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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동서원 은행나무(보호수)

초암 정만순 2020. 9. 22. 17:18

 

도동서원 은행나무(보호수)

 

 

@ 탐방일 : 2020. 09. 19

 

 

도동서원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35에 있다. 현풍에서 구지면사무소를 지나 낙동강을 오른편에 끼고 약 4㎞쯤 가면 닿는 곳이다.

 

조선 초기의 명유(名儒)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김굉필(金宏弼, 1454∼1504))을 배향하였다.

1568년 지방유림에서 비슬산 동쪽 기슭에 세워 쌍계서원(雙溪書院)이라고 하였고, 1573년에 같은 이름으로 사액되었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05년에 사림들이 지금의 자리에 사우를 중건하여 보로동서원(甫勞洞書院)이라고 하였다. 1607년에 도동서원으로 사액되었다.

도동서원강당사당부장원(道東書院講堂祠堂附墻垣:보물 350)이 있다.

2007년 10월 5일 사적 제488호로 지정되었다.

2019년 7월 전국 8개 서원과 함께 ‘한국의 서원’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도동서원은 원래 1568년(선조 1)에 현풍 비슬산 기슭 쌍계동에 건립되었으나, 1597년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자 1605년(선조 38) 지금의 자리에 '보로동서원'으로 이름을 바꾸어 중건되었고, 1607년에 '도동서원'으로 사액을 받았다.

이황은 김굉필을 두고 '동방도학지종(東方道學之宗)'이라고 칭송했는데, '도동(道東)'으로 사액한 것도 공자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東來]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도동서원 원경

 

 

 

도동서원은 앞으로 낙동강을 굽어보는 작은 구릉 위에 동북향을 하여 자리잡았다.

서원 앞에는 수령이 오래된 은행나무가 서 있고, 그 뒤로 자연 지세에 어우러지며 서원이 조성되었다.

도동서원이 건립된 현풍 땅과 김굉필이 관계를 맺게 된 연유는 증조부 김중곤이 현풍 곽씨 가문에 장가를 들어 현풍에 정착하면서부터이다.

성장기를 현풍면 대니산 남쪽 솔례촌에서 보낸 한훤당은 호탕하게 놀기를 좋아하고 거리낌이 없었는데, 18세 때 합천군 야로에 있는 집안에 장가들면서 처가 근처 계곡에 '한훤당'이라는 조그마한 서재를 짓고 학문에 열중하게 된다.

이때 인근에 위치한 함양에 군수로 있던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수제자가 되어 『소학(小學)』을 배우면서 정몽주­김종직­김굉필로 이어지는 조선 성리학의 맥을 잇게 된다.

도동서원은 대니산의 한줄기가 서북으로 뻗어내린 끝자락의 북쪽 기슭에 북향하여 자리잡고 있다.

앞으로 낙동강 건너 고령 땅 개진들이 넓게 펼쳐진 곳이다.

서원 앞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수령이 오래된 은행나무가 있고, 그 뒤로 비교적 경사가 급한 지형을 따라 서원이 조성되어 있다.

 

도동서원 배치도

 

 

서원을 구성하는 건물들은 반듯하게 설정한 중심축을 따라 수월루(水月樓), 환주문(喚主門), 중정당(中正堂), 내삼문, 사당이 차례로 배열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중심축에는 이를 명확하게 나타내기 위한 통로와 계단이 자리하고 있다.

이는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가 말한 추뉴(樞紐), 즉 만물의 축과 중심성을 나타낸 것으로 해석된다.

이와 같이 도동서원의 전체적인 건축 구성과 배치 형식은 우리나라 서원건축 중 가장 규범적이고 전형적이며, 건축적 완성도와 공간 구성도 우수하다.

특히 1600년대에 건립된 강당과 사당 등 건물들은 당시 서원과 사묘건축을 대표할 만큼 매우 훌륭한 짜임새와 수법을 보이고 있고, 서원을 둘러싼 담과 석물들도 우수하여 이들 모두 보물 제350호로 지정되었다.

