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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 쫓아 가는 길 - 낙동강 매학정 매화

초암 정만순 2021. 3. 14. 01:55

매화 쫓아 가는 길 - 낙동강 매학정 매화

 

 

 

 

梅鶴悲歌(매학비가)

 

 

鶴飛無痕濃霧中  (학비무흔농무중)

짙은 안개 속 학의 자취 보이지 않고

 

恨梅不開艶花笑   (한매불개염화소)

서러운 매화는 꽃망울 터뜨리길 잊었네

 

同伴流去江與歲   (동반유거강여세)

저 강물따라 세월도 흘러가 버리면

 

故人戀貌難待千   (고인연모난대천)

옛 사람 고운 모습 천년 뒤에 뵐런지

 

-초암-

 

 

 

 

 

■ 매학정(梅鶴亭)

 

경상북도 구미시 고아면 예강리 257-2번지

 

 

 

 

구미시 고아읍 강정4길 낙동강변 언덕에 자리하고 있는 매학정(梅鶴亭, 경상북도 기념물 제16호)은 조선시대 명필 황기로(黃耆老)가 1533년조선시대 중종 28년)에 건립한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기와집이다.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는 매처학자를 자처하며 붓 한 자루로 초성의 반열에 올랐다.

본래 황기로 조부 황필의 휴양지인 곳을 주변에 매화를 심고 학을 길러 매학정이라 이름 지었다.

 

 

 

황기로는 조선시대에 이름을 날린 명필가로서 호(號)는 고산(孤山) 혹은 매학(梅鶴)이라 하였다.

1534년(중종 29년) 진사(進士)에 합격한 그는 별좌(別坐) 벼슬을 지냈다.

이곳은 본래 황기로의 조부 상정공(橡亭公) 황필의 휴양지였는데, 황기로가 조부의 뜻을 받들어 정자를 짓고 매화나무를 심고 학(鶴)을 길렀다하여 ‘매학정’이라 부르게 되었다.

매학정은 훗날 황기로의 사위인 옥산(玉山) 이우(李瑀)의 소유가 되었다.

이우는 율곡 이이(李珥) 선생의 아우이다.

 

황기로의 42세 때의 모습은 사돈인 율곡 이이(1536~1584)가 목격한 바로는 빈 뜰에 매화송이가 피어오르고, 깊은 못에서는 학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100여리 떨어진 곳에서 텃밭을 일구는 신선 같다고 하였다.

 



낙동강 강변 언덕에 자리하고 있는 매학정은 1592년 임진왜란 때 불에 타 폐허가 되었다.

1654년(효종 5년)에 다시 지었으나 1862년(철종 13년)에 화재가 발생하여 소실된 것을 다시 지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1970년에도 크게 보수 및 수리작업을 하였다.

 



매학정을 지을 당시 심었던 매화나무는 왜란의 와중에 불타버렸을 것으로 추정되며, 지금은 앞뜰에 여러 그루의 어린 홍매와 백매가 자라고 있다.

이 매화나무들이 잘 성장하게 된다면 매학정은 매화나무가 무성히 자라고 하늘에는 학이 날아다니는 낙동강변의 아름다운 정자, 휴식의 공간이 될 것이다.

 

 

 

고산 황기로 선생과 매학정

 

 

입으로 씹은 칡넝쿨을 붓 삼아 현판 글씨를 쓴 초서의 명필,

중국 북송의 임포는 매화를 아내로 삼고 학을 자식으로 여기며 살았기에 매처학자(梅妻鶴子)라는 말을 들었다.

조선의 서예가 가운데 구미 출신의 고산 황기로도 초서의 최고경지에 올라 초성(草聖)으로 알려지면서 중국에서 ‘제2의 왕희지’로 칭송받았다.

황기로의 초서는 당(唐)의 회소(懷素, 725-785)와 장필(張弼, 1425-1297)의 서풍(書風)이 곁들여진 것이라 한다.

그의 글씨는 변화가 크고 과장되게 쓰는 흘림글씨 형식인 ′광초(狂草)′ 이다.

 

 

이 글씨에서처럼 필획의 맥락이 실줄기처럼 끊어지지 않게 이어 쓰는 것을 ′연면초(連綿草)′라고 한다.

황기로는 이렇게 힘과 변화를 특징으로 하면서도 격이 부족했던 광초 영역의 글씨에 격조를 불어넣었다.

황기로의 초서는 조선 중기 서예에서 개성적인 면모를 드러낸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황기로는 평생을 매화와 학을 가까이 한 인물로 구미시 고아읍 예강리 낙동강이 보이는 고산 기슭에 매학정을 지어 머물렀으며, 구미의 상징인 금오산의 바위에도 대형 초서작품인 ‘금오동학(金烏洞壑)’을 남겼다.

 

 

450년 전 고산이 살았던 삶의 흔적을 찾아 역사여행을 떠나보자.

 

매화는 추위를 이겨내면서 가장 먼저 꽃을 피워낸다고 하여 화형(花兄)이라 부른다.

또한 어렵고 힘든 시기를 이겨나가는 가난한 선비라는 뜻에서 한사(寒士)라고도 한다.

이처럼 매화에는 성리학의 이념과 군자의 이미지가 들어 있기 때문에 옛 부터 선비들이 처소 가까이에 심어두고 즐겨 완상하였다.

 

선비들이 좋아하는 꽃이 매화라면, 선비들이 집에서 키우고 싶은 새는 학이었다.

크고 흰 깃털을 저으며 우아한 자태로 정원을 거니는 학은 신선다운 품위가 있어 세속적이지 않고, 은일하게 살려는 선비들에게 고상한 운치를 제공하는 으뜸가는 새였다.

이렇게 매화와 학을 돌보면서 유유자적하게 사는 게 선비들의 꿈이었다.

 

그런 꿈을 실제 현실로 옮긴 사람이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 1521년 중종 16∼1567년 명종 22)였고, 그의 롤 모델이 된 사람은 중국 북송의 임포(林逋, 967∼1028)였다.

매화와 학을 좋아했던 임포에 관한 이야기는 송나라 때 완열(阮閱)이 편집한 시화집 ‘시화총귀(詩話總龜)’에 나온다.

 

 

 

 

◆ 사진첩

 

찍은대로 두서없이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