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 홍길동테마파크
문수산·통안천이 품은 배산임수의 전형
홍길동테마파크는 전남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 397-1에 위치한다.
장성군이 1999년부터 2012년까지 515억 원을 투입하여 조성한 사업이다.
총 23만㎡(약7만평)의 부지에 홍길동생가, 홍길동전시관, 산채체험장, 야영장, 풋살경기장, 숙박시설인 청백한옥, 휴테크-오토캠프장으로 공간이 구성되어 있다.
추석 연휴에 가족여행지로 이곳을 추천하고 싶다.
인근에 편백나무 치유의 숲으로 유명한 축령산과 영화 태백산맥 촬영지인 금곡마을이 있다.
홍길동은 한국인을 대표하는 이름이다.
구청이나 동사무소 민원서류 견본 양식에 적힌 이름 대부분은 홍길동이다.
홍길동을 국민대표 이름으로 내세우는 것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
아마도 한국인들은 선천적으로 항쟁과 개혁의 유전인자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우리 국민들은 홍길동이 그랬던 것처럼 부패한 사회를 개혁하고자 끊임없이 항쟁해왔다.
때로는 실패의 아픔도 겪었지만 결국에는 승리하여 세상을 바꾸며 발전해왔다.
이러한 성향 때문에 홍길동을 대표 이름으로 쓰는 것 같다.
홍길동이 유명한 것은 조선 광해군 때 허균이 지은 ‘홍길동전’ 때문이다.
허균은 이를 통해 조선사회의 모순을 개혁해 새로운 세상을 이루고자 하였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개혁에는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적폐 세력이 있기 마련이다.
이를 청산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오늘날 정치상황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허균은 강릉 출신이다.
이 때문에 홍길동을 두고 장성과 강릉이 서로 연고권을 주장한 적이 있었다.
1997년 강릉시가 강릉을 상징하는 캐릭터로 홍길동을 선정했다.
그러자 장성군이 즉각 제동을 걸고 나섰다.
홍길동의 생가 터가 장성군에 있다고 주장하고, 조선왕조실록 등 여러 기록을 제시하였다.
홍길동은 연산군일기에 5회, 중종실록에 4회, 선조실록에 1회 언급되어 있다.
이 기록을 토대로 장성군은 홍길동은 실존인물이며 세종 25년(1443) 장성군 황룡면 아치실 마을에서 태어났다고 고증했다.
두 자치단체는 치열하게 논쟁한 끝에 홍길동의 연고권은 장성, 허균에 대한 추모사업은 강릉이 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홍길동은 홍상직(홍길동전에서는 홍문)과 첩인 춘섬 사이에서 태어났다.
첩의 아들은 서자로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형을 형이라고 부르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홍길동은 차라리 산속으로 들어가 세상의 수치를 잊고 살 결심을 했다.
집을 나가 장성 갈재에 있는 도적들의 소굴에 들어가 그들의 우두머리가 된다.
그는 거처를 광주 무등산, 영암 월출산, 문경 새재 등으로 옮겨 다녔다.
그리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못된 벼슬아치나 부자들의 재물을 떨어 가난한 백성을 돕는 의적 활빈당 활동을 하였다.
연산군 6년(1500) 10월 체포되어 11월에 남해 삼천리 밖으로 유배형을 받았다.
남해 삼천리는 유구(琉球: 지금의 오키나와)다.
홍길동은 무리를 이끌고 그곳에 집단거주하며 인근의 지배권을 장악하여 율도국을 세웠다.
일본과 중국을 상대로 중계무역을 하며 풍요로운 세상을 만들었다.
홍길동은 7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죽자 율도국은 일본 싸스마 번의 침략을 받아 일본 영토로 복속되고 알았다.
오늘날 오키나와 사람들이 일본정부에 대항하여 독립운동을 벌이는 배경이다.
이곳 산세는 문수산 622.6m에서 내려온 맥으로 통안천을 만나 보국을 형성한 곳에 위치한다.
테마파크의 각 건물은 맥을 받는 곳에 배치하였다.
그중 홍길동 생가로 이어진 맥은 그 변화가 활발하며 보국의 중심에 해당한다.
특히 생가 뒤로 있는 현무봉은 야트막하고 아담하여 편안해 보인다.
대문 밖에는 작은 개울물이 우측에서 좌측으로 흘러 통안천과 합류한다.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형이다.
좌청룡과 우백호는 겹겹으로 테마파크를 둘러 감싸고 있다.
주변 산들이 모두 순하여, 아무리 살펴도 도적이 나올만한 땅은 아닌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이 마을은 청백리로 유명했던 박수량이 태어나 자란 곳이기도 하다.
신분차별이 없는 사회였다면 홍길동은 어떻게 되었을까?
보다 큰 업적을 남긴 인물이 되었을 것으로 상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