 

수월루

 

 

문루인 수월루는 공부하던 유생들이 답답한 마음을 후련하게 풀던 곳으로, 1888년(고종 25)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73년에 중건되었다.

물 위에 비친 달빛으로 글을 읽는다는 뜻을 가진 수월루의 건축적 품격은 서원 내 다른 건물들에 비해 많이 떨어지는 편이지만, 난간을 두른 2층 누마루에 오르면 넘실거리는 푸른 강물과 서원 주변의 경관이 한눈에 들어오는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서원 정문인 환주문은 맞담에 세운 규모가 작은 문으로서 사모지붕이다.

'환주(喚主)'는 '내 심성의 주(主)가 되는 근본을 찾아 부른다'는 뜻을 가졌다.

 

환주문

 

수월루 뒤에는 서원 정문인 환주문이 있고, 그 뒤로 강당인 중정당 앞 마당에 닿는다.

 

 

중정당

 

중정당은 강당 건물로, '중정(中正)'은 음과 양이 조금도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중용의 상태를 말한다.

 

 

달성 도동서원의 공간을 진입 공간, 강학 공간, 제향 공간, 관리 공간으로 구분할 때 중정당은 강학의 중심 공간이고, 사당은 제향의 중심 공간이다.

각 영역은 담장을 통해 구분된다.

중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평면은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둔 중당 협실형()이다.

전면에 반 칸 규모의 툇간을 두었다.

면적은 92.18㎡[27.89평]이다.

 

공포 양식은 출목이 하나만 있는 이익공 양식이나 익공 형태나 첨차, 화반, 대공 등의 초각 수법이 주심포계 건물의 고풍을 간직하고 있다.

중정당의 기둥 상부에는 흰 창호지를 발라 놓았는데, 이는 달성 도동서원이 도학지종()으로 평가 받는 김굉필의 학통을 이어받은 종으로서의 수위 서원()임을 내세운 것이다.

 

전국 650여 서원 중 달성 도동서원에만 유일하게 표현되어 있다.

중정당 좌우에 동재와 서재를 대칭되게 배치하였다.

 

중정당 기단

 

중정당 기단은 크기와 색깔이 다른 돌들이 빈틈없이 서로 맞물려서 일체가 되어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그 사이로 용두석을 배치하고, 기단 윗부분에는 크기가 다른 꽃송이가 좌우에 나란히 조각되어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기단은 지대석과 면석, 그리고 갑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같은 모양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다양한 모습이다.

갑석의 바로 아랫단 면석 사이에는 여의주와 물고기를 문 용머리 4개와 다람쥐 모양의 길() 함을 나타내는 동물상 등을 조각한 석재로 장식하였다.

 

동재 서재

 


강당 앞마당 좌우에는 동재와 서재인 거인재(居仁齋)와 거의재(居義齋)가 대칭을 이루며 마주보고 있다.

 

생단

 

강당 왼쪽인 북쪽으로는 생단이 있는데, 향사 전날 제관들이 제수로 쓸 생(牲)을 올려놓고 품평을 하는 장소이다.

 

 

내삼문 사당

강당 뒤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내삼문이 서 있고, 그 뒤에는 담으로 두른 일곽에 사당이 있다.

 

 

사당에는 김굉필을 주벽으로 하여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좌우에는 자연으로 돌아가 자연과 하나되기를 원하는 김굉필의 도학정신을 표현한 「강심월일주()」와 「설로 장송()」의 벽화 두 점이 있다.

 

 

제향 후에 축문을 태우는 망례위는 일반적으로 석물로 지상에 조성되는데, 도동서원의 경우는 사당 서편 담에 작은 구덩이처럼 생긴 감(坎)이 설치되어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평면은 긴 장방형이다.

면적은 36.93㎡[11.17평]이다.

