雲水 天下/나는 자연인이다

우리땅 영지 순례 - 대성산 정취암

초암 정만순 2021. 2. 17. 16:13

우리땅 영지 순례 - 대성산 정취암

 

 

 

해발 450m 벼랑 끝 암자에 자비의 서광이 비추나니.....

 

 

 

정취암은 정취보살을 본존불로 모신다

우리나라에서 유일무이하다

정취보살은 관세음보살의 이명인데 그래서 모신 전각의 이름도 원통전이다

정취보살의 명호를 따 암자 이름도 정취암이라고 지었다

 

대성산 기슭 암벽단애에 위에 위치하는데 풍광이 일품이다

산청 10경에 속한다

 

 

대성산을 살펴보다

 

 

 

정취암의 진산은 대성산(大成山 593m)이고 조산(朝山)은 둔철산이다

둔철산의 높이는 812m로, 3번 국도의 지리산 입구와 산청군 사이에 있다.

동쪽으로 대성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연결돼 있다.

대성산 끝자락 암벽 사이에 정취암이 있다.

 

 

 

 

 

 

정취암 - 화엄경에서 선재가 만난 29번째 선지식인 정취보살 모신 관음성지

 

 

 

육산 즉 토산에서 산의 맥줄기가 마지믹으로 떨어지는 부분에 돌출한 바위군이 있으면 육산의 기운은 이 암장에 모이게 마련이다

둔철산의 영기가 동쪽으로 부드럽게 흘러 내려와  대성산을 일으키고 그 용맥이 좌우로 갈라지며 기운이 그치지 않고 뻗어내려 좌청룡 허리춤에 영발지를 만들어 내니 이 암장위에 샘솟는 터의 지기는 대단하다고 봐야한다

당연히 당대 최고의 고승인 의상대사가 이 영지의 묘용을 알아보고 수도장을 만드니 그 이름이 정취암이라

정취보살을 본존불로 모시고 납자를 제접하니 천년 이상 발심수행과 향화가 그치지 않고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정취암은 의상대사이 창건했으며, 문가학이라는 도인이 여우로부터 도술을 배웠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정취암은 대성산의 기암절벽 사이에 자리하여 그 기운이 가히 금강에 버금간다고 하여 예로부터 이곳을 작은 금강이라는 뜻으로 소금강이라 일컬을 정도로 경치가 수승한 곳으로 유명하다

깎아지를 듯한 기암절벽 사이사이에 자리한 사찰의 모습이 가히 절경이 아니라고는 하지 못할 정도로 멋들어진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전해지는 정취암 창건설화는, 신라 신문왕 6년(686년)에 동해에서 부처님이 솟아올라 두 줄기 서광을 비추었는데 한줄기는 금강산에 다른 한줄기는 대성산을 비추고 있었다

이를 본 의상대사는 두 줄기의 서광을 따라 금강산에는 원통암을 세우고 대성산에는 정취사를 창건한 것이

바로 오늘의 산청 정취암의 시작이라고 한다

 

 

정취보살이 바로 관세음보살 이니 의심하지 마시게

 

 

사찰에서 조석으로 독경한 천수경에는 관세음보살 10대 명호가 있는데 정취보살은 관세음보살의 10대 명호중 1명 즉 다른 이름 중 하나라고 나와있다

정취는 ‘다른 길로 가지 않는다’는 뜻인데, 한 번 세운 원을 향해 오로지 외길 수행으로 일관한다는 뜻으로 무이행보살(無異行菩薩)이라고도 한다.

 

천수경 중 정취보살이 나오는 부분을 잠시 살펴보자

 

南無觀世音菩薩摩河薩 南無大勢至菩薩摩河薩 南無千手菩薩摩河薩 南無如意輪菩薩摩河薩 

나무관세음보살마하살 나무대세지보살마하살 나무천수보살마하살 나무여의륜보살마하살

 

관세음보살마하살님께 귀의합니다. 대세지보살마하살님께 귀의합니다.

천수보살마하살님께 귀의합니다. 여의륜보살마하살님께 귀의합니다.

