雲水 天下/나는 자연인이다

우리땅 영지 순례 - 계룡산 등운암

초암 정만순 2021. 2. 14. 10:10

우리땅 영빨터 순례  - 계룡산 연천봉 등운암

 

 

 

계룡산 신원사 일주문 주련의 다음 시가 낭객(浪客)의 심금을 울린다​

 

歷千劫而不古 (역천겁이불고)

천겁의 세월이 지나도 옛날이 아니요

亘萬歲而長今 (긍만세이장금)

일만세를 지나도 언제나 지금일세

 

 

계룡산(鷄龍山)은 과연 어떤 산인가?

 

 

백두대간이 지리산에 이르기 전, 백운산 어름에서 큰 산맥 하나가 백두대간과 갈라져 서쪽으로 뻗어간다

이 산맥을 금남호남정맥이라 부른다

금남호남정맥은 덕대산에서 다시 방향을 틍어 북쪽으로 나아가며 팔공산, 성수산, 마이산을 솟아 올린다

마이산에서는 크게 두갈래로 갈라져 남북으로 향한다

여기서 북쪽으로 뻗은 산맥은 금남정맥, 남쪽으로 뻗은 산맥은 호남정맥으로 불리운다

 

금남정맥은 마이산을 지나 운장산, 대둔산, 등을 빚어올리며 계속 북상하다가 금강에 이르러 긴 여정을 마치면서 남은 기운을 모두 모아 우뚝 일어서니 바로 계룡산이 된다

백운산에서 출발하여 계룡산에 이르기까지, 금남정맥은 태극(太極) 형상으로 굽이치며 뻗는다

그래서 계룡산을 산태극(山太極)으로 부르기도 한다

 

금남정맥이백두대간과 갈라진 곳은 또한 금강의 발원지 이기도 하다

금강은 금남정백의동쪽 기슭을 따라 구비구비 흐르다가계룡산을 북쪽에서 휘감아 돈 후 서해로 들어간다

금강또한 금남정맥 처름 태극 형상으로 흐르는 것이다

이에 수태극(水太極)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래서 풍수가들은 계룡산을 산태극과 수태극이 어우러진 천하명산이라며 찬탄하는 겄이다

 

금남정맥의 끝부분에 위치한 계룡산은  845.1m의 천황봉을 중심으로 쌀개봉, 관음봉, 문필봉, 연천봉, 삼불봉, 머리봉, 국망봉 등 크고 작은 28개의 봉우리가 연봉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주능선이 남북으로 크게 뻗은 가운데 다시 서에서 동으로 두 개의 능선이 나란히 뻗어내려 F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이 계룡산은 금강을 허리에 두른 채 공주시 계룡면과 반포면, 논산시 두마면, 대전광역시 중구 유성 지역 등에 걸쳐 있다.

계룡산은 풍수지리설에서 대단한 명산으로 꼽아 일찍이 조선 왕조가 이 산 기슭에 도읍 터를 고려해 보기도 하였다.

또한 그 뒤 수많은 신흥 유사종교들이 모여든 것도 계룡산을 풍수설에서 중요시한 때문이었다.

 

풍수가에 따르면, 용세가 제 몸을 휘감아 제 꼬리를 돌아보는 회룡고조형국(回龍顧祖形局)을 이루었고, 상봉인 천황봉이 형제봉·중두봉(中頭峯)·종봉(終峯)을 이루어 이것을 제자봉(帝字峯)이라 한다.

계룡산은 산형이 수체(水體)로서 동서로 병풍같이 둘려 있고, 산이 북에서 동서로 싸안으니 두 쌍의 봉황이 서로 희롱하는 형상이요, 흙빛이 바래서 흑기(黑氣)를 벗으니 백옥이 되었다고 한다.

 

힘차게 뻗어 내린 주룡이 북으로 가니 한줄기 한줄기가 조각난 황금 같고, 청룡은 겹겹이 감싸서 주봉을 호위하고 백호는 국사봉(國師峯)의 호랑이가 얌전히 엎드린 형상이라 한다.

