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연서원 보호수(느티, 은행나무)
@ 탐방일 : 2020. 09. 19
예연서원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읍 가태리에 있는 조선 후기에 세운 서원.
예원 서원(禮淵書院)은 망우당(忘憂堂)곽재우(郭再祐)[1552~1617]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하여 건립된 서원이다.
뒤에 곽준(郭)[1551∼1597]을 추향하였다.
곽재우의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계수(季綏), 호는 망우당(忘憂堂),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조직하여 경상도 일대에서 큰 활약을 하며 공을 세웠다.
저서로는 『망우당집(忘憂堂集)』이 있다.
곽준의 자는 양정(養靜), 호는 존재(存齋),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곽재우의 재종숙이다.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웠고, 안음 현감(安陰縣監)을 지냈으며 병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예원 서원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읍 구례길 123[가태리 539]에 위치한다.
한정리[한정 초등학교] 버스 정류장[달성군 유가읍 한정리 596]에서 남동쪽으로 25m 직진하면 예연서원 안내판이 있다.
안내판을 따라 좌회전한 후 약 500m 이동하면 삼거리가 나오고, 삼거리에서 동쪽으로 좌회전한 후 약 450m 직진하면 다시 예연서원 안내판이 나온다.
안내판의 방향을 따라 좌회전한 후 1.1㎞ 이동하면 예연서원이 있다.
예연서원은 1618년(광해군 10) 곽재우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하여 건립한 충현사(忠賢祠)에서 유래한다.
현풍 현감으로 있던 유천지(柳千之)가 규모를 확대하여 서원으로 승격시키고 곽준을 추향하였다.
1677년(숙종 3) 예연서원으로 사액되었다.
흥선 대원군 집권기 때인 1871년(고종 8) 훼철되었으나, 1922년 지역 사림과 후손들이 강당을 복원하였다.
1950년 6·25 전쟁으로 장판각과 전사청을 제외한 강당 등이 모두 소실되었으나 1977~1984년에 걸쳐 복원하였다.
예연서원은 3개의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외삼문인 숭의문(崇義門)을 들어서면 강당인 경의당(景義堂)이 강학 공간을 형성하고, 경의당 뒤로 사당인 충현사(忠賢祠)가 제향 공간을 이루며, 경의당 우측으로 전사청(典祀廳)이 별도의 공간을 형성한다.
숭의문은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경의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중앙의 마루를 중심으로 양쪽에 협실을 들인 중앙 협실형(中央夾室形)이다.
충현사는 정면 3칸, 측면 1.5칸 규모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내부는 통문으로 처리하였으며 박공(朴工) 측면에 풍판(風板)을 설치하였다.
전사청은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며 향례(享禮) 때 제수를 마련하여 두는 곳이다.
2005년 이루어진 달성군 일반 동산 문화재 다량 소장처 실태 조사에 따르면 예연서원에는 현판과 책판 등이 소장되어 있다.
현판의 경우 예연서원, 숭의문, 충현사 등 13점이 각 건물에 걸려 있다.
책판의 경우 장판각(藏板閣)에 보관되어 있는데, 망우당 선생 문집 책판(부) 창의록 책판(忘憂堂先生文集冊板(附)倡義錄冊板)을 비롯하여 『괴헌집(槐軒集)』, 존재 선생 실기(存齋先生實記) 등 4종류 총 255점이 있다. 이 중 망우당 선생 문집 책판(부) 창의록 책판은 대구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39호, 존재 선생 실기는 대구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40호로 지정되었다.
이 밖에 예연서원 마을 입구에는 곽재우와 곽준의 신도비가 함께 세워져 있다.
한편 예연서원은 1995년 5월 12일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11호로 지정되었다.
예연서원은 1618년 건립된 충현사에 연원을 둔 역사가 깊은 서원이다.
현재 13점의 현판과 두 종류 총 255점의 책판을 소유하고 있으며, 그중 망우당 선생 문집 책판(부) 창의록 책판과 존재 선생 실기는 대구광역시 문화재로 지정되어 가치를 인정 받고 있다
홍의장군 곽재우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전투, 화왕산성전투에 참전한 의병장.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계수(季綏), 호는 망우당(忘憂堂). 경상남도 의령 출신.