 

南無大輪菩薩摩河薩 南無觀自在菩薩摩河薩 南無正趣菩薩摩河薩 南無滿月菩薩摩河薩

나무대륜보살마하살 나무관자재보살마하살 나무정취보살마하살 나무만월보살마하살

 

대륜보살마하살님께 귀의합니다. 관자재보살마하살님께 귀의합니다.

정취보살마하살님께 귀의합니다. 만월보살마하살님께 귀의합니다.

 

이하 생략~~

 

정취보살은 <화엄경>의 마지막 품인 ‘입법계품’에서도 선재동자가 53명의 선지식을 만날 때, 스물아홉 번째로 등장한다.

선재동자가 보살의 길을 어떻게 갈 것인지 묻자, 정취보살이 “선남자여, 나는 보살의 해탈을 얻었으니 이름하여 ‘보문속질행해탈(普門速疾行解脫)’이다”라고 대답하는 장면이 있다.

여기서 ‘보문’(普門)이라는 말과 오로지 중생 구제를 제일의 원으로 삼는다는 것이 관세음보살과 같기에 동일한 보살로도 표현된다고 유추할 수있다.

 

 

문가학과 정취암 그래고 야호선(野狐禪)에 얽힌 이야기

 

 

문가학(文可學)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도사이다.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에 보면  문가학과 야호에 관한 기록이 있다

 

문가학이 소싯적 둔철산 정취암에서 공부를 하다가, 정월 초하루날 절의 승려들이 요물을 피해 도망가자 자신이 그 요물을 잡아 보이겠다며 혼자 절에 남았다.

밤이 되자 아름다운 여자가 나타나 함께 술을 마셨는데, 여자가 술에 취해 쓰러져 보니 그 정체가 여우였다. 

문가학이 여우를 새끼줄로 묶어 버리자 여우가 울면서 둔갑술의 비술책을 줄 테니 풀어달라고 호소했다.

이에 문가학이 허락하자 여우는 몸을 완전히 감출 수 있는 장신술(藏身術) 부분은 찢어서 자기가 가져가고 비술서를 내주었다는 설화가 있다.

 

조선이 건국되고, 광주에 가뭄이 들자 광주목사가 문가학에게 청하여 비를 내리게 해 달라고 했다.

문가학은 사양하다가 승낙하여 세 번 비를 내렸다. 

태종2년(1402년), 또다시 가뭄이 들자 예문관 직제학 정이오가 임금에게 문가학을 천거했다.

임금이 내관을 시켜 문가학을 부른 뒤 “네가 능히 비를 내릴 수 있다면 나를 위해 비를 빌라”고 요구했다.

문가학은 사흘 안에 비를 내릴 수 있다고 했으나 비가 오지 않았다.

문가학은 “급히 서울로 올라온다고 정성과 공경이 부족한 것이니, 송림사에서 치재하게 해 달라”고 했고,

그 다음날부터 이틀동안 비가 내렸다.

그래서 문가학에게 쌀과 옷을 상으로 내렸다.

문가학은 항상 “젊어서부터 《신중경》(神衆經)을 외어 그 도를 얻었는데, 무릇 평생에 바라는 모든 것이 내 수중에 있다”고 주장하고 다녔다.

하지만 정작 문가학 본인은 생긴 것이 얼빠진 사람 같았다

그 뒤로도 문가학은 몇 번 불려와서 기우제를 지냈다.

하지만 비가 내렸으나 겨우 먼지만 적실 따름이었다

 

1406년, 문가학은 역심을 품고 백성들을 모아 자신이 “천병(天兵)과 신병(神兵)을 부를 수 있으니, 인병(人兵)만 모이면 거사를 치를 수 있다”고 선동했다.

이에 생원 김천(金蕆), 전 봉상시주부 임빙(任聘), 생원 조방휘, 전 부정 조한생(趙漢生), 전 소윤 김양(金亮) 등이 가담하여 역모를 꾀했다.

임빙의 외조부인 부사직 조곤(趙昆)이 음모를 알고 신고하여 그 무리가 일망타진되었다.

태종은 대로하여 문가학을 “미친 놈”이라고 일컬었다.

문가학, 임빙, 김양, 김천, 조방휘, 조한생 등은 저잣거리에서 환형, 즉 거열형에 처해지고, 그 가족들도 모두 교수형에 처해졌다.

