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사 보호수(인악대사 심지대사 나무)
@ 탐방일 : 2020. 09. 24
동화사
현재까지 전해지는 향가 가운데 가장 나중에 지어진 것은 동수대전(桐藪大戰)에서 태조 왕건을 구출하고 대신 죽어간 두 장수 신숭겸(申崇謙)과 김락(金樂)을 기리는 「도이장가」(悼二將歌)이다.
고려 태조가 즉위한 뒤 7~8년 동안은 고려와 후백제 사이의 긴장관계는 소강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왕건이 소백산맥을 넘나드는 요충지 문경을 점령하자 이에 자극받은 견훤이 친고려정책을 펴는 신라에 대하여 공세를 펴게 되고, 결국 두 나라 사이의 관계는 악화되어 큰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다.
927년 9월 견훤은 고울부(高鬱府, 지금의 영천)를 습격한 뒤 신라의 왕도 서라벌로 쳐들어가 경애왕을 죽이고 비빈을 욕보이며 재보를 약탈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왕건은 사신을 신라로 보내 조문하는 동시에 친히 정예 기병 5천을 거느리고 구원에 나서 후백제군의 퇴로를 차단했다.
첫 싸움은 팔공산 동쪽 기슭 은해사 입구에서 벌어졌다.
치열한 전투에서 고려군은 대패하여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후퇴한 왕건은 신숭겸이 이끄는 증원군과 합세하여 팔공산 남쪽 동수 입구, 지금의 지묘동 일대에 진을 치고 다시 한 번 후백제군과 일대 접전을 벌였다.
결과는 고려군 1만 명의 전멸에 가까운 참패였다.
이 싸움에서 왕건은 자신과 옷을 바꿔 입고 분전하다 전사한 신숭겸과 김낙 등의 도움으로 간신히 포위망을 뚫고 목숨만을 구해 달아났다.
앞서 든 「도이장가」의 먼 배경이자 왕건 생애 최대의 패전으로 기록되는, 후삼국 통일전쟁의 3대 전투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동수대전의 전말이다.
동수대전의 승패에 적잖은 영향을 미친 것이 창건 이래 줄곧 동수(桐藪) 또는 동사(桐寺)로 불리던 지금의 동화사(桐華寺)이다.
그 무렵의 동화사는 견훤 세력과 깊이 밀착되어 있던 진표율종(眞表律宗), 즉 백제계 법상종(法相宗) 사찰로 신라 영토 안의 견훤 세력 근거지였다.
때문에 동화사에서는 알게 모르게 견훤을 지원했고, 이런 도움에 힘입어 견훤은 왕건에게 쓰라린 패배를 안겼던 것이다.
이렇게 후삼국기 삼국의 쟁패에 깊이 개입했던 동화사는 신라 소지왕 15년(493)에 극달화상이 창건하여 유가사(瑜伽寺)라 이름하다가 흥덕왕 7년(832) 심지왕사가 중창할 때 오동나무 꽃이 상서롭게 피어나 동화사라 고쳐 불렀다고 「동화사사적비명」에 전한다.
그러나 창건연대는 그대로 믿기 어렵다.
유가종이라고도 일컫던 법상종은 중국에서도 7세기 후반에나 등장하는데 신라에 불교가 공인되기도 전인 5세기 말에 이미 ‘유가’라는 이름을 쓰는 절이 생겼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심지왕사 때의 중창을 사실상 창건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신라와 고려시대를 통하여 대가람으로 성장한 동화사는 진표율사가 법상종의 근본도량으로 삼은 금산사, 그의 제자 영심이 머물던 법주사와 더불어 법상종 3대 사찰의 하나로 자리잡게 된다.
이후 동화사는 고려의 보조, 조선의 사명을 비롯한 여러 스님들에 의해 여덟 차례의 중창을 거쳐 오늘에 이른다.
팔공산순환도로에서 갈라져 동화사 입구로 접어들면 이내 ‘八公山桐華寺鳳凰門’(팔공산동화사봉황문)이란 편액을 단 일주문이 나선다.
일주문을 지나고도 경사가 만만찮은 길을 한참 올라야 절 건물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절은 크게 대웅전 영역, 영산전 영역, 금당암 영역의 세 구역으로 구분된다.
대웅전 영역은 동화사의 중심영역이라 하겠는데 대웅전, 누각인 봉서루(鳳棲樓), 사무실과 요사로 쓰이는 강생원(降生院)과 심검당, 그밖에 대웅전 서쪽으로 줄지어 선 고만고만한 전각들로 이루어진다.
영산전·천태각이 별도의 담장으로 둘러싸인 영산전 영역은 대웅전을 오른쪽으로 비껴 더 안쪽으로 들어가야 볼 수 있다.
금당암 영역은 계곡 하나를 건너 동쪽에 독립된 영역을 형성하고 있다.
참선 수행하는 스님들이 정진하는 선원으로 일반인의 출입을 제한한다.
동화사는 큰절말고도 비로암·부도암·양진암·내원암·약수암·염불암 등 6개의 암자를 거느린 큰 절이며, 보물 6점, 대구광역시 지정 문화재 7점을 소유한, 팔공산을 대표하는 사찰이다.
동화사 입구 마애불좌상
심지스님과 인연이 깊은 탓인지 동화사에서 우리가 처음 대하게 되는 것은 그가 손수 정을 들고 새겼다는 말이 전하는 마애불좌상이다.
신체의 비례가 무난하고 조각기법이 세련된 통일신라 때의 우수한 마애불로 일주문 앞 벼랑위에 높직이 앉아 있다.
일주문 앞 바위 벼랑 위에 높직이 앉아 아래를 굽어보고 있는 이 불상은 몸체 높이가 106㎝로 크지도 작지도 않아 일단 친밀감이 든다.
동그랗게 복스런 얼굴에는 도도록한 눈등과 입가에 생글거리는 미소가 합쳐져 명랑한 표정이 은은하다.
