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巨樹 保護樹 記念物/梅花

매화 쫓아 가는 길 - 옻골마을 매화

초암 정만순 2021. 3. 18. 16:54

매화 쫓아 가는 길 - 옻골마을 매화

 

 

 

尋君追路杳不見  (심군추로묘불견)

님 찿아 나선 길에 님은 보이지 않고

 

紅白梅香纏全身  (홍백매향전전신)

붉고 흰 매화 향기 온 몸을 휘감아

 

踏步酒樓園落花  (답보주루원락화)

주막집 마당에서도 꽃잎은 밟히거니

 

何時回來好節氣  (하시회래호절기)

언잰가 좋은 세월 다시 돌아 오려나

 

 

-초암-

 

 

 

 

옻골 매화 중 고매는 없다

그냥 그 건물과 지형에 딱 알맟게 꽃을 피울 뿐 나이 자랑을 하지 않는다

어리다고 기죽지 않고 꽃잎이 예쁘다고 향기가 진하다고 뻐기지도 않는다

참 순박한 시골 처녀같고 총각같다

 

 

 

이 곳 매화는 군락을 싫어한다

다만 고풍스런 담장에 기대어 따로이 홀로 그냥 살포시 웃음짓고 있을 뿐이다

 

 

 

옻골의 꽃들은 조화와 공존을 추구한다

 아름다운 자연 풍광과 고택을 배경으로한 홍매와 백매 그리고 개나리, 영춘화, 목련, 진달래, 산수유 등 이 계절에 모습을 드러내는 온갖 꽃들이 다 함께 잔치를 벌인다

 

 

 

 

 

 

■ 옻골

 

 

옻골마을. 

 

옻골마을은 마을이 자리잡고 있는 곳의 지형이 남쪽을 제외한 3면이 산으로 둘러쌓여 오목하다고 옻골이라고 불리웠다는 이야기와 주변 산과 들에 옻나무가 많아서 옻골이라고 불리웠다는 두가지 유래를 가지고 있다. 

'옻칠'자'시내계'자를 쓰는 '칠계'라는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후자의 유래가 더 적합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옻골마을의 정식 명칭은 '둔산동 경주 최씨마을'인데 즉 경주 최씨 집성촌이다.

조선 광해군 8년(1616년) 이곳에 터를 잡은 대암공 최동집 선생을 입향조로 현재 14대 종손인 최진돈씨까지 400년 가까이를 친손으로만 오롯이 이어오고 있는 경주최씨 광정공파 집성촌이다.

 

종점에 있는 회화나무 2그루는 입향조의 이름을 따 최동집나무로도 불린다.

옻골마을을 종점에서 조금 떨어진 어귀에서 조망하면 뒷산(북쪽) 정상에 기이한 형상의 바위가 우뚝 솟아 있고 마을 양쪽(동과 서쪽)으로는 개울이 흘러가다 회화나무 있는 종점에서 다시 만나 밖으로 흘러가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길지이다.

뒷산 바위는 마치 거북처럼 생겨 생구암(生龜巖)이라고 불리는데 풍수지리학상 거북은 물이 필요한 동물이라고 해서 마을 입구 서쪽엔 연못이 조성돼 있고 그 뒤로 서쪽 음의 기운을 막기 위해 연못 주위로 느티나무와 소나무가 병풍처럼 서 있다.

어귀의 보호수인 느티나무도 수령 350년이 넘었다.

 

이러한 옻골마을의 명성이 높은 이유는 비단 마을의 역사와 연륜뿐 아니라 14대를 면면히 이어온 선비정신의 산실인 백불종택(百弗宗宅)마을 돌담길 때문이다.

 

마을 안에서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효자로 소문난 백불암 최흥원(대암공6대손)의 효행과 학행을 기린 정려각.

겹처마 맞배지붕의 정려각 안엔 정조임금이 내린 긴 관작명칭이 적힌 문관용 홍패가 모셔져 있다.

