雲水 天下/나는 자연인이다

우리땅 영지 순례 - 문무대왕릉 / 감은사지 / 이견대

초암 정만순 2021. 2. 28. 09:36

우리땅 영지 순례 - 

문무대왕릉 / 감은사지 / 이견대

 

 

■ 순례일 : 2021. 10.20(수) 맑음

■ 순례자 : 초암 단독

■ 순례경로 : 문무대왕릉 - 감은사지 - 이견대

 

 

억겁의 세월을 바라보며 저 파도는 오늘도 부셔지는데 의연한 바위섬엔 바람 소리만 가득하다

 

 

 

침묵으로 천년을 살았거니와 오늘의 바램은 내 안에 있네

나그네 그 눈길에 희로애락을 말하니 저 구름이 웃고가네

 

 

 

 

문무대왕릉(대왕암)

 

 

토함산 뒤쪽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대종천을 이루고 그 물줄기가 동해로 흘러드는 감포 앞바다.

봉길리해수욕장이 들어선 이곳 해안에 서면 바다 쪽으로 약 200m 떨어진 곳에 바다 경치를 돋우는 아담한 바위섬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이 바로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 제 30대 문무왕 (661-681)의 산골처(散骨處) 혹은 수중릉으로 알려진 대왕암이다

 

 

둘레 200m의 바위섬에 동서와 남북으로 십자 모양의 물길을 깎은 다음, 가운데 작은 못처럼 파여서 항을 이루고 있으며, 이곳에 깊이 3.6m, 폭 2.85m, 두께 0.9m의 큰돌을 물속 2m 깊이에 놓아 그 밑에 유골을 모신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단, 화장을 해서 재를 뿌렸느냐 유골을 직접 모셔 놓았느냐에 대해서는 아직 학자들간에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이 큰 돌을 대왕암이라 하며 사적 제158호로 지정되어 있다

 

삼국통일을 완수한 문무왕(文武王)은 통일 후 불안정한 국가의 안위를 위해 죽어서도 국가를 지킬 뜻을 가졌다.

그리하여 지의법사(智義法師)에게 유언으로, 자신의 시신(屍身)을 불식(佛式)에 따라 고문(庫門) 밖에서 화장하여 유골을 동해에 묻으면, 이 되어 국가를 평안하게 지키도록(護國大龍) 하겠다고 하였다.

이에 따라 유해를 육지에서 화장하여 동해의 대왕암 일대에 뿌리고 대석(大石)에 장례를 치렀다.

사람들은 왕의 유언을 믿어 그 대석을 대왕암이라고 불렀다.

 

 

대왕암은 육지에서 불과 200여 미터 떨어진 가까운 바다에 있다.

큰 바위가 주변을 둘러싸고 있고, 중앙에 약간의 넓은 공간이 있는데, 이 공간에 대석을 이동하여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중앙의 대왕암 주변을 큰 바위(화강암)가 둘러 싸고 있는데, 네 방향으로 물길이 나 있어 주변 바위는 네 부분으로 구분되어 있다.

자연적으로 물길이 나 있는 상태이나 약간의 인공을 가하여 튀어나온 부분을 떼어내어 물길이난 가운데 공간을 약간 가다듬은 흔적이 발견되었다.

바닷물은 파도와 함께 동쪽 물길을 따라 중앙 공간으로 흘러들어와 서쪽 물길을 통해 빠져 나간다.

바닷물이 물길을 따라 중앙으로 진입할 때 파도가 소멸되기 때문에 중앙의 물은 파도의 영향을 받지 않아 잔잔하며, 물 높이는 중앙의 큰 바위를 살짝 덮을 정도를 항상 유지한다.

대석의 안치 방법과 유골의 수장 여부에 대하여 그 동안 많은 의문점이 있었다.

2001년 3월 한 방송사에서 역사연구 프로그램 제작을 위해 초음파 탐지기 등을 이용하여 바위의 조직과 바위의 내부 및 수면하를 조사한 결과, 대왕암 내부 또는 아래에 유골이나 부장품이 존재하지 않음을 확인하였다.

