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 복흥면 금방동 노사 기정진 조모 묘
대문장가 탄생하는 황액탁목혈의 터
추석 성묘 길에 전북 순창군 복흥면 대방리 금방동과 노사 기정진(1798~1879)의 조모 묘를 찾았다.
노사가 살았던 시대는 열강들의 쟁탈로 인해 조선이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을 때였다.
대원군은 쇄국정책으로 이를 막으려고 했으나 명성황후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개화정책을 폈다.
그러자 성리학적 질서를 유지하고자 했던 보수 유림은 위정척사(衛正斥邪) 운동을 폈다.
정학인 성리학을 지키고 다른 사상은 사악한 것이므로 물리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 중심에 노사가 있었다.
노사는 행주기씨(幸州奇氏)로 선조들은 본래 행주산성이 있는 고양 원당 땅에서 살았다.
중종 때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김굉필 문하에서 정암 조광조와 동문수학했던 기진(1487~1555)이 사화를 피하여 형 기원과 함께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 아치실로 숨어들어와 정착하였다.
기진의 아들이 기호학파의 대표적 인물인 고봉 기대승이고, 기원의 10대 후손이 노사 기정진이다.
기대승계와 달리 노사 직계는 크게 현달하지 못했다.
이를 아쉬워한 노사 조부가 옥룡자유산록을 들고 명당을 찾아 나섰다.
전라도에서는 ‘생거장성 사거순창’이란 말이 있다.
살아서는 장성이 좋지만 죽어서는 순창이 좋다는 뜻이다.
노사 조부는 24혈이 있다는 복흥면으로 이사하여 조동(槽洞, 지금의 동산리)마을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복흥 24혈 중 10여개의 혈이 있다는 금방동을 자주 찾았다.
특히 후손 중에 대문장가가 난다는 황앵탁목혈(黃鶯啄木穴)에 관심을 가졌다.
이 혈은 노란 꾀꼬리가 나무를 쪼는 형국으로 한쪽 눈이 먼 자손이 나와야 제대로 발복이 된다고 한다.
몇 년의 노력 끝에 황앵탁목혈을 찾은 노사 조부는 일찍 돌아가신 노사 할머니 묘를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그리고 눈먼 손자가 태어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태어나는 손자들 모두 정상이었다.
노사도 처음 태어날 때는 두 눈이 정상이었다.
그런데 어린 시절 전쟁놀이를 하다 상대편 아이가 쏜 화살에 눈을 맞아 실명하고 말았다.
집안 식구들 모두 슬퍼했는데 노사 조부만은 무릎을 치며 기뻐하였다고 한다.
이제야 명당 발복이 되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의 기대처럼 노사는 어려서부터 총명했다.
스승 없이도 스스로 경서에 통달하였다.
17세 때 부모가 사망하자 선대의 고향인 장성 아치실로 이사했다.
31세에 향시에 응시하고, 33세 때 사마시에서 장원을 차지하였다.
여러 관직에 제수되었지만 나아가지 않고 오로지 학문에만 매진했다.
그의 학문을 ‘장안만목불여장성일목(長安萬目不如長城一目)’이라고 평가한다.
즉 장안의 만개 눈이 장성의 눈 하나만도 못하다는 뜻이다.
노사 조모 묘는 행정구역으로는 전남 담양군 월산면 용암리 산34번지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곳을 가려면 복흥면 대방리 629 금방동회관·경로당 앞에 차를 세우고 산길로 걸어 올라가야 한다.
금방동은 호남정맥 상에 있는 깊은 산골이다.
십여 가구가 사는 논하나 없는 작은 마을이다.
그렇지만 옛날부터 부자 마을로 유명했다.
마을은 다슬기가 물에 들어가는 영라입수형(靈螺入水形)처럼 생겼다.
금방동회관에서 왼쪽 길을 따라 산에 오르면 큰 나무가 있는 고개가 나온다.
바로 호남정맥 본줄기다.
나뭇가지에는 여러 산악회에서 호남정맥 종주라는 리본을 달아놓았다.
고개에서 왼쪽으로 가면 큰 바위가 나온다.
꾀꼬리에 해당하는 바위다.
그 아래 가파른 곳에 노사 조모 묘가 있다.
혈장의 요건인 입수도두, 선익, 순전을 확인할 수 있어 혈은 분명하지만 괴혈에 해당한다.
앞에는 횡으로 가로지르는 산줄기가 있다.
마치 나무가 옆으로 쓰러진 모습이다.
중간에 작은 골짜기들이 있는데 구멍처럼 보인다.
이를 두고 꾀꼬리가 나무를 쪼아 생긴 것으로 설명한다.
그 너머로 끝이 뾰족한 산이 정면으로 서있다.
노사와 같은 큰 학자를 의미하는 문필봉이다.
그러나 묘는 호남정맥의 바깥쪽에 위치하고 있어 발복이 오랫동안 유지하기는 어렵다.
땅은 산맥의 안쪽에 있어야 발복이 오래가는 법이다.
그런 측면에서 금방동은 대를 이어 전원생활을 할 만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