다만 임빙은 외조부 조곤이 자수한 덕에 그 처자식과 형제는 연좌제를 면하였다

 

이상이 문가학에 대한 조선왕조 실록 기록의 요체아다

 

그러면 문가학이 역모를 꾀한 연유는 과연 무었일까

태종은 유교를 국치의 근본으로 삼은 무자비한 전제군주였다

따라서 많은 도교 신봉자들을 억압하하고 무시했을 것이고 그의 행동 또한 조정의 입장에서 보면 기인이사를 떠나 미혹난적으로 보여 핍박을 받았을 겄이다

무시와 핍박의 결과, 울분에 찬 문가학과 그 일당은 역모를 꾀할 수 밖에 없는 궁지에 몰려 봉기한 겄으로 사료된다

 

아무튼 문가학은 불교가 대세였던 고려시대에 비주류인 도교나 선도를 수련한 도사로 보여진다

더구나 수련 장소가 정취암이었다 하니 당시 정취암은 불교 승려의 수도장인 동시에 선도 수련장으로의 역할도 했을 겄으로 사료된다

 

문가학이 여우에게서 둔갑술을 비롯한 여러 술책을 배웠다는 겄으로 보아 당시에 여우로 상징되는 선도의 고수가 이 절이나 둔철산 주위에 거쳐하고 있었고 그 인연으로 선도수련을 통해 방술을 획득했으나 장신술 등 최고 경지의 공능을 나타내는 정도의 고수로는 성장하지 못한것 같다

 

 

 

빛이 차단된 동굴에서 탄생하고 전승되어 온 수행법이 야호선(野狐禪) 인가?

 

 

그러면 여기서 또 주목해야 할 것은 문가학이 수련한 장소이다

정취암은 바위 절벽위에 지어졌고 이 절벽에는 수 많은 동굴이 산재해 있다

빛이 들어오지 않는 이 동굴 안에서 문가학은 선도 내공을 수련하였고, 컴컴한 동굴 안의 수도자는 마치 여우와 같은 행색인지라 그 동굴은 여우굴과 같다고 표현되었을 겄이다

또한 수련 방법 또한 주문수련법이나 선도내단술이었을 것이니 참선수행을 하는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여우가 하는 수련법 같다하여 여우수련법 즉 야호선(野狐禪) 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동굴에 앉거나 누워하는 수행법은 고대 샤머니즘 시대 부터 현대에 이르기 까지 수천년을 내려오는 동북아시아 지장에서 전승되어 오는 정통 수련법 중 하나이다

따라서 이를 야호선이라는 말로 폄하하거나 금기시 하는겄은 실로 무지의 소치가 아닐 수 없다

 

 

천연동굴 인공동굴

 

대성산 일대는 과거 야호선 수행터일 가능성이 높다.

야호선(野狐禪)은 동북아시아 고대 수행법이다. 여우가 들어갈 수 있을 만한 굴 속에서 수행하는 명상법이다.

핵심은 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 어두컴컴한 굴이다.

여우가 들락거리는 굴은 입구가 작아야 한다.

사람이 간신히 기어 들어갈 수 있는 좁은 입구다.

입구가 크면 빛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빛이 안 들어와야 한다.

이런 컴컴한 굴속에서 한두 달 명상을 하면 도통하는 방법이 야호선이다.

이를 도교에서는 호선숭배(狐仙崇拜)라고 한다.

여우신선을 숭배한다는 뜻이다.

 

지금도 중국의 일부 지역에서는 이 흰색 여우를 숭배하는 전통이 남아 있다.

호선(狐仙)신앙이다.

호선신앙 내지는 야호선의 핵심은 컴컴한 공간에 있다.

빛이 밝으면 내면세계로 깊이 들어가기가 어렵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인간은 내면의 깊은 무의식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그런 공간이 어디인가?

여우가 들락거리는 입구가 좁은 자연동굴인 것이다.

자장율사 백골관 터도 그 입구가 아주 좁다. 사람이 간신히 들어갈 수 있다.

내부는 어둠이다. 

 

 

중국 도교 일파인 전진교 장문인 중양자와 신라 국통 자장율사의 야호선 수련

 

 

 

중국 도교인 전진교(全眞敎)의 장문인인 왕중양(王重陽·1112~1170)의 도호(道號)는 중양자(重陽子)다

그가 처음 도를 닦기 위해서 이 방법 저 방법을 시도했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그래서 이제까지와는 다른 독자적인 수행법을 모색했다.