다시 안쪽을 내려다보면 멀리 장군봉·천쌍봉(天雙峯)·함지봉(咸芝峯)·함박봉(咸朴峯) 등이 주봉을 향하여 하례하니 군신이 다정하다.

 

수세는 골육수(骨肉水)로 좌우에서 흐르는 물줄기가 앞으로 모여 양수합금(兩水合襟)을 이루었고, 주위 봉우리들은 사방에서 사신팔장(四神八將)이 둘러싸 나성(羅城)을 이루었으며, 삼길육수방(三吉六秀方)의 영봉들이 정기를 내뿜어 신도안을 비추는 형국이라 한다

 

그래서 풍수전문가들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대표적인 길지 중 한곳이 바로 계룡산이라고 지목한다.

예부터 도읍의 자리로 항상 거론된 곳이 계룡산 주변지역으로 조선 건국 때, 박정희 정권 때, 지금의 행복도시 이전지 역시 계룡산 자락이다.

이러한 이유로 과거 계룡산은 무속인들의 수행 터전으로도 유명하였다.

 

계룡산이라는 산이름은 은 조선조 초기에 이태조가 신도안(계룡시 남선면 일대)에 도읍을 정하려고 이 지역을 답사하였을 당시 무학대사가 산의 형국이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이요, 비룡승천형(飛龍昇天形)이라 일컬었는데, 여기서 두 주체인 계(鷄)와 용(龍)을 따서 계룡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또는 낮은 구릉성 평야지역에 높이 솟은 군봉(群峰)으로 이루어진 계룡산은  수려한 산세가 '닭의 벼슬을 쓴 용의 모습'같다 하여 계룡산으로 부르게 되었다.

 

그 자태와 경관이 매우 뛰어나 삼국시대에는 백제를 대표하는 산으로 , 신라통일 후에는 오악(五嶽) 중 서악(西嶽)으로, 조선시대에는 삼악(三嶽) 중 중악(中嶽)으로 봉해질 정도로 이미 역사에서 검증된 충남의 진산이다.

이상이 널리 알려지고 정리된 계룡산의 개요이다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는 자들 이여

연천봉 영빨 맛을 보라!

 

산이 그 자리에 있으면서 대우를 받으려면 본시 가지고 있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해야만 한다

그러려면 산이 뭔가 말을 해야 하겠지만 천지가 개벽한 이래 산은 인간의 말을 빌린 적이 없다

다만 말 없음으로 말을 대신하고 풍운조화의 변화를 빌어 스스로의 본래 모습을 넌지시 보일 뿐이다

쉽게 말해 너희가 스스로 알아서 하라는 말쑴이다

이미 인간이 산에 발을 들여 놓았다면 산은 갑이요 인간은 을이다

 

신령스런 기운이 모여 있거나 솟아나거나  또는 기운이 내려 꽃히는 것을 영발(靈發)이라 하고, 이러한 현상이 특별이 강하게 발휘되는 곳을 영지(靈地)라 한다

곧 영발터란 영지를 맛깔스럽게 표현한 것인데 신령스러운 기운의 터란 말이다

 

우리 땅에는 수많은 영지가 있으나 대표적인 영지를 손꼽으라 치면 계룡산이 단연 백미에 속한다

그 중에서도 연천봉과 등운암 일대는 가장 뛰어난 영발터로서 아는 사람은 다 안다는 명소이다

과연 그러한가 라는 물음에 대해 수 많은 고승대덕과 현인명사, 기인이사들이 이미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등운암(騰雲庵)은 연천봉(連天峰) 정상 바로 아래 20m 지점에 자리잡고 있는데 연천봉의 높이가 739m이니 해발 720m 쯤 된다

계룡산 암자 중 제일 높은 지점에 있으나 등산로 를 쌀짝 벗어나 숨은듯 있으니 연천봉 등정만을 원하는 시끄러운 산객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다

오르는 길은 계룡산 북서쪽 갑사 쪽과 계룡산 서남쪽 신원사에서 올라가는 길이 있는데 신원사에서 오르는게 쉽고 빠르다

시간은 약 2시간 반 정도 산길을 올라가면 된다

.