최흥원의 호인 백불암은 주자학의 ‘백부지백불능(百不知百不能)’에서 따온 글귀로 ‘백 가지 아는 것도 없고, 백 가지 능한 것도 없다’는 지극히 겸손함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옻골마을의 입지가 풍수지리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면, 건물의 배치 방식은 성리학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성리학에서는 건물 배치에도 위계를 둔다. 일반적으로 가장 중요한 건물은 가장 뒤에 배치되는데, 마을 제일 안쪽에 종가가 자리잡은 것도 이 때문이다.

또 종가 중에서도 조상의 공간인 사당이 가장 뒷쪽으로 들어가 앉았다.
옻골마을의 종가는 조선 영조 때의 학자 백불암(百弗庵) 최흥원 선생의 호를 따 '백불고택'이라 불리는데,대구지역 주택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대구광역시 민속자료 제1호이기도 하다

 

백불종택은 마을의 가장 안쪽에 위치하고 있다.

 

 

종택까지 가려면 돌담길을 따라 걸어야 한다.

옻골마을 돌담길지방문화재266호로 지정(2006년)될 만큼 정겨운 풍경을 선사한다.

돌과 흙을 쌓고 그 위에 암기와, 수키와를 얹고 막새로 마무리한 돌담길은 종택까지 곧장 이어지지 않고 굴곡져 있다.

행여 있을지 모르는 사악한 기운이 길을 따라 종택으로 흘러들지 않게 하기 위한 지손들의 배려다.

 

살가움이 한껏 묻어나는 돌담길을 따라 맞닥뜨린 종택 앞. 一 자형 사랑채와 ㄷ자형 안채가 전형적인 양반가옥 형태로 조선시대 주택으로선 대구에서 가장 오래됐다.

솟을 대문이 아닌 一자형 대문채가 종가의 검소함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대문채 옆엔 최응원 선생의 처음 호(號)를 딴 수구당(數咎堂)이 있다.

홑처마 팔작지붕의 수구당은 백불암이 제자를 가르쳤던 곳.

 

 

수구당은 안채와 사랑채만 갖춰진 단순한 구조지만, 조선말기 대구지방의 양반집 살림채 형태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조심스레 대문채를 넘자 백불종택 사랑채다.

한쪽 지붕이 다른 쪽 보다 약간 높다는 게 특이하다.

높은 쪽은 종가의 최고어른이, 낮은 쪽은 두 번째 어른이 머물게 하기위해서다.

사랑채 기둥도 전면엔 둥근기둥(天) 뒤쪽엔 사각기둥(地), 가운데엔 팔각기둥(人)을 세워 천지인(天地人)사상을 건축으로 표현해 놓았다.

안채는 사랑채를 옆으로 돌아드는 대문으로 통한다.

 

보통 종가가 되려면 7가지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

명망 있는 조상을 중심으로 그 조상을 모시는 사당과 종택이 현존하며 종손, 종부, 지손 및 문중이 있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백불종택은 모든 조건을 충족한다.

백불암 9대 종손인 최진돈씨와 최씨의 노모인 13대 종부가 현존하고 있고 불천위인 대암공 최동집 선생과 백불암 최흥원 선생의 별묘와 가묘 등이 모셔진 보본당(報本堂)이 고스란히 제 모습을 지니고 있다.

 

보본당은 백불종택에서 제일 아름다운 건축물로도 유명하다.

 

마루턱에서 자세를 낮춰 보본당 장지문을 내다보면 마을 뒷산 생구암이 한 눈에 들어오는 건축미에 덧보태 깎지 않아 자연스런 굴곡미를 갖고 있는 대들보, 책과 제기를 보관하는 다락방 등이 고풍스러움을 더한다.

보본당 서쪽방은 우리나라 실학의 효시라 할 수 있는 반계 유형원(柳馨遠) 선생이 저술한 반계수록(磻溪隨錄)을 1770년 백불암 선생께서 영조 임금의 명을 받아 이곳에 교정청을 설치하고 최초의 교정본을 완료하여 나라에 바친 유서깊은 곳이다

 

마을 동쪽 개울을 따라 내려오면 자손들의 강학장소와 피서지이기도 했던 동계정(東溪亭) 현판 글씨는 미수 허목이 쓴 전서체로 서체의 아름다움이 뛰어나다.

시원한 물소리가 머리까지 맑게 해 주는 듯 하다.