곽위(郭瑋)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부사(府使) 곽지번(郭之藩), 아버지는 황해도관찰사 곽월(郭越), 어머니는 진주강씨(晉州姜氏)이다. 조식(曺植)의 외손서이며, 김우옹(金宇顒)과는 동서 사이이다.
1585년(선조 18) 34세의 나이로 별시(別試)의 정시(庭試) 2등으로 뽑혔다.
그러나 지은 글이 왕의 뜻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발표한 지 수일만에 전방(全榜)을 파해 무효가 되었다.
그 뒤, 과거에 나갈 뜻을 포기하고 남강(南江)과 낙동강의 합류 지점인 기강(岐江: 거름강) 위 돈지(遯池)에 강사(江舍)를 짓고 평생을 은거할 결심이었다.
그러나 그 곳에 머문 지 3년 만인 1592년 4월 14일에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관군이 대패하자, 같은 달 22일에 의병을 일으켜 관군을 대신해 싸웠다.
그 공으로 같은 해 7월에 유곡찰방(幽谷察訪)에, 곧 이어 형조정랑에 제수되었다.
10월에는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승진해 조방장(助防將)을 겸했다.
이듬해 12월 성주목사에 임명되어 삼가(三嘉)의 악견산성(岳堅山城) 등 성지(城池) 수축에 열중하다가 1595년 진주목사로 전근되었으나 벼슬을 버리고 현풍 가태(嘉泰)로 돌아왔다.
1597년 명나라와 일본간에 진행되던 강화 회담이 결렬되고 일본의 재침이 뚜렷해지자, 조정의 부름을 받고 다시 벼슬에 나아가 경상좌도방어사로 현풍의 석문산성(石門山城)을 신축했다.
그러나 그 역(役)을 마치기도 전에 왜군이 침입해 8월 창녕의 화왕산성(火旺山城)으로 옮겨 성을 수비했다.
그 뒤 계모 허씨가 사망하자 성을 나와 장의를 마친 뒤, 벼슬을 버리고 울진으로 가서 상을 입었다.
1599년 다시 경상우도방어사에 임명되었으나 상중임을 구실로 나가지 않았다.
그해 9월 경상좌도병마절도사에 제수되었으나 10월에 이르러서야 부임하였고, 이듬해 봄에는 병을 이유로 벼슬을 버리고 귀향했다. 이 문제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영암(靈巖)으로 귀양갔다가 2년 만에 풀려났다.
그 뒤 현풍 비슬산(琵瑟山)에 들어가 곡식을 금하고 솔잎으로 끼니를 이어가다가, 영산현(靈山縣) 남쪽 창암진(滄巖津)에 강사를 짓고 망우정(忘憂亭)이라는 현판을 걸고 여생을 보낼 설계를 세웠다.
그러나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고 거절할 수 없어 1604년(선조 37) 찰리사(察理使)가 되어 인동(仁同)의 천생산성(天生山城)을 보수했다.
이어 선산부사로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찰리사라는 벼슬마저 사퇴했다.
곧, 안동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고, 그해 10월 절충장군용양위부호군(折衝將軍龍驤衛副護軍)에 제수되고, 다음달 가선대부용양위상호군(嘉善大夫龍驤衛上護軍)로 승진했다.
그 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한성부우윤을 역임하고,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다시 경상좌도병마절도사·용양위부호군을 거쳐 이듬해 경상우도병마절도사·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610년 광해군의 간청으로 서울에 올라가 호분위(虎賁衛)의 부호군, 호분위의 대호군(大護軍) 겸 오위도총부의 부총관(副摠管)에 제수되었고, 이어 한성부좌윤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이에 함경도관찰사로 바꾸어 발령했다.
1612년(광해군 4) 전라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칭탁하고 나가지 않았으며, 이듬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신구(伸救)하는 소를 올리고 낙향했다. 1616년 창암강사에서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를 제수받았으나 역시 나가지 않고, 이듬해 죽었다.