계룡산은 남쪽으로 바위 맥이 흘러왔고, 용세가 제 몸을 휘감아 제 꼬리를 돌아보는 회룡고조형국(回龍顧祖形局)을 이룬 그 꼬리에 해당하는 암골 정상에 연천봉이 있다.

연천(連天)이란 기맥이 하늘과 맞다아 있다는 뜻이요, 등운(騰雲)이란 구름을 타고 오른다는 의미이니 이 터의 영험함을 넌지시 알려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면 어째서 연천봉 일대가 뛰어난 영지인가?

 

연천봉 일대는 계룡산 영맥 중에서도 갑급의 강력한 지기가 위쪽으로 솟아 오르는 자리이다

한마디로  암혈영발(巖穴靈發) 자리이기 때문이다

즉 최고의 영발터인데 제 일의 원인은 연천봉 자체가 통바위 덩어리이기 때문이다

수행자나 기도객이 일심을 모으면 지기가 암반을 통해 몸의 기도를 타고 들어오는데 그 느낌의 형태도 다양하여 전촉감과 같은 유형이 있는 반면에 색깔의 형태로 느껴지기도 한다

기수련 고단자의 경우 음양이 기운과 오행의 기운이 섞여 대략 열가지 정도의 기파(氣波)가 있다고 말하는데 평범한 필자로서는 세세히 확인할 길이 없다

 

 

천하제일의  영빨터 등운암에서 부설거사와 등운대사를 만나다

 

등운암은 1300여 년 전통을 자랑하는 유서깊은 사찰로, 계룡산의 관음봉. 쌀개봉, 국사봉, 천황봉 등 병풍처럼 펼쳐있는 봉우리 중에서 가장 영험하다는 연천봉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 사찰로 산내 암자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등운암의 유래는 부설거사의 아들 등운대사의 이름을 따서 절이름을 지었는데 ,

부설거사는 인도의 유마거사, 중국의 방거사와 더불어 불교사의 3대 거사로 꼽힌다.

 

신라 진덕여왕때 경주에 사는영특한 아이 진광세가 있었다.

불국사에 출가하여 부설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도반인 영조·영희 두 스님과 의기투합해 각지를 돌며 치열하게 정진했다.

오대산을 가던 중 구씨의 벙어리 외동딸 묘화가 그를 보고 갑자기 말문을 열었다.

죽기를 다하여 인연을 맺고자 원하여 자비보살 마음으로 부부의 연을 맺어 등운과 월명 男妹를 두었다.

 

이제 더 이상 부설은 스님이 아닌 거사였다.

하지만 삭발염의를 하지 않았다고 정진까지 멈춘 것은 아니었다.

남매가 성장하자 거사(居士)는 병(病)이 있다는 거짓 핑계로 서해(西海) 백강변(白江邊)에 초려(草麗=초가집)를 지으니 이 곳이 망해사(望海寺)이다.

그는 백척간두에서 한 걸음 더 내딛겠다는 결연함으로 면벽과 묵언수행을 이어갔고 마침내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세월이 흘러 영조·영희 두 스님이 옛 벗이었던 부설거사를 찾아왔다.

거사는 그들을 보는 순간 미혹과 번뇌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간파했다.

그는 옛 도반들을 도와야겠다고 생각에 내기를 제안했다.

물이 든 병을 들보에 매달아 막대기로 내려쳐서 어떻게 되는지 보자는 것이었다.

두 스님은 의아해하면서도 부설거사의 말을 따랐다.

그들이 내리친 병은 깨지면서 물이 쏟아졌다.

그런데 놀랍게도 부설거사의 병은 깨졌지만 물은 그대로였다.

