명활산(明活山)에서 장사지내고, 삼기산 금곡사(金谷寺)에 부도(浮屠)가 세워졌다.

 

처음 출가한 삼기산에서 홀로 수행한 뒤 죽어서도 삼기산 금곡사에 묻혔으니 생사일지요 수구초심이다.

삼기산 금곡사에 원광법사의 부도탑이 있는 까닭이다.

 

 

 약사전

 

약사전이 금곡사의 큰 법당 격이다

 

 

 삼성각

 

 

사찰에서 산신·칠성·독성을 함께 봉안하는 불교건축물이다

삼성은 각각 재물과 수명과 복을 관장하는 존재로서, 전통신앙인 삼신신앙(三神信仰)과의 습합현상을 살필 수 있게 된다.

 

일반적으로 칠성은 북두칠성을 말하는데, 별나라의 주군(主君)으로 인간의 복과 수명을 담당하고 있다고 한다.

나반존자(那畔尊者)라고도 불리는 독성은 십이인연(十二因緣)의 이치를 홀로 깨달아서 성인의 위치에 올라 말세 중생에게 복을 내린다고 한다.

또, 사찰에 따라서는 독성과 산신과 용왕을 봉안하는 경우도 있다.

이들은 모두 불교 밖에서 유입된 신들로서, 하근기(下根機) 중생을 위한 방편으로 채택되었기 때문에, 그 건물의 이름을 전(殿)이라 하지 않고 각(閣)으로 일컬은 것이다.

 

든 건물의 문이 잠겨있어 내부를 관찰하지는 못했다

아마 주지 스님이 출타 중인겄 같다

 

삼성각 좌측으로는 거목인 느티나무기 삼성각을 호위하듯 서있고

 

우측에는 어린 동백나무 두 그루가 있는데 꽃망울을 맺고있다

그런데 한그루 마다 한송이의 꽃이 탐스럽게 피어있어 나를 반기는 듯 하다

혹시 가화인가 하여 만져보니 진짜꽃 이네

 

 

 나한전

 

 

나한전 뒤에는 용왕단과 장수거북이 있다

 

 

 

◆ 금곡사로 들어가는 길목의 화산곡지

 

 

화산곡지에서 금곡사 까지의 골짜기를 화산곡이라 하는데 이른봄에 피는 변산바람꽃과 복수초의 자생지로 유명하다

 

 

 

◆ 원광법사 (圓光法師)

 

삼국통일의 정신적 지주인 원광법사, 세속오계를 전수하다

 

 

금곡사에서 벌어진 원광법사와 검은 여우의 인연담

 

 

삼기산(금곡산) 여우신의 도움으로 중국에 유학을 갔고, 돌아와서는 윤회전생에서 서로 구제하자[生生相濟]는 약속을 했던 신라 진평왕 때의 고승 원광법사와 관련된 설화인데 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고본수이전(古本殊異傳)』에 따르면, 원광법사의 속성은 설씨(薛氏)이고 왕경(지금의 경주)사람이다

처음에 승려가 되어 불법을 배우다가 30세가 되어 조용히 거처하며 도를 닦고자 하여 홀로 삼기산에서 살았다

한 비구가 근처에 와서 난야를 깃고 수도하였다.

 

스님이 밤에 염송하고 앉아 있었더니 한 신이 불러 말하기를 "장하십니다. 무릇 수행하는 사람이 많다고 하더라도 법사보다 뛰어난 이는 없습니다. 지금 저 비구는 지름길로 주술을 닦고 있지만, 다만 당신의 깨끗한 생각을 괴롭히고 내가 가는 길의 장애가 될 뿐 아무 소득이 없으므로, 매양 지날 때마다 몇 번이나 악심을 내었습니다. "바라옵건대 스님은 타일러 이곳을 옮겨 가게 해주십시오. 만일 그렇게 하지 않고 오래 머물러 있으면 반드시 근심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는 삼기산 신의 부탁을 듣고 주술을 연마하는 중에게 자리를 옮기도록 권했다.

중이 원광의 말을 무시하니 신이 산을 무너뜨려 중이 거하는 난야(절)를 무너뜨렸다.

 

신은 원광에게 중국 유학을 권했고 가는 데 필요한 계책을 자세하게 일러 주었으며, 윤회전생에서 서로 구제하자는 약속을 맺었다.

원광이 신의 모습을 보여 달라고 하니 커다란 팔뚝을 보여 주었는데, 마지막 죽는 순간에 가서야 그 신이 검고 늙은 여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를 불교와 토착신앙과의 관계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분석할 수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불교설화 중에는 토착신앙과 날카로운 대립뿐만 아니라 불교 우위의 관점에서 토착신앙과 우호적인 관계를 나타내는 예도 있다.