기단은 중정당의 가구식 기단에서 지대석과 탱주가 생략된 양식으로, 지대석 없이 넓은 판석을 세워 면석을 삼고 면석 상단에 운두가 낮은 갑석을 덮었다.

전면 좌우에 계단을 설치하였다. 기둥은 정면·배면에 각 4개의 평주와 측면에 각 2개의 고주가 설치되어 총 12개의 원주가 사용되었다.

사당의 공포는 출목이 하나 있는 이익공 형식으로 짜여 있고, 내부에는 출목이 없다.

중정당이 정면·배면 포와 포 사이에 화반을 둔 것과 달리 사당은 포와 포 사이에 화반 모양의 단청을 하였다.

사당 내부는 통간으로 바닥에는 우물마루를 설치하였다.

 

 

도동서원 담장

 

보물 제30호

 

 

 

도동서원의 각 공간은 외곽을 감싸는 담장을 통해 구분되며, 담장에 설치된 문[삼문 또는 일각문, 협문 등]을 통해 연결된다.

담장은 지형 고저 차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층단으로 설치되었다.

와편 담장과 토석 담장 두 가지 형태이다.

와편 담장은 진흙과 기와를 한 겹씩 쌓아 올린 것으로, 음양의 조화와 장식 효과를 최대한 살리기 위하여 암막새와 수막새를 사용하였다.

달성 도동서원 담장 대부분이 이와 같은 형태이다.

토석 담장은 흙과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아 올린 것이다.

진입부에 위치한 수월루 전면부 일부에는 수월루를 복원할 때 새로 쌓은 담장이 이와 같은 형태이다.

 

김굉필 선생 신도비 쌍귀부

 

미스터리한 쌍귀부의 표정을 보기 위해서는 한훤당 선생 신도비각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답사를 겸한 여행을 하다 보면 가끔씩 희귀한 유물과 마주치는 경우가 있다.

'쌍귀부(雙龜趺)'도 그런 것이다.

귀부는 비석을 받치는 받침대를 뜻한다.

대부분 이 귀부는 머리가 한 마리인 거북이나 혹은 용으로 조각되어 있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귀부가 한 마리가 아닌 두 마리로 된 경우가 있다.

이를 '쌍신두귀부'라 부르며 줄여서 쌍귀부라 칭한다.

 

비석(碑石) 받침으로 쓰인 귀부(龜趺)는 한 마리로 된 것이 보통이나

두 마리로 된 것은 무장사지귀부(무藏寺址龜趺), 창림사지귀부(昌林寺址龜趺),

법광사지귀부(法光寺址龜趺), 숭복사지귀부(崇福寺址龜趺)가 있다.

 

 

 

 

김굉필

 

 

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 1454~1504).

조선조 유학사를 더듬다보면 반드시 만나게 되는 인물이다.

그는 고려 말의 정몽주에게서 비롯되어 길재·김숙자·김종직에게 차례로 전해진 유학의 도통을 이어받은 조선조 사림파의 적자(嫡子)라고 일컬어진다.

서울 정릉동(지금의 정동)에서 태어났으나 증조부가 현풍 곽씨에 장가들어 서흥 김씨의 세거지가 된 현풍에서 성장하였다.

청소년기의 그는 매우 호방하여 놀기를 좋아하고 남의 눈치에 거리낌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18세 때 이루어진 박씨 부인과의 혼인은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결혼과 동시에 합천군 야로의 처가 근처에 한훤당이라는 서재를 짓고 학문에 열중하게 된다.

동시에 세거지 현풍, 처가인 야로 그리고 처외가인 성주의 가천 등지를 오가며 그곳의 사류들과 교유하며 견문을 넓혔다.

무엇보다 김종직과의 만남은 그의 일생을 결정지은 운명적인 사건이었다.

그가 20세 되던 1474년 봄, 김종직은 가까운 고을 함양의 군수로 있었다.