바로 '활사인묘(活死人墓)' 수행법이라 불리는 것인데, 땅 속 수십 미터 깊이까지 파고 들어가 마치 무덤같은 굴을 만들고 그 속에서 좌선을 한 채 행공을 하는 것이다.

활사인이란 살아 있지만 죽은 사람과 같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무덤 속에서 처름 꼼짝하지 않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렇게 하기를 2년, 그는 마침내 득도를 하였고 땅 속에서 나와 포교를 하기 시작하여 전진교의 교조가 되었다.

그런데 이 ‘활사인묘’ 수행법는 왕중양 만의 독창적 수행법은 아니다

이 방법은 고대 동북아시아 샤머니즘 전통에서 유래한 호선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당시 수행자 들에겐 보편적으로 널리 알려진 방법이었다 

쉽게 말해 백여우 수행법은 굉장한 고통을 동반하는 극한 인내 수행법이긴 하나 상당한 결실을 맺을 수 있는 고급 수행법이기 때문이었다

 

 

자장율사는 어릴 때부터 천성이 맑고 슬기로워 학문을 깊이 닦아 익혔으며, 어버이를 여읜 뒤부터 세속의 번거로움을 싫어하여  깊은 산으로 들어가 고골관(枯骨觀)을 닦았다.

고골관이란 시체가 썩어서 백골이 남을 때 까지의 과정을 지커보며 불도를 닦는 고행적 수행법의 일종이다
그러기 위해 조그만 집을 지어 위자현수(圍茨懸首)의 극한 수행법으로 득도하고자 했다

즉 가시덤불로 둘러막고 벗은 몸으로 그 속에 앉아 움직이기만 하면 곧 가시에 찔리도록 하였고, 끈으로 머리를 천장에 매달아 정신의 혼미함을 물리친 겄이다.

이렇게 자장은 젊어서는 경주 일대에서 수행을 했을 것이고, 그 이후로 당나라도 갔다 왔고, 신라로 귀국해서도 계속 도를 닦았을 겄이다

 

 

 

 

그런데 자장이 고골관을 닦은 현존하는 유적이 아직도 남아있으니 사자산 법흥사 적멸보궁 뒤에 있는 석분(石墳)이 주인공이다, 

석분은 돌로 만든 무덤이라는 뜻인데  바로 여기에서 자장율사가 수행을 했다고 전해진다.

봉분이 있어 무덤같이 생겼는데 돌로 만든 입구도 있다.

입구의 크기는 가로 40㎝, 세로 20㎝쯤 되는데 사람이 엎드려 기어서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크기이다.

묘하게도 입구 앞에 탑이 세워져 있어 그나마도 정면으로 들어 오는 적은 빛도 차단해 버리는 구조로 설계되어 있다

 

옆에 서 있는 표지판의 설명을 보자.

입구를 통해 돌무덤방 안으로 들어가보면 내부는 돌로 6단 수직벽을 쌓았다.

돌방의 크기를 보면 높이는 160㎝, 길이는 150㎝, 너비는 190㎝이다.

성인 한 사람이 들어가 앉거나 누울 수 있는 정도의 공간이다.

돌방 뒤편에는 돌로 된 널이 설치되어 있다.

널빤지처럼 길쭉한 돌이 있었고, 이 돌 널 위에는 사람의 뼈가 있었다고 한다.

 

자장이 여기서 처음 백골관을 닦은 이래로 그 전통이 쭉 이어져 고려·조선에 이르기까지 승려들이 백골을 놓고 이 어두컴컴한 돌방에서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름 천연동굴이나 인공굴 에서든 간에 야호선은 한국땅에서도 널리 수용되고 행해졌던 전통 정신수련법 이었던 겄이다

그리고 현금에도 야호선 수련자는 상당히 존재한다고 들었다

 

 

불교 고승 백장선사(百丈禪師)와 여우에 얽힌 야호선(野狐禪) 이야기

 

 

야호선에 관한 이야기는 중국 고승인 백장선사(百丈禪師)의 어록에도 나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선사께서 매일 상당하여 설법하는데 늘 한 노인이 법을 듣고는 대중들을 따라 돌아갔다.

