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과의 對話/강판권의 나무 인문학

[나무와 성리학] ⑤ 측백나무와 치지(致知)

초암 정만순 2019. 1. 8. 17:10



[나무와 성리학] ⑤ 측백나무와 치지(致知)




대구 동구 도동의 측백나무 숲. <한겨레> 자료사진
대구 동구 도동의 측백나무 숲. <한겨레> 자료사진

     
1830년 3월 어느 날,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서울 용산에 머물고 있었다.
입춘이 지났지만 날씨는 한강에서 불어오는 꽃샘추위로 제법 쌀쌀했다.
그는 매일 고금도에 유배된 아버지 김노경을 생각하면서 보냈다.
추사는 아버지를 생각하다가 문을 열고 나갔다. 바람은 차가웠지만 햇살이 무척 고왔다.
추사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본 뒤 다시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방안에 앉자마자 밖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 다시 방문을 열고 나갔다.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은 이상적이었다. 조선 제일의 석학과 역관의 첫 만남이었다.

1809년 10월28일 김정희는 동지 겸 사은부사로 청나라에 가는 아버지를 따라 베이징으로 떠났다.
그의 나이 24살 때였다.
그가 베이징에 머문 기간은 석 달 남짓했지만, 이 기간 동안 베이징 경험은 귀국 후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추사는 베이징 체류 기간에 당시 중국 제일의 금석학자 옹방강과 완원을 만났다.
추사가 조선 후기 최고의 금석학자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중국에서 두 석학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김정희는 베이징에서 옹방강, 완원 외에도 여러 학자를 만났다.
중국의 학자들은 1810년 2월1일 조선으로 돌아가는 김정희를 위해 베이징 법원사에서 송별연을 열었다.
 그런데 김정희가 베이징에서 만난 것은 중국의 유명 학자들만이 아니었다.
그가 베이징에서 만난 또 다른 존재는 측백나무였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자금성 후원과 뒷산인 경산, 그리고 법원사를 비롯한 베이징 곳곳에 살고 있는 측백나무를 보았다.

베이징에서 돌아온 뒤 추사는 1819년 4월, 그의 나이 34살 때 대과에 급제했다.
그 뒤 암행어사, 예조참의, 설서, 검교, 대교, 시강원보덕 등 관직 생활을 했지만, 앞날은 순탄하지 않았다.
 추사는 정치적 탄압에서 겨우 목숨을 건지고 제주도로 귀양갔다.
추사가 제주도 유배지에 도착한 뒤에도 고통은 계속되었다.
유배 뒤에도 반대파들의 박해를 받아야만 했다. 특히 반대파들은 추사의 친구들을 괴롭혔다.
그래서 친구들은 박해를 견디지 못하고 추사 곁을 떠났다. 추사의 외로움은 더욱 커갔다.
그러나 추사의 외로움을 달래준 사람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2년 전에 만났던 이상적이 보낸 책이 있었기 때문이다.

추사가 귀양지 제주도에서 세한도를 그린 곳은 군영에 종사하는 군교(軍校) 송계순의 집이었다.
추사는 자신이 가장 어려운 처지에 놓였을 때 목숨 걸고 도와준 이상적을 위해 붓을 들었다.
종이는 동생에게 부탁해서 얻은 화전지(花箋紙)였다.
추사는 이상적에게 줄 그림에 그간 즐겨 사용한 연한 담묵을 사용하지 않고 초묵법(焦墨法)을 사용했다.
추사는 세한도에 아주 진한 먹을 사용하는 초묵법만을 사용했다.
그는 1844년 이상적에게 줄 세한도를 마무리했다. 국보 제180호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추사는 왜 이상적에게 하필 ‘세한도’를 선물했을까. 사람들은 추사의 작품 중 ‘세한도’에 깊은 관심을 보인다.
그만큼 세한도가 추사의 사상을 담고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추사의 작품 중 걸작으로 꼽는 세한도는 아직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품고 있다.
세한도의 비밀은 바로 나무에 있다.
세한도의 제목은 <논어> 자한편에서 공자가 말한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에서 빌린 것이다.
이 구절은 해석이 분분하지만, 대부분 “날씨가 추운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에 시든다는 것을 안다”로 풀이한다.
한국의 <논어> 번역본은 물론 ‘세한도’의 최고 연구서에서도 송백을 소나무와 잣나무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백’은 소나뭇과의 잣나무가 아니라 측백나뭇과의 측백나무이다.
그러면 그림을 그린 추사는 백을 어떤 나무로 그렸을까.