이때 그는 김종직을 찾아 그의 문하에서 『소학』을 배우기 시작해서 마침내 김종직의 수제자로 성장함으로써 조선조 유학의 적통을 잇는 영광을 누리게 되지만, 단지 그의 제자라는 이유만으로 끝내 죽임을 당하게 된다.

 

26세에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도 줄곧 학문에만 정진하던 그는 나이 마흔에야 경상감사 이극균의 추천으로 비로소 벼슬길에 나섰다.

그뒤 사헌부 감찰, 형조좌랑 등을 지냈으나 연산군 4년(1498) 김종직의 「조의제문」1)이 빌미가 되어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장(杖) 80대’와 ‘원방부처’(遠方付處)의 형을 받고 평안도 희천으로 유배되어 5년간의 짧은 관직생활은 끝장이 났고, 끝내는 연산군 10년(1504) 일어난 갑자사화2) 때 ‘무오당인’(戊午黨人)이라는 명목으로 이배(移配)된 귀양지 순천에서 50세의 나이로 사약을 받고 일생을 마감해야 했다.

김굉필은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까닭에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쫓겨나고 중종이 즉위하자 곧 복권되었다. 중종은 신진사림들을 중용하여 자신의 정치세력으로 삼았고, 그 선두에 조광조가 있었다.

조광조는 김굉필의 직계제자였다.

당연히 김굉필의 명예는 회복되어 죽은 지 3년 뒤인 중종 2년(1507)에 사면되면서 도승지에 추증되었고, 그뒤로도 성균관 유생들의 문묘종사(文廟從祀) 건의가 계속되어 선조 8년(1575)에는 영의정에 증직되면서 문경(文敬)이라는 시호를 하사받았으며, 다시 광해군 2년(1610)에는 대간(臺諫)과 성균관 및 각 도 유생들의 지속적인 상소에 의하여 동방오현3)의 한 사람으로 문묘에 배향되는 영예가 주어졌다.

그는 조광조·김안국·성세창·이장곤 같은 쟁쟁한 인물들을 제자로 배출할 정도로 생전부터 후학들의 존경을 받았고, 사후에는 동방오현의 한 사람으로 사림의 추앙을 한몸에 모았다.

그러나 정작 그의 학문과 사상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두 번의 사화를 겪으면서 그의 저술이 거의 모두 불태워졌기 때문이다.

다만 문장 중심, 정치 중심으로 아직 철학적인 단계에 이르지 못한 그때까지의 유학이 실천 중심, 도학 중심의 이학적(理學的)인 성리학의 단계로 나아가는 물꼬를 튼 인물이라는 것이 그에 대한 전통적인 평가이다.

 

 

은행나무(보호수)

 

 

* 소재지 :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35

* 수종 : 은행나무

* 수령 : 400년

* 지정번호 8-2

* 지정일자 : 1982.10.29

* 나무규격

- 수고 : 25m

- 둘레 : 8.8m

 

 

 

한국의 서원과 향교에는 거의 예외 없이 은행나무가 살고 있다.

서원에 은행나무를 심은 것은 공자가 살구나무 아래서 제자를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의 서원에 살구나무 대신 은행나무를 심은 이유는 알 수 없다.

한 가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살구나무의 ‘행’과 은행의 ‘행’이 같아서 오래 살지 않는 살구나무보다 천년 이상 살 수 있는 나무를 택했을 가능성이 크다.

옛날에는 나무를 이해할 때 분류학적인 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사정에 따라 간혹 원산지 나무와 다른 이름을 사용했다.

중국의 측백나무를 잣나무, 회화나무를 느티나무로 인식한 것처럼 살구나무를 은행나무로 대체한 것도 일종의 문화적

격의(格義)로 볼 수 있다.

격의는 번역과 같은 의미이고, 한 나라의 문화를 수입할 경우 수입국의 상황에 따라 뜻을 맞추는 것이다.