너무 긴장하지도 그렇다고 풀어지지도 않아 편안한 어깨에서 드리워진 두 손은 항마촉지인을 짓고 있으며, 두 발은 결가부좌한 딱딱한 자세가 아니라 오른발을 가볍게 풀어 아래로 늘어뜨려 한결 자유스럽다.
무엇보다 마애불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것은 구름무늬이다. 대좌를 두껍게 감싸면서 뭉글뭉글 생기 있게 피어오르기도 하고 달팽이처럼 도르르 머리를 말고 꼬리를 끌며 비껴 날기도 하는 구름조각들이 아주 생생하여 불상은 미소 띤 얼굴로 금세 구름을 타고 내려올 듯하다.
하루 중 저녁 무렵이 보기에 좋다. 그것도 늦가을의 저녁해가 산마루에 걸렸을 때가 가장 좋다.
이때쯤이면 북적대던 발길도 뜸해지고 바위면에는 순하고 부드러워진 저녁햇살이 비껴들어 구름무늬며 광배의 불꽃무늬며 불상의 얼굴 표정이 낱낱이 잠깨어 일어난다.
그리하여 바위 속의 불상은 온기를 머금고 가벼운 숨을 쉬며 살아나는 것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무릎 위의 오른손에 약합이 들려 있으므로 약사여래상이라 주장하기도 하고,
유희좌에 가깝게 약간 풀린 발 모습과 동화사가 법상종 사찰이었다는 점을 근거로 미륵불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거야 어떠하든 신체비례가 무난하며 조각기법이 화려하고 세련되어 당대를 대표할 만한 수작임에는 틀림이 없다.
통일신라 9세기의 작품으로 본다.
보물 제243호이다.
인악대사비
동화사의 비전(碑田)은 큰 절과 금당선원이 갈리는 길머리에 있다.
중수비·송덕비·사적비 따위가 꽤 여럿 비각의 안팎에 늘어서 있고, 그 가운데 ‘仁岳堂’(인악당)이라는 편액을 붙인 허름한 비각 안에 인악(仁岳)스님의 비가 있다.
비는 조선시대에 세워진 다른 비와 별로 다를 바 없이 평범하다.
다만 귀부는 달리 볼 수 없는 야릇한 모양을 하고 있으니, 거북이 아니라 알을 품고 있는 닭과 흡사하게 생긴 봉황이 웅크리고 앉았다.
풍수적으로 동화사가 봉황과 관계가 깊다보니 이런 발상이 나온 것 같다.
예로부터 봉황은 대나무 열매만 먹고 오동나무가 아니면 깃들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동화사는 그 터가 봉황이 알을 품는 형국이라 전해지고 또 절을 지을 때 오동나무 꽃이 만발하여 절이름도 거기서 유래했다지 않는가.
일주문의 이름은 봉황문, 누각의 이름 또한 봉황이 깃들인다는 뜻의 봉서루. 대충 이런 생각의 연장에서 비의 받침을 봉황으로 만든 듯하다.
솜씨야 하잘것없지만 발상이 재미있다.
보통 거북으로 이루어지는 비 받침과는 달리 봉황으로 비의 받침을 삼았다.
비문은 1808년 당시 경상감사로 있던 김희순(金羲淳, 1757~1821)이 짓고 글씨도 썼다.
행서로 써내려간 글씨가 대단히 유려하며 물방울이 떨어지듯 또록또록하고 분명하다.
인악대사비의 탁본
김희순이 글을 짓고 글씨도 쓴 비로, 행서로 써내려간 글씨가 대단히 유려하다.
비의 주인공 인악스님(1746~1796)은 동시대의 연담 유일(蓮潭 有一, 1720~1799)과 쌍벽을 이루던 고승이었다.
유일은 호남지방에서, 그는 영남에서 각각 불교학의 거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1764년 벗들과 함께 비슬산 용연사에서 글공부를 하다가 청정하게 수행하는 스님들의 모습에 감동하여 출가하였다 한다.
1790년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수원 용주사를 지을 때 불상 점안(點眼)의 증사(證師)로 뽑혀 「불복장원문경찬소」(佛腹藏願文慶贊疏)와 「용주사제신장문」(龍珠寺祭神將文)을 지어 정조를 감탄시키기도 했다.
당간지주
통일신라 하대에 만든 것으로 여겨지는 높이 3.1m의 당간지주이다.
비각 바로 옆에 두 지주가 64㎝의 간격을 두고 마주서 있다.
안쪽에는 아무런 조각이 없으며 밖의 3면에도 꺾이는 곳에 모를 살짝 죽였을 뿐 다른 장식은 없다.
다만 등의 중심을 아래에서 위로 가로지르는 긴 능선(稜線)을 새기고 지주의 가운데쯤에서 3면을 얕게 깎아내어 변화를 주고 있을 뿐이다.
꼭대기에는 지주의 안쪽으로 네모진 홈을 만들고, 밑동에는 둥그런 구멍을 뚫어 당간을 고정시킬 수 있도록 했다.
당간을 세웠던 간대는 남아 있지 않다.
아랫부분의 폭 74㎝ 두께 34㎝ 높이 3.1m의 크기이다.
위로 갈수록 폭과 두께가 줄어들기는 하나 그 정도가 약해 넓적하고 펑퍼짐할 뿐 상승감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통일신라 하대의 작품으로 추정한다.
보물 제254호이다.
부도
당간지주의 뒤쪽 소나무 그늘 아래 호젓이 자리잡고 있다.
원래 동화사에서 1㎞ 정도 떨어진 도학동의 내학마을에 쓰러져 있던 것을 옮겨 세운 것이다.
지대석을 제외하곤 모두 팔각으로 이루어진 팔각원당형 부도이다.
형태가 안정되고 균형이 잘 잡힌 팔각원당형 부도이다.
지대석을 공들여 깎았다.
네모진 평면 위로 세 줄의 굄대를 올린 뒤 석탑기단의 중대석처럼 허리를 줄였다가 다시 제일 위쪽 굄대의 폭으로 넓혀서 평평하게 마무리하여 하대석을 받칠 수 있도록 했다.
