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과의 對話/강판권의 나무 인문학

[나무와 성리학] ④ 은행나무와 경(敬)

초암 정만순 2019. 1. 8. 07:50


[나무와 성리학] ④ 은행나무와 경(敬)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국가에서 토지와 노비를 내린 서원)인 소수서원 전경. 명종은 퇴계 이황의 요청을 받아들여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서원을 소수서원이라 사액했다. 강판권 교수 제공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국가에서 토지와 노비를 내린 서원)인 소수서원 전경. 명종은 퇴계 이황의 요청을 받아들여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서원을 소수서원이라 사액했다. 강판권 교수 제공


  
1495년과 1543년은 우리나라 성리학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해다.
1495년은 주세붕(1495~1554)이 태어난 해이고, 1543년은 1541년에 풍기군수로 왔던 주세붕이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을 세운 해이기 때문이다.
백운동서원은 중국의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가 강서성 백록동에서 재건한 백록동서원을 모방한 것이다.
주세붕이 서원을 세운 것은 중국에서 처음으로 주자학을 도입한 안향을 모신 후 유학을 장려하기 위해서였다.
백운동서원은 원래 숙수사라는 절 터였다. 지금도 서원 앞에는 숙수사의 당간지주(보물 제59호)가 남아 있다.

주세붕의 주장에 따라 백운동서원을 짓자, 밤마다 서원 옆 바위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났다.
이 소문은 동네 사람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주세붕은 참으로 난감해서 주민들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동
네 사람들은 하나같이 울부짖는 소리가 세종의 비 소헌왕후 심씨의 여섯째 아들인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관노의 고자질로 죽임을 당하는 과정에서 함께 억울하게 죽은 원혼이라 말했다.
현재 소수서원 근처에 금성대군을 기리는 금성단이 남아 있다.

주세붕은 주민들 얘기를 듣고 바로 그 원혼을 달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울부짖는 소리가 난다는 바위를 찾았다.
바위는 공사중인 서원 옆 시내인 죽계에 있다.
그는 한참 동안 바위를 바라보았으나 특별히 묘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온 뒤 주세붕의 머리에는 한순간도 바위가 떠나지 않았다.
그날 저녁 밥을 먹은 다음 그는 조그마한 방 안에서 베개도 베지 않은 채 멍하니 천장만 쳐다보고 있다가, 갑자기 일어나 <논어>를 손에 잡히는 대로 펼쳤다. 논어를 펼치자 주세붕의 눈에 ‘경’(敬) 자가 아주 크게 들어왔다.

주세붕은 논어에서 경 자를 보자마자 책상 위에 놓인 벼루에 물을 붓고, 먹을 갈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는 종이를 꺼내 ‘경’ 자를 쓰기 시작했다.
주세붕은 장인에게 날이 밝는 대로 죽계의 바위에 자신이 쓴 글자를 새기도록 했다. 현재 죽계의 바위에 남아 있는 경 자 글씨는 이렇게 탄생했다.
주세붕이 단종 복위 과정에서 죽은 원혼을 달래는 방법으로 경을 생각한 것은 그 어떤 것보다 이 글자야말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경’은 성리학의 핵심 개념이다. 경 자는 신에게 절하는 모습이다.
인간이 신에게 절하려면 공경하는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그래서 이 글자에 ‘공경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공경은 모든 성리학자들이 추구한 공부의 핵심이었고, 퇴계 이황이 평생 추구한 공부였다.
자는 <논어>에서 ‘경’으로 자신을 닦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경’을 가장 구체적으로 설명한 사람은 중국 주자의 스승이었던 정이였다.
정이는 경을 ‘주일무적’(主一無適), 즉 ‘하나를 잡고서 가지 않는다’고 풀이했다.
이 말은 정신을 한곳으로 집중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공부 방법을 ‘경 공부’라고 한다.


백운동서원, 즉 소수서원은 사액서원이다. 사액서원의 ‘사’는 준다는 뜻이고, ‘액’은 재산과 노비 등을 의미한다.
국가에서 서원에 필요한 토지와 노비를 주었다는 뜻이다. 국
가에서는 이와 함께 글씨를 내렸다. 소수서원은 바로 조선 명종(재위 1545~1567)의 글씨이다.
명종이 소수서원을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지정한 것은 퇴계의 요청 때문이었다.
 퇴계는 주세붕의 뒤를 이어 1548년에 풍기군수로 와서 백운동서원을 사액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명종은 1550년에 백운동서원을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 사액하고, 대제학 신광한에게 명하여 사서오경과 <성리대전> 등의 서적도 보냈다.
소수서원은 “이미 없어진 학문을 이어서 닦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신광한이 이러한 뜻을 가진 이름을 지은 것은 백운동서원이 중국 주자가 남당(南唐)시대 여산의 남쪽에 있었던 백록동서원을 부흥시킨 것과 같은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소수서원 옆을 흐르는 죽계의 바위에 새겨진 ‘경’ 자. 강판권 교수 제공
소수서원 옆을 흐르는 죽계의 바위에 새겨진 ‘경’ 자. 강판권 교수 제공