충격을 받은 두 스님은 더욱 발심해 정진해 깨달을 수 있었다 한다

 

훗날 아들 등운은 계룡산 등운암, 딸 월명은 내변산 월명암을 창건하였고, 묘화부인은 장흥 가지산 보림사로 옮겨가 맹렬수도 끝에 성불했다고 전한다

 
부설거사의 시는 오도송, 열반송 등 여러 편이 있으나 그중 한편인 四浮詩(사부시)를 소개할 까 한다

妻子眷屬森如竹 (처자권속삼여죽) 처자권속이 대나무 숲처럼 에워싸고

金銀玉帛積似坵 (금은옥백적사구) 금은옥백이 산같이 쌓였을지라도

臨終獨自孤魂逝 (임종독자고혼서) 죽음에 다다르니 나 홀로 가는구나.

思量也是虛浮浮 (사량야시허부부) 생각해보니 허망하고 뜬구름 같네.

 

朝朝役役紅塵路 (조조역역홍진로) 날마다 세상일이 그처럼 바쁘고

爵位纔高已白頭 (작위재고이백두) 벼슬이 겨우 높아지니 머리는 이미 백발이네.

閻王不怖佩金魚 (염왕불포패금어) 염라대왕은 벼슬 높은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思量也是虛浮浮 (사량야시허부부) 생각해보니 허망하고 뜬구름 같네.

 

錦心繡口風雷舌 (금심수구풍뇌설) 비단 같은 마음에 천둥번개 같은 말

千首詩經萬戶侯 (천수시경만호후) 천 편의 글을 짓고 만호후에 올랐더라도

增長多生人我本 (증장다생인아본) 세월 따라 인아상(人我相)만 늘어나나니

思量也是虛浮浮 (사량야시허부부) 생각해보니 허망하고 뜬구름 같네.

 

仮使說法如雲雨 (가사설법여운우) 가령 설법이 구름 같고 비 내리는 것 같아서

感得天花石點頭 (감득천화석점두) 하늘에서 꽃비 내리고 돌들이 고개 끄덕인다 해도

乾慧未能免生死 (간혜미능면생사) 온전하지 못한 지혜로는 생사를 면하지 못하나니

思量也是虛浮浮 (사량야시허부부) 생각해보니 허망하고 뜬구름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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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면 도대체 등운암 자리가 어째서 영빨터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세가지 점에서 그 연유를 찿아볼까 한다

 

우선 역사적 영빨이다

등운암이 창건된지 천년이 세월이 흘렀으니 그 동안 이 터 위에 수없이 많은 건물이 들어섰다 부셔지고 또 다시 세워지곤 하였을 겄이다 

그러면 전각이 있거나 설령 공지일지라도 스님이나 도사, 아니면 무속인이든 간에 수 많은 이들이 수행과 기도를 하고 치성을 드렸을 겄이다

어는 사물이나 자리이든 간에 그 대상 그 곳에는 정성을 기울인 염력장, 즉 에너지장이 형성되어 있어 일정 기간 흩어지지 않고 모여있어 그 자리에서 머물러 수양하는 모든 이들에게 기가 스며 드는 것이다 

 

다음은 지반 즉 터다

계룡산을  산 전체가 조각난 바위가 아닌 통바위로 되어 있다

등운암의 터는 인공적으로 편편하게 닦여 있고 채소밭도 언저리에 있어 흙터인것 같으나 실상은 밑마닥 전체가 암반이다

즉 암봉인 연천봉 정상 바로 밑 옆구리에 자리잡고 있으니 겉으로 보이는 표토만 흙일 뿐 강력한 고밀도 암기가 장판처름 깔려있는 겄이다

 

 

또 하나는 이 터에서 바라보는 주변 풍광이다

등운암에서 바라보면 우선 약간 오른쪽 정면으로 계룡산 제1봉인 천황봉845m)과 제2봉인 쌀개봉(830m) 능선이 눈 앞에 다가오는데 그 기세가 장엄하면서도 수려하다