허리 부분에는 면마다 가늘고 긴 4개씩의 안상을 자잘하게 새겼다.
하대석과 중대석을 통돌로 만들고 상대석은 별개의 돌로 만들었다.
상대석에는 열여섯 잎 연꽃이 푸짐하게 피어난다. 몸돌은 면마다
양쪽으로 우주를 하나씩 세우고 윗부분에는 인방을 지른 뒤 첨차까지 새겨 목조가구의 흉내를 내었다.
귀마루를 굵게 새긴 지붕돌은 바닥의 반전이 심하여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몸돌과 만나는 안쪽까지 들여다보인다.
귀마루가 흘러내리는 모서리마다 끝이 깨져 나간 걸로 보아 귀마다 귀꽃이 달려 있었던 듯하다.
상륜은 없어진 것을 만들어 얹었으나 어색하다.
높이 1.72m로 작고 대단한 기교를 부린 바도 아니지만 형태가 안정되고 균형 잡혀 가벼운 미감을 유발하는 참한 부도다.
고려 초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한다.
공식 명칭은 도학동 승탑, 보물 제601호이다.
금당암 동서 삼층석탑
금당암 극락전의 측면 동서로 나뉘어 서 있는 신라시대 일반형 쌍탑이다.
쌍탑이라고는 하지만 현재의 모습은 두 탑이 사뭇 다르다.
동탑을 후대에 보수했기 때문이다.
허훈(許薰, 1836~1907)이라는 조선 말기의 인물이 쓴 「금당탑기」(金堂塔記)가 남아 있는 걸로 보아 그 무렵 보수가 이루어진 듯한데, 이때의 보수가 얼토당토않아 심하게 조화와 짜임새를 잃고 있을 뿐더러 서탑의 모양과도 상당히 다른 결과가 되었다.
기단의 대부분을 교체했는데 부드러움이 전혀 없고 무거우며 둔할 뿐이다.
탱주나 우주가 있어야 할 곳에 대나무 마디를 새긴 것도 낯설고, 상층기단의 중대석은 지나치게 폭이 좁아 탑 전체를 불안정하게 보이도록 한다.
그러나 상층기단 갑석 윗부분은 균형과 비례에 이상이 없는 안정된 자태이다.
탑신은 지붕돌의 층급받침이 넷이라는 점을 빼면 일반적이다.
특히 노반, 복발, 앙화, 2개의 보륜, 보개, 1개의 보주 등 상륜부가 거의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어 신라 석탑의 상륜부를 실물로 볼 수 있는 귀한 탑이다.
금당암 극락전을 가운데 두고 동서로 서 있는 신라시대 일반형 쌍탑이다.
사진의 왼쪽이 서탑이고 오른쪽이 동탑이다.
동탑의 보호난간 안에는 석등 하나와 상석이 함께 들어 있다.
상석은 기단을 수리할 때 마련했을 것이고 설치해야 할 까닭이 있었을 테지만 역시 지나치게 둔중하여 없느니만 못한 꼴이 되었다.
석등 또한 다른 부분은 얌전한데 갈아 끼운 것이 분명한 화사석의 모서리가 상대석 밖으로 비어져 나올 만큼 폭이 넓어 우스운 모양이 되었다.
탑과 지나치게 가깝게 비껴선 경위도 알 수 없다.
서탑은 상륜부를 제외하곤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지대석이 완전히 땅 위로 드러나 마치 삼중의 기단처럼 보인다.
그 지대석 아래로도 잘 다음어진 석재들이 사방을 돌아가며 놓였는데 본래 이 탑의 일부인지 아니면 다른 용도로 쓰이던 것인지 알 길이 없다.
이중의 기단은 상하층에 탱주가 하나씩으로 줄어든 점 외에는 신라 석탑의 기본적인 모습이다.
탑신은 동탑과 거의 같고, 상륜부에는 노반과 앙화만이 가늘고 긴 찰주에 꽂혀 있을 따름이다.
1957년 해체·보수하였는데, 그때 1층 몸돌에서 99개의 작은 탑과 사리장치가 발견된 바 있다.
비례가 좋고 균형이 잘 이루어져 산뜻하고 깔끔한 느낌을 주는 탑이다.
높이가 동탑은 5.62m, 서탑은 5.24m이다. 허훈의 「금당탑기」에는 신라 경문왕 3년(863) 왕이 죽은 민애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사리 7과(顆)를 봉안하여 석탑을 세웠으며, 헌강왕 1년(875) 삼강대사(三剛大師)가 탑을 금당으로 옮겨 세웠다는 내용이 있다.
그 글은 분명히 탑을 보수할 때 탑 안에 갈무리되었던 기록에 근거했을 것이므로 두 탑은 863년에 세워졌음에 거의 틀림이 없다.
같은 산중의 비로암 삼층석탑 또한 이 해에 세워진 것이 확실해 이를 뒷받침한다.
풀리지 않는 의문은 왜 두 탑이 전각의 앞쪽에 놓이는 일반적인 모습과 달리 극락전의 양 옆에 있느냐 하는 점이다.
혹 삼강스님이 옮기면서 그리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추측일 따름이다.
동서 두 탑이 함께 보물 제248호로 지정되어 있다.
극락전과 수마제전
금당선원 서편, 두 탑을 좌우로 거느리고 선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계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 극락전이다.
광해군 14년(1622)에 중창되었다고 전해지는 조선 중기의 건물로 낡은 대로 단청이 환하면서도 고색을 머금어 눈길을 끌지만 극락전에서 주목해야 할 곳은 그 기단과 초석들이다.
신라 통일기의 건축 기단은 가장 아래 길게 다듬은 돌을 이어 외벌대의 지대석을 돌리고, 그 위에 안으로 약간 들여 군데군데 돌기둥을 새기거나 세우고 그 사이에 넓적한 면석을 끼워 벽체를 이룬 다음, 다시 벽체보다 앞으로 내밀어 넓은 덮개돌, 곧 갑석을 덮어 마무리한다. 탑의 기단을 연상케 하는 이런 기단을 보통 가구식 기단이라고 부른다.