공자는 “날씨가 추운 뒤에야 소나무와 측백나무는 뒤에 시든다는 것을 안다”고 말했다. 추사는 ‘세한도’에 측백나무 세그루를 그렸다. 추사의 ‘세한도’. <한겨레> 자료사진
공자는 “날씨가 추운 뒤에야 소나무와 측백나무는 뒤에 시든다는 것을 안다”고 말했다. 추사는 ‘세한도’에 측백나무 세그루를 그렸다. 추사의 ‘세한도’. <한겨레> 자료사진


공자는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잎을 갈지 않는다는 걸 지적 안하고 뒤에 시든다는 점을 강조했다

세한도에는 뜻을 굽히지 않은 이상적에 대한 극찬이 담겨 있다
추사가 공자의 뜻을 이해한 ‘치지’이다

늘푸른나무와 갈잎나무 구분은 여름에는 어렵고 가을에야 가능하다
사람의 본심도 큰일을 만날 때 드러난다

추사가 백을 어떤 나무로 생각하고 그렸는가를 알려면 그림에 등장하는 나무의 모습을 봐야 한다.
사실 세한도의 비밀을 푸는 열쇠는 그림 속의 나무를 어떤 나무로 파악하느냐에 달렸다.
이 비밀이 풀리면 추사가 논어의 송백 중 ‘백’을 어떻게 이해했는가도 쉽게 풀 수 있다.
그림 속의 나무를 파악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나무의 모습을 찬찬히 살피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림 속에는 네 그루의 나무가 등장한다. 네 그루의 나무는 집 양쪽에 각각 두 그루씩이다.
그림 오른쪽의 두 그루 나무 중 한 그루는 소나무이다.
세한도의 소나무는 누구나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문제는 소나무를 제외한 세 그루의 나무를 이해하는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소나무를 제외한 나머지 세 그루의 모습이 소나무와 닮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면 소나무 옆의 한 그루 나무는 측백나무이거나 잣나무이지만, 줄기로 보아 측백나무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특히 추사가 논어의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했다면 측백나무라야 한다.

추사는 네 그루의 나무 중에서 한 그루만 소나무로, 나머지는 측백나무를 그렸다.
그는 왜 이상적에게 줄 선물을 세한도로 삼았을까.
“날씨가 추운 뒤에야 소나무와 측백나무는 뒤에 시든다는 것을 안다”는 공자의 말씀이 무슨 뜻인가를 알면, 추사가 이상적에게 준 선물의 뜻도 알 수 있다.
이것이 세한도의 또 다른 비밀이다.
날씨가 추우면 갈잎나무는 잎을 떨어뜨리지만, 소나무와 측백나무는 잎을 떨어뜨리지 않는다.
그런데 공자는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잎을 갈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고 뒤에 시든다는 점을 강조했다. 공자의 지적은 옳다. 식물학자들이 소나무와 측백나무를 늘푸른나무로 분류하지만, 늘푸른나무도 시들긴 마찬가지이고, 잎도 떨어진다.
다만 잎이 늦게 시들고 늦게 떨어진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러나 어떤 해석자들은 송백을 소나무와 잣나무로 번역하면서 두 나무가 시들지 않는다고 풀이하고 있다.

공자는 무슨 마음으로 이 말을 했을까.
공자의 제자들이 편찬한 논어에는 공자의 이 말에 대해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공자의 이 말에 대한 해석은 다양할 수밖에 없다.
추사가 논어의 이 말을 선택해서 세한도를 그린 이유도 정확하게 모른다.
다만 세한도에 이상적에게 준 글이 있으니, 그 글을 통해 추사의 뜻을 짐작할 수 있다.
세한도의 제목은 “우선시상(藕船是賞)”, 즉 ‘우선(이상적의 호) 감상하게나’이다.
추사의 이상적에 대한 평가가 바로 공자의 글 내용이다. 추
사는 이상적의 태도를 소나무와 측백나무에 비유했던 것이다.
추사가 이상적의 태도를 공자의 말에 비유한 진정한 뜻은 눈앞의 이익을 좇지 않고 위험을 무릅쓰고 귀양살이하는 추사를 위해 뜻을 굽히지 않은 이상적에 대한 극찬이 담겨 있다.
이는 추사가 소나무와 측백나무를 통해 공자의 뜻을 이해한 치지(致知)이다. 치지는 ‘지식을 지극하게 한다’는 뜻이다.

사람의 본심은 평소에는 알 수 없다.
나무도 여름에는 늘푸른나무와 갈잎나무를 구분하기 어렵다.
그러나 가을이면 늘푸른나무와 갈잎나무를 분명히 구분할 수 있다.
사람의 본심도 평소에는 알 수 없지만, 큰일과 이해관계를 만나면 드러난다.
공자가 늘 푸른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뒤에 시드는 것을 언급한 것도 바로 사람의 본심이 언제 드러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공자의 말씀을 이렇게 해석한 사람은 중국 송나라 범중엄이다.
이상적은 추사의 작품을 받고 감동한 나머지 눈물을 흘렸다.
그동안 온갖 고통을 참으면서 추사를 위해 바친 정성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상적은 세한도를 청나라 지식인들에게 자랑하기 위해 베이징까지 가져갔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 천연기념물 제1호 측백나무 숲이 있다.
대구광역시 동구 도동의 측백나무 숲은 중국 원산의 측백나무가 우리나라에서도 자생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곳의 측백나무도 어느 선비 집안의 무덤에 심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측백나무를 비롯한 향나무는 중국 주나라 봉건시대에 제후의 무덤가에 심었다.
따라서 측백나무는 신분이 임금 다음으로 높은 사람들의 무덤가에 심을 만큼 귀한 나무였다.
 사람들은 측백나무의 몸에서 향기가 나고, 늘푸른나무라서 무덤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생각했다.
사람들의 이러한 생각과 실천이 바로 나무에 대한 치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