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례 운조루
▨ 운조루=
1776년 조선 영조 때 삼수부사를 지낸 류이주(柳爾胄)가 세운 집.
원래 99간의 대저택이었으나 지금은 60여 간이 남아있다.
운조루의 택호(宅號)는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 사는 집'이란 뜻으로,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따왔다고 한다.
행정구역명으론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이며, 중요민속자료 제8호다.
인근에 한국풍수의 비조인 도선국사가 이인(異人)으로부터 풍수의 이치를 가르침 받았다는 사도리(沙圖里)가 있다.
금구몰니(金龜沒泥), 금환낙지(金環落地), 오보교취(五寶交聚).
비기(秘記)에 전하는 전남 구례의 오미리에 있다는 3개의 명당이다.
이중 금구몰니형 명당은 운조루(雲鳥樓) 터로 알려져 있다.
류씨 집안이 이 터를 잡을 때 거북형상의 큰 돌이 나왔기 때문이다.
남은 두 개의 터를 찾기 위해 일제 강점기 땐 전국에서 이주자가 몰려들었다 한다.
부귀영달의 희망을 품고, 아니면 지긋지긋한 가난을 풍수에 의지해 벗어나 보자는 바람을 안고 말이다.
일본인 무라야마 지준은 그의 저서 '조선의 풍수'에서 '1929년 방문 했을 때 이주해온 집들이 100여 호에 달하고 신축 중인 집도 십여 호였다'고 밝히고 있다.
부귀영화의 꿈을 안고 있는 재산 털어 찾아왔던 명당,
하지만 큰 명당은 하늘이 낸다했다.
몇 년을 기다리다 더 버틸 여력이 없어 유랑민이 되어 쓸쓸히 돌아서야 했던 이들도 많았다고 적고 있다.
운조루는 지리산 노고단을 배산(背山)으로, 섬진강 큰물을 임수(臨水)로 하는 전형적인 배산임수 형세를 띤다.
뒤는 병풍을 둘러친 듯 산자락이 감싸고 있다.
형제봉이 뒤를 받치고, 그 뒤엔 노고단이 버티고 섰다.
동쪽의 청룡은 왕시루봉 능선이다.
안산은 다섯 개의 봉우리가 봉긋하게 솟았다.
오봉산이다. 그 뒤의 조산들은 오행의 형상을 띤다.
화산(火山)인 계족산(鷄足山)을 비롯, 그 앞으로 토, 금, 수, 목성형의 산들이 나란하다.
오행의 아름다운 상생이다.
이런 형태의 안·조산을 보기도 흔치않은 일이다.
계족산의 화기를 제압하기 위해 집 앞엔 연당(蓮塘)을 조성했다.
안산 앞의 섬진강은 오미리를 U자형으로 안고 흐른다.
금구몰니형의 거북이 나온 곳은 지금의 부엌이라 한다.
혈심이 부엌이란 얘기다.
이럴 땐 안방이 그 자리에 위치해야 한다.
하지만 안방엔 물이 없다.
불을 때면 화기만 충천할 뿐이다.
그래서 그 자리엔 부엌을 위치시켰다.
거북이 물속에서 편히 쉴 수 있도록 한 배치다.
풍수에서 우선시하는 게 적선(積善)이다.
선을 쌓아야 좋은 땅을 얻고, 부귀를 이어간다고 본다.
운조루의 사랑채서 안채로 가는 공간에 나무로 만든 쌀독이 있다.
쌀독 아랫부분엔 조그만 구멍이 뚫려있고, 그 마개 위엔 타인능해(他人能解)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다른 사람도 열 수 있다'는 의미다.
배고픈 이들이 와서 먹을 만큼 쌀을 가져가도록 한 것이다.
직접 쌀을 주면 자존심이 상할까 배려한 것이라 한다.
운조루엔 굴뚝도 땅위를 긴다.
높이가 1m 이쪽저쪽이다.
이것도 없는 이들을 배려한 흔적이다.
밥 짓는 연기가 멀리서 보이지 않도록 한 게 이유란다. 가진 자의 도리, 류씨 집안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현장이다.
금구몰니형의 터에서 나온 돌거북,
류씨 집안의 가보로 내려온 그 거북은 안타깝게도 1980년대에 도둑이 들어 도난당했다고 한다.
모든 물건은 제자리에 있을 때 빛이 나는 법이다.
제자리가 아닌 곳에선 어색하고 재앙이 생긴다.
그 돌거북이 제3자에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냥 돌멩이일 뿐이다.
하루속히 운조루의 품안으로 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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