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과의 對話/강판권의 나무 인문학

[나무와 성리학] ⑥ 대나무와 의(義)

초암 정만순 2019. 1. 8. 17:22


[나무와 성리학] ⑥ 대나무와 의(義)




중국 후난성 쥔산에 있는 순임금의 두 아내 여영과 아황의 묘의 주변에서 자라는 소상반죽. 순임금이 죽자 여영과 아황이 소상(샤오상) 강가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울다 죽었고, 그 자리에서 피가 스며 얼룩무늬가 진 대나무 소상반죽이 자라났다는 전설이 전한다. 그 뒤 대나무는 순절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강판권 교수 제공


     

중국 후난성 쥔산에 있는 순임금의 두 아내 여영과 아황의 묘의 주변에서 자라는 소상반죽. 순임금이 죽자 여영과 아황이 소상(샤오상) 강가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울다 죽었고, 그 자리에서 피가 스며 얼룩무늬가 진 대나무 소상반죽이 자라났다는 전설이 전한다.

그 뒤 대나무는 순절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강판권 교수 제공



    
‘땡그랑.’

약사발이 떨어져 바닥에 굴렀다. 1910년 9월10일 새벽, 황현(黃玹, 1855~1910)의 입가에 독약이 흘러내렸다.
잠시 후, 그는 숨을 거칠게 쉬더니 고개를 방바닥에 떨구고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황현의 56년 인생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전라남도 광양에서 황시묵의 아들로 태어난 황현이 숨을 거둔 곳은 전라남도 구례군 만수산 기슭의 구안당이었다.
그가 고향인 광양에서 만년을 보내지 않고 구례로 간 것은 그곳이 11살부터 시를 배웠던 스승 왕석보의 고향이었기 때문이다.

황현은 스승에게 시를 배우면서 스승의 세 아들 왕사각, 왕사천, 왕사찬 형제들과 교유하면서 호남에서 시 능력을 떨쳤지만, 스스로 능력 부족을 느끼고 1879년 24살의 나이에 서울로 갔다.
황현의 서울 생활은 행복했다. 10년 만에 생원회시에 장원급제했을 뿐 아니라 뜻을 같이하는 동지를 만났기 때문이다.

그가 서울에 와서 만난 사람 중 그의 삶에 큰 영향을 준 사람은 추금 강위, 영재 이건창, 창강 김택영이었다.
황현은 서울에서 당대 최고의 문인들과 사귀었던 것이다.
황현을 비롯한 이들 4명의 문인은 한말 문장의 4대가로 평가될 만큼 위대한 인물들이다.
 추사 김정희의 제자인 강위는 시로 뛰어났으며, 강위에게 배운 이건창은 김택영과 더불어 시와 문에 모두 뛰어났다.
황현은 이건창과 김택영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이건창의 선비정신을 몹시 부러워했다.
황현이 서울에 올라가기 전 이건창은 1875년 충청도 암행어사로 관찰사 조병식을 탄핵했다가 벽동에서 유배생활을 한 후 벼슬을 포기한 상황이었다.
특히 황현은 당시 이조판서였던 이건창의 할아버지 이시원이 병인양요 때 서양의 침략에 울분을 참지 못하고 자결한 사실에 큰 감동을 받았다.

중국 후난성 쥔산에 있는 순임금의 두 아내 여영과 아황의 묘. 강판권 교수 제공
중국 후난성 쥔산에 있는 순임금의 두 아내 여영과 아황의 묘. 강판권 교수 제공

 
황현은 김택영과 일본이 대한제국을 집어 삼킬 경우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기로 약속했다.
김택영은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처자식을 거느리고 중국으로 망명했으나, 황현은 김택영과 연락도 쉽게 닿지 않고 집안이 가난하여 여비도 없어서 결국 중국으로 망명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중국에 망명한 김택영을 잊지 못해 그를 그리워하는 시를 남겼다.

황현의 서울 생활을 아주 즐겁게 만든 것은 동지들과의 만남이었지만, 장원급제 뒤 관직생활은 고통 그 자체였다.
그는 관료들의 부정부패를 직접 본 후 곧장 사표를 내고 고향 전라도로 내려와 버렸다.
서울서 내려온 황현은 구안당에서 책을 읽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그의 독서는 나라를 어떻게 구할지를 고민하는 과정이었다.

고향에서 황현의 삶은 1905년(을사년) 러·일 전쟁에 승리한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한일협상조약’, 즉 을사늑약을 체결하자 급변하기 시작했다.
특히 을사늑약으로 민영환이 1905년 11월30일 이완식의 집에서 목숨을 끊자, 충격과 감동을 함께 받았다.
황현은 고종 황제와 대한제국 2천만 동포에게 자신의 죽음을 알린 후 자결한 민영환에 대해 ‘혈죽’(血竹)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민충정공(閔忠正公) 영환이 순의(殉義)한 이듬해 4월에 대나무가 빈소의 뒷마루에서 나왔으니, 대개 그가 자결한 칼과 피 묻은 옷을 소장한 곳이다.
모두 네 떨기 아홉 가지에 서른세 잎이 나왔다.
대나무가 흙이 아닌 공중에 뿌리를 내렸으니 충의가 하늘에 근거했음을 알겠다.(하략)” (<매천집> 4권)

황현은 민영환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후 5년 뒤 1910년 경술년 8월29일 일본이 대한제국의 국권을 빼앗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민영환이 글을 남기고 죽은 것처럼 ‘나라가 선비를 양성한 지 500년이지만 나라가 망하는 날 한명의 선비도 스스로 죽는 자가 없으니 슬프지 않겠는가’라는 유언과 함께 ‘절명시’(絶命詩), 즉 ‘목숨을 끊는 시’를 남겼다.