 



대왕암에서 멀지 않은 육지에 '낭산'이라고 하는 신성시되는 언덕이 있는데, 이곳에 '능지탑'이라고 불리는 탑이 있다.

연구 결과 문무왕의 시신은 이 능지탑에서 화장되어 대왕암 주변에 산골하고, 대왕암 주변 바위에서 절리된 큰 바위를 중앙의 빈 공터에 남북으로 안치시켜 장례를 지낸 형식적 절차를 가짐으로써 무덤(왕릉)으로서의 의미를 부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대왕암의 네 방향으로 수로를 낸 것은 석가의 사리를 안치한 탑의 형식을 적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신라의 한 설화에, 문무왕이 그 아들 신문왕(神文王)에게 만파식적(万波息笛)이라는 피리를 주어, 문무왕이 죽은 후 바다의 용이 되었다가, 만파식적을 불면 용이 나타나 국가의 안위를 지키도록 하겠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한다.

아들 신문왕은 바다에서 1.5km 떨어진 동해변에 부왕을 기리는 감은사(感恩寺)를 지어, 절의 금당 밑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도록 설계하였다.

이는 용이 쉽게 접근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견대

감은사의 동쪽에 약간 높은 언덕이 있다.

이곳은 대왕암을 정면으로 바라다 볼 수 있는 곳인데, 이곳에 이견대(利見臺)를 짓고 신문왕은 이곳에 수시로 와서 대왕암을 망배(望拜)하였다고 한다.

 

 

엄청난 영빨 - 봉길리 해변의 굿판은 다 이유가 있다

 

 

문무대왕릉이 바라보이는 봉길리 해변은 아주 규모가 큰 영발지이다

지하 15m 쯤에 60~70cm 간격으로 음양 양수맥이 흐르고 수맥파가 생기를 형성하여 지표로 솟아 올라오는 지기의 분포지가 아주 넓다

그러나 생기가 강한 지점과 약한 지점 그리고 지기가 솟지 않는 지점 등 생기의 강도는 조금씩 다르다

토함산에서 출발한 용맥이 감은사지를 거치고  해변을 지나 대왕암을 일으키니 용맥따라 흘러온 음양수맥의 생기로 인해 감은사지 부터 광범위한 영발지가 형성되고 해변까지 이어져 있는 겄이다

따라서 영기에 민감한 법사들은 당연히 접신의 굿판을 생기가 강한 지점인 여기에서 벌이고 싶어하는 겄이다

 

그러면 문무대왕의 동해 바다속 왕릉은 수맥이냐? 명당이냐?

그곳 에너지의 질과 양은 얼마나 되는가를 살펴보도록 하자​

 

대왕바위의 기의 질과 양은 엄청나다

석굴암의 토함산을 조산으로 봉길리 주산에서 잠용으로 숨어들어 대왕바위를 만든 것인데,그 바위가 토함산의 마지막 산 진처이고, 사방에 수벽을 만들어 계수즉지시킨데다, 그 기맥이 땅속 깊은 곳에 수정이 뭍혀있는듯하다.

대체로 기가 강한 섬들이 많은 것은 그 이유 때문이다.​

따라서 바다 속의 대왕암은 명당이지수맥이 아니다.

물속도 땅이 길지이면 그 하부가 단단하여 지구속 용암층의 흉기와 차단되어  감응이 안 되니 명당이고,

그 위 물도 길수인 것이다.

물속 명당 위의 물은 길수요, 물속 수맥 위의 물은 흉수이리라.

 

문무대왕이 생전에 창건했다는 감은사지도 대지이다.

전하는 말로는 감은사지와 대왕바위를 연결하는 통로를 만들어 용이된 문무대왕이 감은사로 왕래했다고 전해진다.​

 

 

감은사 동서 삼층석탑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에 있었던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제31대 신문왕이 창건한 사찰이다

682년(신문왕 2) 신문왕이 부왕 문무왕의 뜻을 이어 창건하였으며, 사지의 부근인 동해바다에는 문무왕의 해중릉(海中陵)인 대왕암(大王巖)이 있다.