갑석의 일부가 없어져 새 돌로 보충하기는 했지만 극락전 기단이 바로 가구식 기단이다.
신라시대의 것임에 분명한 이 기단에서 매력 있는 곳은 네 귀퉁이의 갑석이다.
돌 하나를 꺾쇠 모양으로 다듬은 귓돌에는 탑의 지붕돌 모서리처럼 마루를 중심으로 가볍게 물매를 지워 멋을 내었다.
흘려보면 대수롭지 않지만 기단에 정성을 들였음을 보여주는 구석이니, 아마도 그 위에 올라앉았던 신라 때의 건물 또한 무척 격조 있는 건물이었으리라.
단청이 환하고 고풍스러워 눈길을 끌지만 통일신라기에 만들어진 극락전의 가구식 기단은 특히 주목된다.
기단 위에는 기둥 놓을 자리[柱座]와 이어져 고막이자리가 날개처럼 달린 네모진 주춧돌, 주추와 주추 사이에 놓여 하인방을 받치는 고막이돌, 그리고 어간의 신방석3) 따위가 그대로 남아 있다. 모두 고격을 보여주는 자취들이다.
뒷면 어간에는 이 신방석을 이용하여 신방목을 끼워 넣기도 하였는데, 밖으로 내민 부분을 바퀴처럼 둥글게 다듬고 안팎으로 바람개비처럼 무늬를 넣기도 했다.
극락전 안에는 목조 아미타삼존상이 봉안되어 있다. 모
두 키가 한 길이 넘는 큰 불상들이다.
1703년에 그려진 후불탱화는 어떤 연유인지 모르나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1호이다.
극락전 뒤편으로 수마제전(須摩提殿)이라는 특이한 이름을 가진 법당이 하나 있다.
‘수마제’는 고대 인도어인 산스크리트를 소리나는 대로 옮긴 말로, 뜻으로 번역하면 극락이란 말이 된다.
다른 절에도 법당에 이 이름을 붙인 경우가 드물지만 있다. 따라서 법당은 극락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한 절에 같은 이름의 법당이 둘이 되는 셈이니 이상스럽다.
궁금증은 마구 피어오르지만 워낙 긴 역사 속에서 온갖 변화를 겪었을 테고 그것이 기록으로 전하지 않으니 풀 길이 없다.
대웅전
큰 절의 법당치고는 그리 크다고 할 수는 없으나 높직한 기단 위에 올라 앉아 있어 훤칠하게 보인다. 꽃창살이 매우 다채롭다.
동화사 대웅전은 꽃창살이 다채롭고 귀기둥이 특출하며 옆모습이 아름답다.
앞면의 문들을 꽃살문으로 장식하는 경우는 더러 볼 수 있지만 동화사 대웅전처럼 옆문에다 뒷문까지 꽃살문을 단 경우는 별로 없을 것이다.
더구나 꽃살무늬조차 어간과 협간이 다른데다 옆면이 다르고 뒷면도 달라서 보는 눈을 반짝이게 한다.
귀기둥은 모두 다른 기둥보다 훨씬 굵은 아름드리 나무를 다듬지 않고 그대로 기둥으로 삼았다.
쉬운 일 같지만 집 짓는 대목이나 일을 시키는 주인이나 또 시주자가 있었다면 시주자의 뜻이 서로 어긋나서는 될 수 없는 노릇이다.
우리 건축에서나 볼 수 있는 인공 속에 자연을 끌어들이는 지혜요 자연과의 교감이다.
정면에서 보는 맛도 좋지만 동쪽 마당에서 바라보는 법당의 옆모습은 특히 좋다.
기단은 한 단 더 높아 보이고 귀기둥의 구부러진 모습이 드러나며 하늘을 배경으로 합각마루·귀마루·처마선이 이루는 곡선이 크고 넉넉하되 무겁지 않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앞면과 옆면의 칸수가 같지만 앞면의 칸살이 더 넓어 평면은 동서로 긴 장방형이다. 영조 3년(1727)에서 같은 임금 8년(1732) 사이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한다.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0호이다.
대웅전과 마주보이는 봉서루 뒤편에는 ‘嶺南緇營牙門’(영남치영아문)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임진왜란 당시 동화사는 영남의 승군 총사령부가 설치되었던 절이고, 사명스님이 그 지휘자였다.
편액은 당시의 정황을 알려주는 유물이다.
동화사에는 이밖에도 ‘사명당대장’(泗溟堂大將)이라고 ‘대장’이라는 호칭을 붙인 사명스님의 진영을 비롯하여 승병활동을 알려주는 몇 점의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인악대사
동화사 주 출입문이 지금은 서쪽으로 옮겨 웅장한 동화문으로 바뀌었지만, 몇 년 전만 해도 남쪽으로 난 출입문 봉황문이 있었다.
동화교에서 과거 상가가 있던 길로 접어들면 좌측은 세계적인 규모라고 하는 통일 대불과 그 관련시설들이 있고, 곧장 올라가면 '팔공산동화사봉황문'이라는 편액이 걸린 일주문이 나온다.
거기서 조금더 올라가면 당간지주(보물 제254호)가 나오고 옆으로 보면 인악당이라는 퇴락해서 조금은 음침한 여느 비와는 달리 비신 받침을 봉황으로 한 비각이 나온다.
바로 '인악대사비(仁嶽大師碑)'인데 이 비문에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인악스님에 관한 기록이 있다.
인악대사(仁嶽大師)의 속성(俗姓)은 李氏, 본관(本貫)은 성산(星山), 휘(諱)는 의소(義沼), 字는 자의(子宜), 법호(法號)를 인악(仁嶽)이라 하였다.