하루는 가지 않고 있어 선사께서 물었다.

“거기 서 있는 자는 누구인가?”

“저는 과거 가섭불(迦葉佛) 때에 이 산에 살았었는데

한 학인(學人)이 묻기를 ‘많이 수행한 사람도 인과(因果)에 떨어집니까? 떨어지지 않습니까?’하여

제가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대답하여 여우의 몸에 들어가 있습니다.

오늘 화상께 청하오니 한마디로 깨닫게 해주십시오.”

선사가 말했다.

“그대가 물어보시오.”

노인이 곧 묻기를

“크게 수행한 사람도 인과에 떨어집니까? 떨어지지 않습니까?”

하니 선사께서 말했다.

“인과에 어둡지 않습니다.”

노인은 말끝에 크게 깨닫고 선사께 감사의 말을 하고는

“저는 이제 여우의 몸을 면하여 산 뒤에 있으니 죽은 중을 화장하여 보내주시기 빕니다.”

선사는 유나(維那 : 절의 사무를 맡은 자)의 우두머리에게 명하여 대중들에게 제사를 지낸 후 함께 죽은 스님의 장사를 지내겠다고 알리게 하였는데 대중들은 자세한 내막을 몰랐다.

선사는 대중들을 이끌고 산 뒤의 바위 아래에 도착하여 지팡이를 휘저어 한 마리 죽은 여우를 꺼내고는 의전의 예를 지켜 화장을 하였다

 

위 내용의 속살을 살펴보면, 이와 같이 백장선사가 지도하는 간화선법으로 수도하지 않은 자는 여우로 호칭되었으며 그 수행의 결과는 야호선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이 어록의 배경에 깔려 있는 겄이다

즉 야호선 수행자는 궁극적 깨달음을 얻을 수 없으니 사마외도일 뿐 이라는 것이 당시의 주된 사조이며, 심지어 간화선 주창자들은 같은 뿌리를 가진 묵조선 수련자 조차도 그릇된 수행자라고 비난하였으니 하물며 야호선 수련자야 말하여 무었하리

 

 

수행방법 - 과연 이대로 끌고 가야만 하는것인가?

 

오늘날 한국 불교 수행법은 간화선만이 정통 수행법이라고 주창하는 자들이 불교 교단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는데 과연 이 말이 옳은 말일까

석가부처님 자신도 간화선으로 수련하여 대각을 성취하지도 않았고 또한 가르치지도 않았다

달마조사도 소림굴에서 면벽수도를 하였으나 간화선은 그 당시 나오지도 않았다

남방불교의 수련법인 위빠사아나는 과연 궁극적 깨달음을 얻을 수 없는 야호선에 불과하단 말인가 묻고싶다

 

깨달음으로 가는 길은 무수히 많으며 각자 인연과 근기에 따라 자기 길을 가면 되는 겄이다

이것이 맞다 저것은 틀렸다는 이분법적 사고는 참으로 편협하고 위험한 발상으로 불교 뿐만이 아닌 모든 종교가 최우선적으로 버려야 악습일 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종교야 말로 인간 본연의 자유와 존엄을 짖밟는 쓸모없는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할 것이다

 

 

산신각과 산신 참배 유리창

 

정취암 삼성각에 여느 절처름 산신의 탱화나 조각상이 각 안에 모셔져 있지않다

대신 산신각 뒤벽에 큰 유리창이 있어 각 뒷쪽 洗沈臺(세심대) 라는 각자가 새겨진  자연석 앞에 모셔진 산신의 조각상이 훤하게 내다 보인다

마치 사불산 윤필암의 뒷벽에 유리창이 있어 산 중턱의 사방불을 참배할 수 있도록 한 구조와 동일하다

 

 

전망대 조망

 

​정취암 주위의 절경을 즐기기 위해서는 전망대에 올라야 한다

전망대는 정취암 바로 뒤 암벽 상단  가장 높은 곳에 주변을 관망할 수 있는 정자가 마련되어 있으며 이 정자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가히 절경이 아니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멋지다

 

 

 

 

 

 

 

 

■ 사진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