“난리 속에 살다보니 백발이 성성하구나

그동안 몇 번이나 목숨을 끊으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제는 더는 어찌할 수 없게 되었구나

가물거리는 촛불이 푸른 하늘을 비추도다.”

민영환과 황현은 순국지사(殉國志士)이다.
순국의 ‘순’은 순애보의 순, 순장의 순처럼 ‘따라 죽는 것’을 의미한다.
순국은 나라를 위해 죽은 경우를, 지사는 나라를 위해 죽은 선비를 말한다.
우리나라와 중국에서 대나무를 ‘순절’(殉節)의 상징으로 생각한 것은 중국 순임금의 두 아내, 즉 여영과 아황이 남편을 따라 죽으면서 탄생한 소상반죽(瀟湘斑竹)과 관련한 얘기 때문이다.

대나무를 절개·의리에 빗대는 건 곧고 마디가 있는 특성 때문이다
의는 곧 누구를 따라 죽는 것이었고 대나무는 순절의 상징이 됐다

국권 상실에 삶의 길을 잃은 황현은 차마 부끄러워 죽음의 길을 택했다
그의 길은 민영환을 본받은 것이고 의사 윤봉길은 그의 길을 본받았다

대나무를 절개와 의리, 즉 절의에 비유하는 것은 이 나무의 특성 때문이다.
 대나무의 가장 큰 특징은 마디이다. ‘마디’를 의미하는 한자가 바로 ‘절’이다.
대나무는 일정한 간격으로 마디를 만들고, 마디에서 가지를 만든다.
대나무의 줄기는 곧다. 대나무의 일정한 마디와 마디 사이는 진공상태이다.
진공상태로 만들어지는 마디가 바로 대나무의 정체성이다.
중국 은나라 시대 갑골문에 등장하는 ‘의’(義)는 ‘희생양’(犧牲羊)을 날붙이로 잡는 모양을 뜻한다.
따라서 ‘의’는 곧 누구를 위해 죽는 뜻이다.

황현은 자신을 위해 죽었다. 자신을 위해 죽는 것은 곧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과 같다.
민영환이 죽은 곳에서 다른 나무가 아닌 대나무가 탄생한 것은 이 나무가 바로 절개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민영환이 할복한 곳에서 태어난 푸른 대나무, 즉 청죽(靑竹)을 고려 말 정몽주가 순절한 개성의 선죽교(善竹橋)의 ‘의죽’(義竹)에 빗대어 ‘혈죽’(血竹)이라 불렀다.
황현이 혈죽을 높이 평가한 것도 민영환의 죽음을 남의 일이 아니라 자신의 일처럼 생각했기 때문이다.

선비들이 대나무를 ‘의’에 비유한 것은 <맹자>에 언급한 것처럼 ‘의’가 삶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오직 선비는 ‘의’라는 길을 통해 살아가는 것이다. ‘의’가 길인 것은 이 길로 가지 않으면 부끄럽기 때문이다.
그래서 맹자는 ‘수오지심’(羞惡之心), 즉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의를 실천하는 출발이라 말했다.
‘의’는 어떤 행동에 대처하는 자세를 말한다.
황현은 대한제국의 주권이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자 차마 부끄러워서 스스로 죽음의 길을 선택했다.
그가 걸었던 길은 민영환이 걸었던 길을 본받은 것이고, 황현의 길은 윤봉길을 비롯한 역사 속의 의사들이 본받았다.

조선시대 최장수 정승을 지낸 황희의 후손인 황현은 죽기 전 동생인 석전 황원에게 자신의 작품을 부탁했다.
동생이 지니고 있던 황현의 작품은 우여곡절 끝에 김택영이 골라서 <매천집>으로 간행되었지만, 조선총독부의 검열을 피할 수 없었다.
김택영은 자신과 같은 길을 걷기로 했던 황현의 죽음을 접하고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으며 황현이 죽은 뒤 첫 제삿날을 맞이하여 시를 지어 고인의 넋을 기렸다. 
 

우리나라에서 순임금의 두 아내처럼 순절을 상징하는 인물은 춘향이다.
소설 <춘향전>에 근거해서 춘향의 순절을 기린 곳이 전라북도 남원의 광한루(보물 제281호)이다.
이곳에 대나무가 없을 수 없다.
그런데 광한루는 황현의 선조인 황희가 세종 원년(1419)에 광통루라는 누각을 짓고 산수를 즐기던 곳이었다.
광한루는 1461년 부사 장의국이 보수하고, 요천의 맑은 물을 끌어다가 하늘나라 은하수를 상징하는 연못을 만들었다.
특히 1582년 전라도 관찰사 정철은 은하수 연못 가운데 신선이 살고 있다는 전설의 삼신산을 상징하는 봉래·방장·영주섬을 만들어 봉래섬에는 백일홍, 방장섬에는 대나무를 심고, 영주섬에는 ‘영주각’이란 정자를 세웠다.
현재의 광한루는 1626년 남원부사 신감이 복원한 것이고, 1794년에는 영주각이 복원되고 1964년 방장섬에 방장정이 세워졌다. 지금 방장섬 주변에는 대나무가 많이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