고려 사공(司空)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 능일(能一)의 23世孫이며 부(父)는 휘징(徽澄)이고 모(母)는 달성 서씨(達城 徐氏)이다 .
스님의 이름은 의첨, 영조 22년(1746)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 인흥마을에서 태어났다.
8세에 향학에 들어가 소학을 배우는데 한번 듣고 세 번 읽으면 곧 외워버리니, 신동이라 했다.
15세에 시전, 주역을 읽고 깊은 뜻을 헤아렸으며 문장에도 능하니, 재질이 탁월했을 뿐 아니라 됨됨이 또한 더할 나위 없으니 고을 사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18세에 인근의 용연사에서 친구들과 함께 공부를 했는데 스님들의 정진 모습에 깊게 감동을 받은 나머지 불교에 귀의하고 말았다.
스승인 벽봉(碧峰)이 그가 큰그릇임을 알고 금강경, 능엄경등을 가르치고 나아가 당시 고승들이었던 서악스님, 추악스님, 농암 스님에게도 배우게 하니, 그 이론이 해박하기 그지없었다.
마침내 벽봉(碧峰) 스님으로부터 구족계를 받으니 스님의 나이22세였다.
뒤에 영원정사에서 화엄종장(華嚴宗長)으로 있던 상언을 만나 화엄경(華嚴經)의 진리를 터득하니 불교의 심오한 이치를 깊이 깨달았다.
비슬산, 계룡산, 황악산 등에서 강석(講席)을 열어 많은 후학을 지도하다가 동화사(桐華寺)로 돌아왔다.
정조 14년(1790) 왕이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수원에 용주사를 창건하여 불상 만드는 작업을 추진하면서, 당시 이름난 스님으로 하여금 이 일을 주관하게 하니 스님이 뽑혔다.
이때 스님이 불복장원문경소와 용주사제신장문을 지으니, 정조가 그의 문장에 감탄한 나머지 스님 중 조선 제일의 문장가라 칭찬하고 홍제(弘濟)라는 호를 내리시며 그곳에 머무르게 하였다고 한다.
정조 20년(1796), 용연사 명적암에서 돌아가시니 세수51세, 법랍 34세였다.
저서로 화엄사기, 원각사기, 기신론사기, 인악집 등이 있다.
사기(私記)는 경론(輕論)을 강의하면서 여러 학설을 모으고 자기의 견해를 덧붙인 것을 말한다.
인악스님은 그리 길지 않은 생애를 통해 많은 저술활동을 한 분이다.
스님의 활동기인 영. 정조대를 한국의 문예부흥기라고 한다.
그러나 불교는 여전히 지식인들로부터 천대받던 시기였다.
스님은 당대 거유였던 매산(梅山) 홍직필(1776∼1852)과 교분을 맺고 있었는데, 그만큼 스님의 유학이 깊은 경지에 도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매산(梅山)은 스님을 일러 '유생인지 스님인지 모를 정도'라고 평했다고 한다.
스님은 기회 있을 때마다 유교와 불교는 물론 도교까지 융화할 것을 주장했으며, 특히 많은 스님 중에서 유불 이교회통(離敎會通)을 주장한 스님이셨다.
오늘날 사회를 선도해야 할 종교마저 배타적으로 자기들만의 몫만 주장하는 용연사 인악대사부도 현실에서 스님은 어쩌면 이런 면에서는 선구자였다고 할 수 있다.
부도에는 ‘인악대사탑(仁嶽大師塔)’이라고 새겨져 있다
통일약사대불
대구광역시 동구 도학동에 위치한 동화사에 있는 세계 최대 석조약사여래불.
불상은 재료면에서 석조(石造), 소조(塑造), 동조(銅造), 목조(木造) 등으로 분류하며, 형태면에서 입상(立像), 좌상(坐像), 와상(臥像) 등 종류가 있다. 통일약사대불은 돌로 만들어져 서 있는 형상을 하고 있으므로 석조 입상에 해당한다.
불상(佛像)은 말 그대로 깨달은 자의 형상이라는 의미로서 대중들이 꾸준히 기도드릴 수 있는 대상으로 조성되어 왔다. 그 가운데 대불(大佛)은 특별히 거대하게 만든 불상으로 일반적으로 높이가 4.8m 이상인 불상을 지칭한다. 이때 4.8m라 함은 옛 문헌에 남아 있는 1장 6척의 크기를 오늘날 수치로 환산한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석가모니의 키가 1장 6척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그런 연유로 흔히 장육불상(丈六佛像)이라 일컫는 크기의 불상은 동경할 만한 대불로 여겨졌다. 장육불상을 비롯한 우리 전통 대불을 기준으로 할 때 30m 높이에 달하는 동화사 통일약사대불의 규모가 얼마나 장엄한지 짐작할 만하다.
대불을 세우기 시작한 풍습은 일찍부터 인도, 중국, 한국, 일본 등지에서 유행했다. 손오공 이야기로 유명한 현장법사(玄奘法師)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도 대불을 보고 놀라는 장면이 나올 정도이다. 대표적으로 5세기에 7m 크기로 제작된 인도 카시아의 열반상(涅槃像), 아프가니스탄 바미얀에 있는 두 구의 마애대불(磨崖大佛)이 각각 40m, 60m의 크기로 유명하고, 돈황 용문 석굴에 있는 7세기 중국 천봉사비로사나대불이 17m 높이의 위용을 자랑한다.
한국의 대불은 세련된 아름다움과 장엄함을 고루 갖춘 것으로 유명하다.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에 위치한 통일신라시대의 삼릉계 마애불좌상이 5m 높이의 대불로 유명하다. 고려시대에도 충청남도 논산시 은진면에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이 18m 거대 석불상으로 세워져 보물 218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밖에도 충청북도 괴산에 있는 10미터 크기의 미륵석불입상이 보물 제96호,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구교리에 있는 10m 높이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이 보물 제217호, 경기도 파주군 용미리의 17m에 달하는 석불입상이 보물 제93호로 각각 지정되어 거불의 위상을 보여주고 있다. 전북 김제군 금산사에 위치한 10m 크기의 미륵삼존상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이름나 있다. 이렇듯 역사적으로 우리나라는 국가의 어려움을 부처님의 힘으로 극복하고자 대규모 불사를 거행하곤 하였다. 이러한 명맥을 1992년 대구광역시 동구 동화사에 조성된 33m 높이의 약사여래입상이 이어가고 있다.