마치 장성과도 같은 석벽 봉우리 들이 병풍처름 이 터를 향해 있는데 짱짱한 바위 기운이 그대로 쏘아져 몰려온다

참으로 그 맛이 일품인 것이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다

계룡산의 주봉인 천황봉은 싸개봉으로 기운을 저하고 쌀개봉은 북으로 꿈틀대며 올라가 관음봉(816m)을 만들고 거기서 용맥은 서쪽으로 내달아 문필봉(756m)을 거쳐 마침내 연천봉에서 마지막 기맥을 일으키곤 비로소 멈춘다

즉 연천봉이 천황봉을 바라보는 회룡고조형(回龍顧祖形)의 용맥 완성되는 겄이다
손자가 할아버지와 마주보고 교감을 하는 형국이니 그 기운의 팔팔함을 새삼 말하여 무었하리

 

맑은 날 등운암에서앞을 보면 3백 여리 밖 산줄기들까지 가물가물 눈에 들어온다

겹겹으로 늘어선 산줄기와크고 작은 산봉우리들이 흡사 운해처름 보인다

구름 바다 위에 앉아있는 형국이니운중선좌형(雲中仙坐形)이 된다

마치 신선이 구름위에 앉아있는모양세다

천황봉 쪽에서 연천봉을 보면, 그 모습이 흡사가부좌를 틀고 그윽한 자태로 인강세상을내려다 보는 선인과 같다

운중선좌형의 명당에는선계의 기운이 아주 크게 서린다

그 기운으로선인이나 대도인을 배출한다

 

이 모든 천혜의 조건이 계합하여 등운암의 영빨은 완성되었으니 예로 부터 지금까지 천하대길지라 칭송받아 마땅한 겄이다
 

 

 

연천봉에 올라 용솟음치는 진기를 맛보고

연천봉 석각의 비의를 풀다

 

 

 

 

연천봉에 오른다

발밑의 통바위 암반에서 영빨이 찌르르 등줄기를 타고 오른다

가히 명불허전이다

기상 조건만 허락한다면 이 위에서 좌선을 하든 기도를 하든 아니면 내공수련을 하든 무술단련을 하든 무었하나 도움이 되지 않을 까닭이 없는 영빨이다

 

연천봉과 은둔감결파의 관계는 매우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연천봉과 정감록의 관계는 정상 바위에 새겨놓은 글자에서 확연히드러난다. 

전문 석공에 의해 유려하고 단정하게 음각된 글씨가 아니라 조잡한 글자다.

이 여덟 자가 조선의 운명을 예언한 참서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대개 참위설은 풍수지리설과 혼합되는 것이 보통인데 정감록도 참위설·풍수지리설·도교사상과 복합되었다.

언제 누가 새겼는지 정확한 기록이 없어 알 수가 없으나 당시 조정에 반기를 품어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희구하는 소위 반체제 인사의 소행임은 분명하다.

 

 

방백마각(方百馬角)

구혹화생(口或禾生)

연천봉 석각의 의미를 새겨보면 다음과 같다

 

方百馬角, 口或禾生의 方은 4방이요, 글자도 4획이라 4를 뜻한다.

馬는 午인데 오라는 글자는 80(八十)을 의미한다.

角은 뿔이다. 모든 짐승이 두 개의 뿔이 있으므로 2가 된다.

이를 모두 더하면 482란 숫자가 된다.

口와 或은 합자하면 國자가 되고, 禾와 生을 합치면 移의 옛글자가 된다.

전체를 다시 조합하면 '四百八十二 國移' 란 구절이 되어서

조선은 개국 482년 만에 망하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한다는 의미로 해석되어 진디.

 

이씨조선은 1392년부터 1910년까지 518년간 이씨(李氏)가 27대에 걸쳐 집권했던 왕조인데 482년과 36년의 차이이니 얼추 맞아 들어간다

 

글 내용을 표현하는 방법이 특이한 것은 미래의 시기나 사건의 중요성 등을 은어나 파자(破字)· 등을 사용하여 보는 사람들이 내용을 분명하게 파악할 수 없도록 기록한 점이다

 

그런데 최근 연천봉 정상에 철기둥과 함께 나무데크를 바위 위에 설치해 놓았다.

일제 강점기 우리땅 전역에 박힌 쇠말뚝과 다를바 없는 이 몰상식한 행위를 서슴없이 저지러다니!