 

단풍은 잎이 절반쯤 바닥에 떨어져 주변을 물들일 때 가장 여행의 적기이며 아름답다.

개인적 생각으로 볼 때 11월 7일 전후 찾는게 좋을 듯 싶다

 

도동서원 앞뜰에는 1607년 사액을 기념해 심었다는, 수령 400년의 거대한 은행나무가 기둥 같고 들보 같은 가지들을 사방으로 내뻗고 우거져 있다.

높이 20여m, 지름이 약 2.5m에 이르는 큰 나무다.

가지들이 부러질 우려가 있어 시멘트 기둥들로 받쳐놓았다.

도동서원의 은행나무는 4백 년에 걸쳐 잘 자랐다.

아름답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크다. 웅장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커다란 나무이다.

이곳 사람들은 서원 입구에 서 있는 이 나무를 그냥 서원목이라고 부른다. 도동서원의 상징이라는 의미다.

이 은행나무는 키가 25미터를 훌쩍 넘는다. 줄기의 둘레도 8.7미터나 된다.

나뭇가지는 사방으로 넓게 퍼졌다.

동쪽의 가지는 무려 30미터나 되는 길이로 퍼져나갔고, 남쪽으로 난 가지도 28미터까지 펼쳤다.

남쪽으로 뻗은 가지는 자신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아예 땅바닥에 드러누웠다.

그러나 나무는 누워서도 의젓하다. 누운 가지에서는 오랜 세월이 읽힌다.

길게 뻗어나가는 가지를 부러뜨리지 않으려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몸을 낮추어간 시간이 생생하게 눈에 보인다.

이곳이라고 해서 큰 바람이 불지 않았을 리 없다. 거센 눈보라도 그냥 지나치지는 않았을 게다.

그러나 간단없이 다가오는 모든 시련에도 긴 가지 하나 부러뜨리지 않고 가만히 내려앉아 이제는 편안히 누웠다.

남쪽으로 뻗은 가지는 한없이 편안해 보인다.

그러나 북쪽의 가지는 이미 30년 전에 부러졌다. 나무의 전체적인 균형은 깨졌다.

북쪽의 가지도 원래는 다른 쪽 가지들과 마찬가지로 우람했을 것이다.

당시에 부러진 북쪽 나뭇가지를 잘라냈더니 8톤 트럭에 꽉 찼다는 말이 전한다. 그만큼 큰 나무다.

1992년 12월부터 1천 2백만원 의 예산을 들여 토양소독제, 해충 방제를 실시하고 배수로 설치, 생장촉진 제 주사 등으로 치료

작업을 실시했다

나무의 생김새는 불균형하지만 묘하게도 불편해 보이지는 않는다. 왜 그럴까. 아마 나무의 크기 때문일 게다.

워낙 큰 나무라 가지가 하나 잘려나가도 도인처럼 넉넉해 보이는 것 같다.

이제 도동서원을 찾는 이들은 서원보다도 편안히 누워 있는 큰 나무를 보기 위해 이곳에 온다.

서원을 지은 사람도, 또 서원에 배향된 사람도 모두 가고 없지만 이 한 그루의 은행나무가 이곳을 그리워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나무는 ‘김굉필 나무’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

대구광역시 특유의 나무 이름 호명법이다.

나무를 심은 사람도 중요하지만, 나무를 통해 기억해야 할 사람을 우선한 것이다.

답사 때마다 이처럼 사람 이름이 붙어 있는 나무를 만나는 일은 몹시 반갑다. 나무와 함께 금방 누군가를 떠올릴 수 있어서 좋다.

 

 

# 사진첩

 

도동서원 전경

 

 

은행나무 보호수

 

 

 

문경공한훤당김선생

오백주기추모비

 

 

수월루

 

환주문

 

 

 

도동서원 강당

 

 

도동서원

중정당

 

거인재

 

 

거의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