예로부터 대불을 조성하는 것은 부처의 가르침에 대한 존중과 경외심을 드러내고, 멀리서나마 불상을 향해 예를 갖출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며, 부처님의 자비심이 먼 데까지 미침을 의미한다. 대구광역시 동구 도학동에 위치한 팔공산 동화사 통일약사대불의 경우 민족통일에 대한 염원을 널리 퍼뜨리고자 조성되었다. 그 웅장함에서 알 수 있듯 세계 최대 석조약사여래불로서 대구의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 동화사에 세워진 높이 33미터나 되는 세계 최대 석조약사여래불로 민족의 통일을 염원하는 국민적 기원이 담겨 있는 불상이다.
대구광역시로 진입하는 고속도로 나들목 중에 대표적으로 팔공산 나들목이 있다. 대구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 중 하나가 팔공산이라는 사실과 대구 사람들이 팔공산에 대해 갖는 애정을 동시에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곳 나들목에서 15㎞ 동북쪽으로 올라가면 팔공산 동화사가 자리 잡고 있다. 팔공산은 신라 때 나라의 제사 대상이 되었던 다섯 산악[오악] 중에 중악으로 불릴 만큼 신성시되던 곳으로 경주 남산과 더불어 불교성지로 불렸다. 고려 때에도 변함없이 국가적 제사의 대상이 되었고, 숭유억불 정책이 있던 조선시대에도 그 영향력이 막강하여 불교명산으로서 위세를 떨쳤다. 그로 인해 유서 깊은 사찰과 불교 유적이 한 데 모여 있는데 파계사, 은해사, 부인사, 갓바위, 제2석굴암 등이 대표적이다.
동화사는 대구광역시 및 경상북도지역을 관리하는 대한불교 조계종의 제9교구 본사로서 역사가 깊다. 동화사는 선원이라는 참선수행기관, 강원이라는 경전교육기관, 율원이라는 계율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모두 갖추고 있어 총림사찰이라고도 불린다. 사찰 입구에 있는 높이 33m의 동화사 통일약사대불은 동화사의 위상을 대변하고 있다. 거대한 불상이 내뿜는 기운에 누구나 압도당할 만하다. 그런데 동화사성보박물관 2층 법당에 들어서서 약사대불을 바라보면 불상이 의외로 소박하게 보이는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다. 대형 통유리창이 자연스럽게 액자 역할을 하고, 약사대불과 뒤편 팔공산 병풍바위가 하나의 그림이 된다.
「동화사사적비(桐華寺事跡碑)」(1931)의 연기설화에 따르면, 493년(소지왕 15)에 극달(極達)화상이 팔공산 남쪽 기슭에 세운 절의 최초 이름은 유가사(瑜伽寺)였다. 봉황이 알을 품는 봉소포란형(鳳巢抱卵形)의 명당터에 세운 절이다. 832년(흥덕왕 7)에 심지왕사(心地王師)가 유가사를 다시 세울 때 겨울임에도 오동나무가 활짝 피어난 것을 기이하고 상서롭게 여겨 동화사라 고쳐 불렀다고 한다. 동화사는 조선시대에 또 한 번 그 이름을 떨치는데 임진왜란 시기 사명대사에 의해서였다. 선조 때 왜군을 물리치기 위해 승군을 일으킨 사명당이 동화사에서 영남승군사령부를 지휘한 까닭이다. 보물 제1,505호로 지정된 사명당 초상화인 「사명당대장진영」이 동화사에 보관되어 있고, 봉서루 현판에 ‘영남치영아문(嶺南緇營牙門)’이라 쓰여 있어 지금도 사명대사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현존하는 대부분 건물들은 조선 영조 때 중창한 건물들이며 동화사는 총 여덟 번의 중창 과정을 거쳐 오늘날까지 대가람의 위치를 고수해 오고 있다. 이렇듯 예로부터 나라의 중대한 일이 있을 때 중심지 역할을 해온 곳이 바로 동화사이다. 어쩌면 동화사에 통일약사대불이 세워진 것은 당연한 일이며 동화사가 우리민족의 역사에 차지는 위상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통일약사여래대불의 조성은 팔공산 동화사 일대가 다시 한번 우리민족에게 호국·통일 불교의 성지이자 본산임을 증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20세기 마지막 과제인 통일 성취를 이루기 위한 대불 조성은 불교사상과 통일정신이 하나로 뭉쳐진 것이라 할 수 있다. 민족 대화합을 염원하기 위한 통일약사대불을 대구광역시 동구에 위치한 동화사에 건립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동화사 통일약사대불을 보기 위해 동화사로 들어가는 입구는 두 곳이다. 자동차를 이용하여 팔공산 집단시설지구 쪽 동화문을 통해 주차장으로 진입하는 방법과 도보를 통해 동화천 쪽으로 오르는 방법이다. 두 곳 모두 놓치기 아까운 풍경을 선사하므로 한 바퀴 모두 둘러보는 것이 가장 좋다. 일반적으로 서쪽의 일주문으로 진입하여 절의 전체 가람 배치를 온전히 보는 것을 권장한다. 대웅전과 부도탑까지 걷다보면 전각 60여 개와 불탑을 관람할 수 있어 넓고 탁 트인 가르침의 공간임을 확인할 수 있다.