후자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원광서학> 조이다.

삼기산의 신은 원광의 중국 유학을 돕고 그와 윤회전생에서 서로 구제하자는 약속을 했다.

그러나 서사가 진행되면서 토착신격인 삼기산 신과 불승인 원광의 위상은 역전된다.

신은 자신의 신술이 으뜸이고 미래를 예측하며 천하의 일을 통달하고 있다고 자랑하지만, 결국 자신도 죽음이라는 무상의 해를 극복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는 목소리나 위력으로 현현하다가 커다란 팔뚝으로 형상화되고 최후에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죽어가는 검은 여우로 정체를 드러낸다.

소리 말고는 그 존재를 파악할 수 없는 절대적 존재였다가 차츰 원광에게 모습을 드러내고 마침내 나약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인다는 데서 신격의 하락을 감지할 수 있다.

반면 원광은 삼기산에서 도를 닦는 일개 승려였지만 당나라 유학을 마칠 때는 학덕이 높은 고승이 되어 있었다.

우호적인 관계로 일관되고 있지만 불승 앞에서 점점 하락하는 토착신격을 그려냄으로써 토착신격이 불교에 복속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원광법사 세속5계를 전수하다

 

 

『삼국유사』 ‘원광서학’ 편은 세속오계가 만들어진 과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원광법사가 수나라에서 돌아와 청도의 가슬갑(가실사라고도 한다)에 있을 때 귀산과 추항이라는 선비가 찾아왔다.

귀산(貴山)이란 어진 선비는 사량부 사람인데 한 마을의 취향(蕭項)과 친구가 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 말했다. "우리들이 사군자들과 교유하려고 하면서 먼저 마음을 바로 잡아 처신하지 않는다면 필경 모욕당함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니 어찌 어진 사람을 찾아가 도를 묻지 않겠는가."

 

그때 원광법사가 수나라에서 돌아와 가슬갑에 머물러 있다는 말을 듣고 두 사람은 찾아가 아뢰었다.

"저희들 속사(俗士)는 우매하여 아는 바 없습니다. 부디 한 말씀 주시어 평생의 지표가 되게 해주십시오."

"불교에는 보살계가 있는데 그 조항이 열 가지가 있다.

그러나 너희들은 남의 신하요 자식일 것이므로 필경 이루 다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 세속에는 5계가 있다"며 세속오계를 일러주었다

이는 뒷날 화랑도(花郞道)의 실천덕목이 되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데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다.

 

 


세속5계

 


신라 원광법사(圓光法師)가 화랑에게 준 5가지 교훈이다.

화랑 5 계(花郞五戒)라고도 한다.

600년(진평왕 22) 중국 수(隋)나라에서 유학하고 온 원광에게 귀산·추항 두 사람이 평생의 경구로 삼을 가르침을 청하였는데, 이에 원광은 사군이충(事君以忠)·사친이효(事親以孝)·교우이신(交友以信)·임전무퇴(臨戰無退)·살생유택(殺生有擇) 등 5가지 계율을 가르쳤다고 한다.

사군이충[事君以忠]

충성으로써 임금을 섬기는 일
사친이효[事親以孝]

효도로써 어버이를 섬기는 일
교우이신[交友以信]

신의로써 친구를 사귐
임전무퇴[臨戰無退]

전쟁에 나아가서 물러나지 아니함
살생유택[殺生有擇]

가려서 살생하는 일

 

 

◆ 밀본스님

 

밀본(密本)은 신라 선덕여왕 때 활동했던 밀교 계통의 승려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다음과 같은 그에 관한 신이(神異)한 이야기 두 편이 전한다.

밀본은 금곡사(金谷寺)에 머물면서 밀교 수행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때마침 선덕여왕이 병이 들어 오랫동안 낫지 않아서 흥륜사(興輪寺) 승려인 법척(法惕)을 불러다 병을 치료하였다.

하지만 시일이 지나도 효험이 없자, 신하들은 높은 덕행으로 널리 알려진 밀본을 청하여 궁중으로 맞아들였다.

밀본은 왕의 거처에서 『약사유리광여래본원공덕경(藥師瑠璃光如來本願功德經)』(약칭 약사경)을 읽었다.

읽기를 마치자 밀본의 육환장(六環杖)이 침실로 날아 들어가 늙은 여우 한 마리와 중 법척을 찔러 뜰 아래로 거꾸로 내던졌고, 왕의 병도 곧 나았다.

 

선덕여왕과 김양도와 관련된 밀본의 일화는 불교와 민간신앙 간의 갈등, 그리고 신라에 밀교가 전래된 시기 등을 보여준다.

아울러 당시 밀교가 주로 치병적 기능을 수행하며 사회적 기반을 넓혀 나갔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 사진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