물론 등산객을 위해 편의 및 보호시설로 시공한 것은 일견 이해가 가나, 영험한 봉우리에 철기둥을 박으면 영기가 흩어진다는 사실은 알지 못한다는 말인가

조속히 철거하여 원상회복 하기만을 바랄뿐이다

자연보호란 결코 구호만으로 되는게 아니다

 

 

 

계룡산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비주류와 주류의 대결장 겸 화합의 땅이다

 

계룡산에 있는 수 많은 절 중 3대 사찰을 꼽으면 갑사, 동학사, 신원사 이다

신원사는 여느 절과 마찬가지로 문화재가 몇몇개 있고 또한 거기에 담긴 역사의 향기가 스며들어 있다

그러나 이 절에는 다른 곳에서는 찿을 수 없는 한가지 살아있는 역사적 현장의 힘이 꿈틀대고 있다

그건 바로 "중악단"이다

 

 

 

유교계, 불교계, 무속계 등 여러 단체가 참가하는

원융회통의 축제장인 계룡산 산신제

 

계룡산에는 유교문화, 무속문화, 불교문화 등이 함께 공존하고 있는데 그 대표적 상징이 계룡산산신제이다

 

계룡산은 국가를 수호하는 삼악(三嶽)신앙 중 한 곳으로, 묘향산의 북악, 지리산의 남악과 함께 나라의 중앙을 지키는 곳이라 하여 이곳에 중악단(中嶽壇)을 건립했다.

북악단과 남악단은 이미 없어져 현존하는 산신각 중에서는 전국 최대의 규모라 할 수 있다.

신원사(新元寺) 경내에 있는 중악단은 사찰 경내에 있지만 사찰과는 별도인 국행제의 처소이다.

조정에서 파견한 관료가 향축(香祝)을 받들고 내려와 계룡산 산신에게 국가의 안위를 기원하는 제사를 올렸다.

 

중악단은 신원사 대웅전의 동쪽 뒤편에 있는 구릉지에 위치한다. .

현존하는 건물은 조선시대 후기에 지어진 것이지만 왕실 주도로 건축되어 조선 후기의 궁전 건축 양식 및 수법을 부분적으로 수용함으로써 단묘 건축물로서의 격식을 갖추었다,

중앙에는 단을 설치하여 감실을 두고 ‘계룡산산신(鷄龍山山神)’이라 쓴 위패와 산신도(山神圖)를 봉안했다.

이곳에서 산신제를 지내게 된 것은 1394년(태조3)부터이다.

북쪽 묘향산의 상악, 남쪽 지리산의 하악과 함께 예부터 영산(靈山)으로 꼽히는 삼악(三嶽)의 하나인 계룡산의 신원사 경내에 계룡단(鷄龍壇)이라는 단을 모시고 산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1651년(효종 2)에는 이 단이 폐지되었다가 1879년(고종 16) 명성황후의 명으로 재건하고 중악단이라고 이름을 고쳤다.

계룡산 인근 지역에서 전승되는 산신제에 대한 연원은 조선 태조 이성계와 관계가 깊다.

태조가 조선을 일으키기 전에 계룡산을 비롯한 전국의 오악을 돌면서 기도를 했으며, 나중에 계룡산의 도움을 받았다 하여 제사를 모시기 시작했다는 설화가 있다.

무학대사의 현몽으로 태조가 이곳에 단(壇)을 베풀고 산제를 모셨다는 설화도 전한다.

또 계룡산 사연봉(四連峰)에 살고 있는 신모(神母)가 해몽으로 태조의 건국을 예언했다 하여 신모를 위하여 사당을 짓고 제사를 모셨다고 한다.

또한 태조에게 계룡산은 정씨(鄭氏) 터이고 이씨(李氏) 터가 아니라고 가르쳐 주고 홀연히 자취를 감춘 떡장수 할머니 이야기가 전해진다.

나중에 이 떡장수 할머니가 계룡산신임을 알고 계룡산신사를 짓고 그녀를 위해 제사를 모시기 시작했다고 한다.