동화사 통일약사대불을 만나러 가는 길에 해탈교라는 작은 다리를 만나는데, 해탈교를 건넘으로써 다사다난한 속세에서 벗어나 부처님의 품으로 들어감을 실감할 수 있다. 다리 아래로는 팔공산 깊은 개울이 흐르고 있어서 사시사철 푸르고 시원한 인상을 준다. 명산의 고찰답게 동화사 경내 곳곳에는 나무가 울창하고, 맑기로 유명한 계곡이 쉼 없이 흘러간다. 이윽고 동화사 통일약사대불로 오르는 계단이 나타나는데 폭 12m의 108개 층계로 이루어져 있다. 한 계단 한 계단 오르면서 고뇌를 한 가지씩 버림으로써 백팔번뇌를 견뎌냄을 상징하고 있다. 그 과정을 다 거치고 올라선 33,058㎡[1만평]의 도량에는 맨 먼저 통일대불전이 눈에 띄고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3층의 동탑과 서탑 사이로 장엄한 동화사 통일약사대불이 모습을 드러낸다. 동화사 통일약사대불 뒤로는 산이 병풍처럼 둘러 있어 불상과 조화를 이룬다.
현대사 가장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는 민족통일을 염원하기 위해 세워진 동화사 통일약사대불은 그 조성과정 또한 극적이어서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한눈에 다 담을 수 없을 만치 웅장한 석불은 원래 전라북도 익산시에 있던 황등석이었다. 불상 원석의 무게가 무려 2,000t이고 이를 받치고 있는 좌대 원석의 무게는 3,000t에 달하는데 108명의 석공이 장장 7개월간 다듬어 완성되었다. 각계 전문가들의 고증과 조언을 거쳐 예술적으로도 높이 평가받는 동화사 통일약사대불은 원석을 8등분하여 조성하였다. 전라북도 익산시에서 출발한 각각의 대불 작품이 대형트럭에 얹힌 채 거북이걸음으로 300㎞ 거리의 대구광역시 동구 도학동에 있는 동화사까지 운송된 장면은 지금도 불교사의 한 페이지로 남아 있다. 이로써 완공된 동화사 통일약사대불의 규모는 가히 기록적이다.
부지면적 3만 3,050㎡에 1990년 10월 26일부터 불사를 착공하여 대불 점안 대법회를 1992년 11월 27일에 가졌으니 25개월의 기간이 소요된 대대적인 공사였다. 이목을 집중시킨 석조대불의 높이는 17m에 좌대 높이가 13m, 지하암반에서 참배단까지가 3m여서 총 33m 높이다. 대불의 최대 둘레 또한 16.5m여서 거대한 크기를 더욱 실감할 수 있다. 대불의 부속시설 또한 국내 최대로 꼽히는데 두 삼층석탑의 높이가 각각 17m이며 원석 2,000t에 달한다. 또한 두 석등 역시 7.6m의 높이에 200t의 원석으로 만들어졌다. 뿐만 아니라 좌대 난간, 참배단, 배면 병풍석에 원석 5,000t이 쓰였다.동화사 통일약사대불 점안식을 거행한 1992년 11월 27일 당시는 때마침 대통령 선거기간이어서 쟁쟁한 대통령 후보들이 경쟁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10만 명이 넘는 불교 신도들이 한자리에 모여 대성황을 이룬 자리에 민자당 김영삼 후보, 민주당 김대중 후보, 국민당 정주영 후보가 한 자리에 참석하였다. 따라서 이날은 정치계의 이슈와 불교계의 이슈가 맞물려 분위기가 더욱 고조된 날로 기록에 남아 있다.
동화사 통일약사대불은 설악산 신흥사에 있는 청동좌불, 속리산 법주사에 있는 청동미륵불과 더불어 3대 통일약사대불로 불린다. 이들 통일약사대불은 이름 그대로 부처의 자비와 평화가 온누리에 펼쳐지기를 열망한 상징물이라 할 수 있다. 이 가운데 동화사의 경우 특히 약사여래대불로 조성한 이유가 있다. 원래 팔공산 일대는 약사여래신앙이 왕성한 지역이었다. 저마다 개인 건강을 지키고 큰 재난을 피하게 해달라고 기원하기 위해 약사여래불을 모셔왔다. 건강과 안녕을 비는 신도들이 많이 찾는 약사신앙의 중심지인 팔공산 곳곳에는 이미 수많은 약사여래상이 조성되어 있다. 약사여래는 중생의 고통과 질병이 없는 이상세계를 완성하고자 하는 부처님으로 오랜 숭배의 대상이 되어 왔다. 약사여래는 과거세에 약왕이라는 보살로 수행하면서 중생의 아픔과 슬픔을 소멸시키기 위해 발원했다고 한다. 원래 동화사는 극달화상이 창건한 이래 고려말까지 미륵신앙 사찰이었으나 약사신앙의 영향과 ‘남북의 통일 성취’라는 발원으로 거대한 석조통일대불이 조성됐다. 동화사 통일약사대불은 우리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하루빨리 성취하여 분단의 아픔을 해소하고 민족 대화합을 이루어 내는 데 그 조성 이유가 있다. 통일에 걸림돌이 되는 갈등을 치유함으로써 한반도의 평화를 속히 이루고자 하는 뜻을 담고 있다.
동화사 약사여래대불은 연화 위에 서 있는 입상으로서, 왼손에는 약함을 들고 있으며, 오른손은 시무외인을 하고 있다. 시무외인이란 다섯 손가락을 들어 어깨까지 올린 손 모양으로, 중생이 갖고 있는 두려움을 부처의 힘으로 없애 준다고 해석된다. 명호를 외우고 기도하면, 신체의 질병과 마음의 근심까지 낫게 된다는 동화사 통일약사여래대불 앞에는 오늘도 수많은 신자가 “약사여래”를 부르며 절을 올린다.