의병 활동 초기에는 의령의 정암진(鼎巖津: 솥바위 나루)과 세간리(世干里)에 지휘 본부를 설치하고 의령을 고수하는 한편, 이웃 고을인 현풍·창녕·영산·진주까지를 작전 지역으로 삼고 유사시에 대처했다.
스스로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하여 적군과 아군의 장졸에게 위엄을 보이고, 단기(單騎)로 적진에 돌진하거나 의병(疑兵: 적이 의심하도록 하기 위한 위장 병사)을 구사해 위장 전술을 펴서 적을 직접 공격했다.
그리고 유인해 매복병으로 하여금 급습을 가한다든가, 유격전을 펴서 적을 섬멸하는 전법을 구사했다.
수십 인으로 출발한 의병은 2,000인에 이르는 큰 병력을 휘하에 가질 수 있었으며, 그 병력을 바탕으로 많은 전공을 세웠다.
1592년 5월 하순경 함안군을 완전 점령하고 정암진 도하작전을 전개한 왜병을 맞아 대승을 거둠으로써, 경상우도를 보존해 농민들로 하여금 평상시와 다름없이 경작할 수 있게 했다.
왜군의 진로를 차단해 계획한 호남 진출을 저지할 수 있었다.
또한, 기강을 중심으로 군수 물자와 병력을 운반하는 적선을 기습해 적의 통로를 차단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현풍·창녕·영산에 주둔한 왜병을 공격해 물리쳤다.
그해 10월에 있었던 김시민(金時敏)의 1차 진주성 전투에는 휘하의 의병을 보내서 승리로 이끄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정유재란 때는 밀양·영산·창녕·현풍 등 네 고을의 군사를 이끌고 화왕산성을 고수해 왜장 가토[加藤淸正]의 접근을 막았다.
필체가 웅건, 활달했고 시문에도 능했다.
묘지는 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신당리에 있다.
죽은 뒤에 사우(祠宇)에 ‘예연서원(禮淵書院)’이라는 사액이 내려졌고, 1709년(숙종 35)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가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망우당집』이 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문화체육부가 제정한 1995년 12월의 ‘문화의 인물’로 선정되었다.
보호수
느티나무(곽재우장군나무)
각재우, 곽준 신도비 앞의 느티나무 보호수를 곽재우장군 나무라고 부른다
은행나무(곽준나무)
예연서원 앞의 보호수 은행나무를 '곽준 나무'라고 부른다
수령 300년이 된 은행나무로, 황석산성에서 왜군과 전투를 벌이다 두 아들과 며느리까지 함께 전사한 곽준 선생을 기리기 위해 "곽준나무"라 이름지었다.
충렬공 곽준선생은 곽재우선생의 제종숙(아버지의 육촌형제, 7촌 아저씨)으로, 의병 김면 휘하에서 공을 세운 분이다.
# 사진첩
달창지
곽재우나무
홍의장군 신도비와 충렬공 신도비,
1592년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왜군 퇴치에 큰 공을 세웠던 망우당 곽재우(1552~1617) 선생의 업적을 기록한 비와, 1597년 정유재란 때 안음현감으로 재직하면서 함양의 황석산성을 지키다 순절한 충렬공 곽준(1551~1597)선생의 업적을 기록한 비이다.
이 비각은 나라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린다하여 '땀나는 신도비'라고 부른다.
가태2리 마을회관
곽준나무
예연서원 앞 은행나무
예연서원 정문 숭의문(崇義門)
예연서원 강당,
유생들을 교육하는 강당의 명칭은 경의당(景義堂, 바른 도리)이며, 강당 내부 벽에 숙종 임금의 사액제문이 걸려 있다.
예원서원이란 현판 글씨는 1958년 서원 복원에 대비하여 초대 대통령 우남 이승만 박사가 미리 써 둔 글씨이다.
경의당
전사청
장판각
충의문
충현사
곽재우, 곽준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충현사(忠賢祠),
이 현판 역시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글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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