 

중악단에서의 산신제는 조선의 멸망과 더불어 중단되었다.

그러나 1998년에 공주시가 주도하여 산신제를 지방축제로 복원하였다.

해마다 4월 말일부터 5월 초 이틀에 걸쳐 축제를 연다.

이때 산신제는 유교식, 무속식, 불교식을 모두 포함하는 형태이다.

여러 종교 단체의 산신제가 종합되면서 본래 목적과는 달리 지방축제가 된 것이다.

 

 



제사는 먼저 공주향교에서 유가식(儒家式)으로 산천 제의를 올린 뒤 불가식(佛家式) 산신대제를 봉행하고, 공주무속연합의 법사(法篩)들이 산신제와는 별도로 굿마당을 펼친다.

이어서 외국 산악신앙의 기원제를 올리기도 하고, 마지막에는 공주시 계룡면 양화리의 지역 산신제를 진행한다.

부대 행사로 부적 그리기, 사주 보기, 타로점 등을 비롯하여 민화·무속화 전시, 풍장놀이, 기(氣) 수련, 전통무예 시범공연 등이 열린다.

 

 

계룡산산신은 남녀가 따로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은 계룡산산신에 남녀가 따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계룡산산신에 대한 믿음이 국가 차원과 민간 차원에서 따로 존재했기에 계룡산신의 형상도 각기 다르게 나타난다.

 

 

중악단에 모셔진 계룡산산신 탱화의 모습은 호랑이를 전령사 삼아 옆에 끼고 앉은 할아버지 형상이다.

붉은색의 도포를 입었는데 가슴에는학이 새겨진 흉배를 달고있어 조정을 섬기는 벼슬아치의 복장이다

다만 머리에는 감투나 갓을 쓰지않고 위로 상투를 틀어올렸는데 이는 여느 절의 산신각에서 통상 보이는 대머리에 흰수염을 나부끼는 산신과는 사뭇 용모가 다른 겄이다.

즉 조선시대 유교적 군신관념에 따라 산신을 남성으로 인식함과 동시에 군왕의 통제를 받는 신하인 것처름 묘사한 것이다.

이는 산신에 대한 모욕이요 어이없는 폄하라 여겨진다

 

그러나 관을 떠나 불가나 무가에서는 앞의 설화들에서 볼 수 있듯이 신모나 할머니 형상으로 나타난다.

 

 

대표적으로 계룡산 남쪽에 위치한 동학사의 산신각인 불석재 안에는 여산신 조각상이 봉안되어 있다.

 

 

 

또한 등운암 산왕전에 모셔진 산신도는 곁에 호랑이를 두고 풍운조화를 행하는 백우선을 든, 귀부인 머래채에 단정한 홍의를 걸친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어 계룡산 산신은 여성이라는 생각이 불가나 도가 그리고 무속계에서는 일반적 통념으로 여겨 지는 것이 반영된것 같다

 

그리고 속가로 내려오면 지금도 계룡산의 산신은 여성이라는 관념이 지역 사회에서는 지배적이다.

신원사 아랫마을 에는 많은 굿당들이 있는데 일부의 굿당에서는 "계룡산 신모굿당" 등 계룡산산신이 신모나 선녀임을 나타내는 편액이나 휘장을 내걸고 있다

 

아무튼 산신에 남녀가 존재하니 음양의 법칙에 따르면 굳이 이상할 겄도 없는것 같지만 사찰에서 흔히 보는 산신의 모습과는 사못 다른 용모와 복장이 신기하기도 하다

 

 

 

계룡을 이별하며 시 한 수 읊어본다

 

佛座無塵埃 불좌무진애

부처가 앉은 자리 티끌 하나 없어

松風含慈音 송풍함자음

솔바람에 묻혀오는 자비의 음성이여

奇峰如仙骨 기봉여선골

기이한 봉우리 신선의 자태인가

靑鶴飛萬程 청학비만정

청학의 날개 퍼득임 만리를 가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