‘경’은 신에게 절하는 모습
주세붕은 죽은 원혼을 달래려 바위에 ‘경’자를 새겨넣었다

서원의 성리학자들은 매일 문밖 은행나무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원리를 깨달았다
은행나무가 오랜 세월 풍파를 견뎌내는 건 경의 자세 덕분이다

 
소수서원에는 500살 정도의 두 그루 은행나무가 살고 있다.
은행나무는 유학(성리학)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나무이다.
한국의 유학 관련 공간에서 은행나무를 심은 것은 이 나무가 성리학의 핵심 사상인 경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현재 국립대학에 해당하는 성균관과 사립대학에 해당하는 서원에는 최고 600살에 이르는 은행나무를 비롯해 크고 작은 은행나무가 거의 어김없이 살고 있다.
우리나라의 유학 공간에서 은행나무를 심은 것은 공자 때문이지만, 공자가 사랑한 나무는 은행나무가 아니라 살구나무였다.
공자는 살구나무 아래서 제자를 가르쳤지만, 한국의 유학자들은 은행나무 밑에서 배웠다.

한국의 유학 공간에 살구나무 대신 은행나무를 심은 이유는 알 수 없다.
살구나무의 한자인 행(杏)이 은행(銀杏)나무의 ‘행’과 이름이 비슷해서일지 모르지만, 단순히 살구나무와 이름이 비슷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은행나뭇과에는 은행나무만 있다. 그래서 은행나무는 ‘유일성’을 갖고 있다.
아울러 이 나무는 공룡시대부터 지구상에 존재한 나무이다. 그래서 은행나무는 ‘영원성’을 갖고 있다.
성리학자들이 살구나무 대신 은행나무를 심은 뜻도 바로 은행나무의 유일성과 영원성을 본받기 위해서일 것이다.
은행나무는 암수가 따로 있다.
소수서원의 은행나무 중 처음 만나는 은행나무는 수컷이고, 경렴정 옆에 있는 것은 암컷이다.
소수서원의 은행나무는 이곳에서 생활한 성리학자들에게 경 공부의 대상이었다.

소수서원의 성리학자들은 매일 서원에서 공부한 뒤 문 밖으로 나와 경렴정에 올라 옆에 있는 은행나무를 바라보면서 은행나무의 삶을 관찰했다.
현재 한국에서 가장 오랫동안 살고 있는 은행나무의 나이는 경기도 양평 용문사 앞의 1100살이 넘은 은행나무이다.
그들은 그토록 오랫동안 살아가는 나무의 자세를, 어떻게 경렴정 옆의 은행나무가 몇백년 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를 생각했다.
경렴정에 앉아 앞을 바라보면 아주 작은 언덕이 보인다. 성리학자들은 경렴정에 머물다가 다시 언덕으로 가곤 했다. 언
덕에는 ‘머리를 식힌다’는 소혼대 바위가 있다. 그들은 바위에 앉아 앞에 살고 있는 은행나무를 관찰했다.
소수서원의 성리학자들은 문밖에 나오면 언제나 은행나무를 만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문 밖에서 앉으나 서나 은행나무와 함께 생활했다.

그들은 밖에서 만난 은행나무를 통해 은행나무가 오랫동안 살아가는 원리를 깨달았다.
은행나무는 수백년 동안 한곳에 뿌리를 내린 채 살아간다.
그래서 은행나무는 성리학자들이 추구한 경 공부의 대가이다.
수만년 세월의 풍파를 겪으면서 지구상에 살아남은 은행나무, 수백년 동안 살아가는 소수서원의 은행나무는 인간이 감히 흉내낼 수 없을 만큼 위대한 존재이다.
이처럼 은행나무가 빙하기 때도 지구상에서 사라지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경의 자세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은행나무의 이러한 경의 자세가 성리학자들이 자신의 활동 공간에 심은 진정한 이유이다.

은행나무가 그토록 오랫동안 지구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자신을 위해 살았기 때문이다.
나무는 결코 누구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은행나무야말로 경 공부를 통한 위기지학(爲己之學)의 실천자이다.
은행나무는 한순간도 하늘이 부여한 본성을 잃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까지 자신 이외의 후손을 만들지 않았다.
누구나 은행나무처럼 살아가고 싶지만, 욕망 때문에 쉽게 실천할 수 없다.
경 공부를 방해하는 것은 사사로운 욕망이다.
그래서 성리학자들은 죽을 때까지 경 공부를 통해 사사로운 욕망을 걷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솔숲을 비롯한 소수서원의 자연생태는 성리학자들의 놀이공간이 아니다.
소수서원의 자연생태는 그 자체가 중요한 공부의 대상이었다.
성리학은 밖을 통해 안을 다스리는 학문이었으나, 밖과 안은 언제나 한 몸이었다.
은행나무를 보는 것이 곧 성인의 길이었고, 성인의 길은 곧 은행나무의 길이었다.
그래서 서원을 비롯한 성리학자들의 공간은 깨달음을 위한 것이다.
서원이 깨달음의 공간이기 때문에 건물도 사람 중심이다.
사람 중심의 서원은 반드시 직접 들어가야만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있다.
서원 앞 두 그루 은행나무의 위치도 경 공부를 위해 설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