1992년 11월 27일 동화사 통일약사대불 점안법요식(點眼法要式)에서 원로의장 서암은 법어(法語)를 통해 “중생의 병을 치유하는 약사여래가 우리 민족의 아픔인 분단의 병을 치유함으로써 민족통일을 이루게 될 것”이라고 말해 그 의미를 더했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서 극복해야 할 이 점은 「통일약사대불 봉안 연기문(統一藥師大佛 奉安 緣起文)」에도 적혀있다. “두 손 모아 부처님께 기원하옵나니 불사에 정성 모아 동참한 인연공덕으로 국토는 우순풍조(雨順風調)하고 중생은 고통과 번뇌를 초월하여 불국정토를 성취하게 하옵시며 우리 모두 서로를 용서하고 사랑하고 하나 되어 통일되게 하옵시어 영겁(永劫)의 시간 흐르고 또 흘러도 자손만대 통일조국에서 복락 누리게 하옵소서.”
동화사 통일약사대불의 지하전시관에서도 볼거리가 무궁무진하다. 국제관광선체험관[불교문화관]이라고 이름한 전국 유일의 테마전시관이 통일약사대불 지하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한국 선불교 정신과 역사를 느낄 수 있으며 참선의 기본자세부터 중심사상까지 초행자가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다양한 불교문화재를 낳게 한 불교정신에 보다 편히 다가갈 수 있도록 마련해놓은 곳이라 할 수 있다. 한편 통일대불 뒤쪽 조각들은 호법무사인데 부처의 세계를 지키는 호법무사들은 제각기 위엄있는 자태와 표정으로 서 있어 부처님을 보호하는 느낌을 주고 있다. 통일대불 주변은 여름 더위를 피하면서 불교문화재를 관람하기 위해 찾는 장소이기도 하다.
또한 대불의 몸체 안에는 미얀마 정부에서 기증받은 진신사리 2과가 있다. 사리란 화장한 유골에서 발견되는 작은 구슬로서 참된 수행의 결과로 상징된다. 대불 바로 아래에서 불상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목을 최대한 뒤로 젖혀야 가능할 정도로 불상의 크기는 실제로 봐야 실감이 난다. 불상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한참 앞으로 걸어 나와야 할 정도이니, 어느새 통일약사대불은 대구광역시에 가면 반드시 보고 와야 할 명소로 자리 잡았다. 현재 통일약사대불은 웅장미와 예술성을 모두 갖추어 팔공산 동화사의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현재 동화사는 동화사 통일약사대불과 통일약사대불전 공간을 24시간 개방하고 있다. 또한 봉황문을 통해 올라오는 길을 새로 정비하여 동화사 대웅전을 거치지 않고도 곧바로 약사여래불로 갈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특히 야간에 이 길을 오를 불교도 및 관광객들을 위해 동화사는 각별히 가로등을 정비해 통일약사대불을 보러오는 시민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통일약사대불전 구역은 기도객과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제공하되, 대웅전에서 설법전까지는 수행공간으로 따로 분리해 입장시간을 통제하고 있다. 동화사는 통일약사대불 24시간 개방을 기념하기 위해 2014년 7월 19일 팔공산 산사음악회를 갖기도 했다.
보호수
인악대사 나무(느티나무)
심지대사
동화사 창건 설화는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 493년 극달(極達)이 유가사(瑜伽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는 설이다.
둘째, 832년 심지(心地)가 창건했다는 설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 4권 「심지계조(心地繼祖)」에는 심지대사가 동화사를 창건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심지는 신라 41대 헌덕왕(憲德王)[?~826]의 셋째 아들로, 15살에 출가하여 팔공산에서 수행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심지는 길상사의 영심(永心)이 진표율사(眞表律師)에게 깨달음을 검증받는 법회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길상사로 찾아갔다.
심지는 늦게 도착해 길상사 법회에 참석하지 못했지만, 법당을 향하여 예배를 하고 있었다.
심지가 예배를 하던 7일째 되던 날 진눈깨비가 내렸지만 심지의 주위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다.
원래 길상사의 법회는 불골간자(佛骨簡子)[신라의 고승 진표율사가 수행중에 미륵보살로부터 얻은 찌처럼 생긴 두 개의 불골(佛骨)]를 영심에게 전해주는 행사였다.
그런데 심지가 팔공산으로 돌아가다가 자신의 옷깃을 보니 불골간자 두 개가 끼여 있었다.
심지는 길상사로 돌아가 영심에게 불골간자를 돌려주었으나, 번번이 심지의 옷깃으로 되돌아왔다.
결국 영심은 심지에게 불골간자 두 개를 봉안(奉安)하도록 하였고, 심지는 대구광역시 동구에 있는 팔공산에 와서 불골간자를 봉안할 장소를 물색했다.
심지는 산신의 입회 아래 서쪽을 향해 불골간자를 던져 길지[좋은 땅]을 찾고자 했다.
불골간자는 바람을 타고 현재 동화사 북쪽 첨당 우물에 떨어졌다고 한다.
현 금당암(金堂庵) 자리가 그곳이다.
심지는 그 곳에 절을 짓고 불골간자를 봉안하였으며, 그 후 동화사가 되었다고 한다.
속성 김(金). 신라 제41대 헌덕왕(憲德王)의 아들. 15세에 출가, 승려가 되어 스승을 따라 불도(佛道)에 정진하였다.
공산(公山:현 대구광역시 팔공산)에 있다가 영심(永深)이 진표사(眞表師)의 계법(戒法)을 이어받고 속리산(俗離山)에서 점찰법회(占察法會)를 열었을 때 석가를 받드는 그의 지극한 정성이 영심에게 인정되어 정계(正戒)를 받았다.
영심이 그에게 “부처님의 뜻이 그대에게 있으니, 그대가 봉행하라”며 간자(簡子)를 주었다.
간자를 받들고 공산에 돌아와 동화사(桐華寺)를 짓고 그 개산조(開山祖)가 되었다
옛날 팔공산에는 팔만구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좀 과장된 표현이겠으나 오늘날에도 절은 많다.
산 구석구석에 흩어져 있는 기왓장이나 주춧돌이 어느 정도 이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심지대사 나무(오동나무)
사진첩
산문(신식)
팔공선문
동화지
옹호문
인악대사 나무
봉서루
영산전
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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