주변 풍광도 마을에서 가장 아름답다.

 

 

 

옻골 풍수지리

 

 

백불암고택은 주산(뒷산)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면서 마을의 제일 안쪽에 자리 잡고 있다.

종택을 포함한 옻골마을은 주산의 중심이 되는 산줄기(용맥)가 마을 안으로 곧장 뻗어내려 왔으며, 마을 양쪽 계곡의 물이 내려오면서 터를 다져 지기(地氣)를 강화시키고 있다.

마을 입구는 수구(水口·바람과 물이 빠져나가는 곳)라 하여 관쇄(關鎖·청룡, 백호가 서로 감싸듯이 좁아진 상태)가 잘 돼 있어야 마을의 생기(生氣)가 빠져나가는 것을 방지할 수 있는데, 기실 관쇄의 정도는 약한 편에 속한다.

하지만 마을 양쪽에서 내려온 계곡물이 마을 입구에서 합수함으로써 설기(泄氣·생기의 빠져나감)됨을 막고 있고, 입향조(入鄕祖)인 최동집의 이름을 딴 수령 350년 정도 된 회화나무(일명 최동집나무)가 비보(裨補·도와서 모자라는 것을 채움)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게다가 인위적으로 만든 연못과 주밀하게 심은 고목들이 비보숲 역할을 하여 마을 입구를 좁혀 생기가 마을 안에 머물도록 하며 외부의 흉풍과 살기(殺氣)를 막는데 부족함이 없다.

 

주산과 청룡(좌측 산), 백호(우측 산)는 나무에 의해 가려져 있으나 돌산이며, 청룡과 백호의 일부는 너무 높고 마을과 가깝게 있어 혈(穴·가옥)을 누르고 있기에 비록 남향집이지만 햇볕의 양이 부족한 편이다.

입구 연못을 판 이유 중의 하나는 주산이 거북 형상으로 목마른 거북이가 물을 마시면서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며, 이는 곧 마을의 평안을 바라는 의미와 직결된다.

하지만 갈구음수형(渴龜飮水形)이 되려면 거북이가 남쪽의 연못을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데,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형상이어서 물을 마시고 떠나는 것 같은 무정한 느낌이 드는 것이 아쉽다 하겠다.

 

옻골은 생기가 모이는 조롱박 형상의 마을이어서 ‘사람의 운명은 그가 태어나 자란 산천의 기운에 의해 가장 큰 영향을 받는다’는 인걸지령론(人傑地靈論)에 부합하는 곳이다.

더구나 주변에는 논밭이 없고 돌산이 많아 밖으로 나가 관직을 얻어야 살 수 있기에 오직 학문에만 매진할 수 있는 대단히 뛰어난 환경을 갖춘 곳이다.

 

 

보호수

 


풍수지리를 고려하여 마을중심에 학자를 상징하는 회화나무, 동쪽에는 느티나무를 심어 나쁜 기운이 들어오는 것을 막고 반대로 좋은 기운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옻골마을에 비보숲을 형성하였다.

 

 수령 350년의 느티나무가 서있고, 안내판에는 둔산동 옻골마을 앞에 숲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마을의 터가 주변보다 높아 금호강 지류들이 훤히 내다보이므로 악기를 막으려 한겄이다

 


비보숲

 


수령 350여년의 아름드리 나무들은 마을의 터가 주변보다 높아 금호강 지류가 훤히 내다 보이므로 나쁜 기운이 마을로 들어오는것을 경계하고자 마을앞에 동서방향으로 깊게 병풍처럼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담장

 

 

옻골마을 옛 담장은 흙다짐에 돌을 박은 형식인 토석담이 주류를 이루며, 마을 안길의 돌담길이 대부분 직선으로 구성되어 있어 질서 정연한 느낌을 주는것이 특징이다. 

전통 가옥들과 어우러져 동선을 만들어 내는 돌담길은 전형적인 반촌 분위기를 자아내는 데 큰 역활을 하고 있으며, 사계절의 변화에 따라 다채로우면서도 고즈넉한 분위기를 잘 연출하고 있다. 

 

 

 

 

♥ 사진첩

 

찍은대로 해설없이 그냥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