문무왕은 해변에 절을 세워 불력으로 왜구를 격퇴시키려 하였으나, 절을 완공하기 전에 위독하게 되었다. 문무왕은 승려 지의(智義)에게 “죽은 후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지킬 것”을 유언하고 죽자 이에 따라 화장한 뒤 동해에 안장하였으며, 신문왕이 부왕의 뜻을 받들어 절을 완공하고 감은사라 하였다.

 

 

그 때 금당(金堂) 아래에 용혈을 파서 화룡(化龍)한 문무왕이 해류를 타고 출입할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하였다.

682년신문왕은 동해의 호국룡이 된 문무왕과 삼십삼천(三十三天)의 아들로 태어난 김유신(金庾信)으로부터 나라를 지킬 보물인 신비스러운 피리 만파식적(萬波息笛)을 얻었다.

그 뒤 이 절은 황룡사(皇龍寺)·사천왕사(四天王寺) 등과 함께 호국의 사찰로서 명맥을 이어왔으나, 언제 폐사가 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절터에는 국보 제112호인 삼층석탑 2기가 있다.

제일 윗부분인 찰주(擦柱)의 높이까지를 합하면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석탑 중에서 가장 큰 것이다.

이 탑은 고선사(高仙寺)의 삼층석탑, 나원리의 오층석탑 등과 함께 신라통일기의 전형적인 탑파양식을 따르고 있다.

1966년 동서로 나란히 있는 쌍탑 중 서 삼층석탑에서 임금이 타는 수레의 형태인 보련형(寶輦形) 사리함이 발견되었는데, 보물 제366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1996년 동 삼층석탑이 해체 수리되면서 서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것과 형태가 유사한 사리함이 발견되었고, 사리 10여과가 나왔다.

동탑의 사리함은 지붕인 천개(天蓋)의 양식이 서역의 영향을 받았음을 6세기에 조영된 중국 당대(唐代)의 돈황(敦煌) 막고굴(莫高窟) 벽화 및 구조 등과 비교하여 알 수 있었으며, 1966년 서탑에서 발견된 사리가 진신사리(眞身舍利)임에 비해 동탑에서 나온 사리는 문무왕의 사리가 아닌가 추정하기도 한다.

 

 

 

세상에 평화를 부르는 피리 만파식적

 

문무왕의 아들인 신문왕 때의 일이다
동쪽 바다에 거북이 머리 모양의 작은 섬 하나가 나타났다.
그 섬에 대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었는데 그 대나무가 낮에는 둘이 되고, 밤에는 하나로 합쳐진다는 소문이 온 나라에 퍼졌다

그 소문을 들은 신문왕이 신하들과 그곳에 직접 가 보았다.
그때 용이 나타나서 말했다.
“이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불면 세상이 평화로워질 것입니다.”

용의 말대로 피리를 만들어 부니 적들이 물러갔다
가뭄이 들면 단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면 비가 그쳤으며, 사납게 일던 파도도 잔잔해졌지요. 어느새 신라 전체가 평화롭고 고요해졌다.
그래서 이 피리의 이름은 ‘만파식적’이다

 

 

이견대

 

 

 

대왕암을 의미 있게 눈여겨볼 수 있는 곳이 두 군데 있다.

대본초등학교 앞쪽에 있는 이견대와 동해구(東海口)라는 표지석 아래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라는 기념비가 서 있는 자리이다.

이견대는 화려한 능묘를 마다하고 동해 바다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고 한 문무왕이 용으로 변한 모습을 보였다는 곳이며, 또한 그의 아들 신문왕이 천금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보배 만파식적을 얻었다는 유서 깊은 곳이다.

 

이견대는신라의 보물 만파식적을 얻었다는 곳.

1970년 발굴조사 때 드러난 초석을 근거로 최근에 다시 지었다.

이견대라는 이름은 『주역』의 ‘비룡재천 이견대인’(飛龍在天 利見大人)이라는 이름에서 따온 것이며, 현재의 건물은 1970년 발굴조사 때 드러난 초석에 근거하여 최근에 지은 것이다.

 

 이견대는 사적 제159호로 지정되어 있다.

 

 

 

 

◆ 사진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