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과의 對話/강판권의 나무 인문학

[나무와 성리학] ⑦ 대추나무와 효

초암 정만순 2019. 1. 8. 17:25


[나무와 성리학] ⑦ 대추나무와 효



대추는 붉게 익은 뒤에도 오랫동안 썩지 않는다. 썩지 않는 붉은 대추는 조상을 향한 후손의 붉은 마음을 뜻했다. 대추나무에 조롱조롱 열린 대추 열매의 모습. 강판권 교수 제공
대추는 붉게 익은 뒤에도 오랫동안 썩지 않는다. 썩지 않는 붉은 대추는 조상을 향한 후손의 붉은 마음을 뜻했다. 대추나무에 조롱조롱 열린 대추 열매의 모습. 강판권 교수 제공
     
“아바마마, 제발 살려주세요. 아바마마, 제발 한번만 용서해 주세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정조의 몸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 정조는 매일 아버지가 살려달라고 부르짖는 꿈에 시달렸다.
액정별감 나상언의 형 나경언의 고자질로 시작된 영조의 둘째 아들이자 정조의 친부인 사도세자의 죽음은 조선시대 왕자의 죽음 중 가장 비극적이었다.
서인으로 강등된 세자는 영조의 명에 따라 목궤(木櫃), 즉 뒤주에 갇혔다.
그는 뒤주에 갇힌 지 8일 만인 1762년 윤달 5월21일에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아들이 죽자 부자간의 은의(恩義)를 생각하여 시호를 ‘사도세자’(思悼世子)라 했다.
‘사도세자’는 세자를 깊이 생각한다는 뜻이다.
영조는 자신보다 먼저 죽은 아들을 마음에 묻어야만 했고, 자식인 세자는 마음속으로 아버지를 원망하면서 깜깜한 뒤주에서 죽었다. 정조는 이렇게 죽은 아버지를 매일 꿈속에서 만났다.


창경궁 경춘전에서 탄생한 정조는 1776년 3월10일 경희궁 숭정문에서 나이 25살 때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올랐다.
정조가 왕위에 오른 후 가장 먼저 추진한 일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원한을 푸는 일이었다.
그는 즉위한 지 10일 만인 3월20일 지금의 서울 동대문구 전농동 서울시립대학교가 위치한 배봉산 아래 언덕에 묻힌 아버지의 무덤 ‘수은묘’를 ‘영우원’으로 고쳤다. 존호도 ‘사도’에서 ‘장헌’으로 바꾸고, 사당을 경모궁(景慕宮)이라 불렀다.

정조는 매일 정사가 끝나면 존현각(尊賢閣)에서 독서했다.
존현각 뜰 앞에는 대추나무가 한 그루 살고 있었다. 정조는 늘 존현각에서 독서하다가 뜰에 내려가면 대추나무를 살폈다.
그는 1777년 7월9일 존현각에 나아가 뜰 앞의 대추나무를 가리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궁(宮)은 원종(광해군, 1580~1619)이 태자 시절 살던 집이었다.
원종은 이 나무에다 말을 매며 ‘계마수’(繫馬樹)라고 이름 붙였다.
세월이 많이 지나자 대추나무가 말랐는데, 요사이 어느새 곁가지에서 싹이 나와 길이가 담장을 벗어났으니, 상서로운 나무라 해야겠다.”

경기도 화성에 있는 사도세자의 능 ‘융릉’.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가꾸는 데 심혈을 기울였는데, 국왕이 아버지 죽음에 정성을 다하는 것은 정치행위였다. 강판권 교수 제공
경기도 화성에 있는 사도세자의 능 ‘융릉’.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가꾸는 데 심혈을 기울였는데, 국왕이 아버지 죽음에 정성을 다하는 것은 정치행위였다. 강판권 교수 제공


말랐다 살아난 존현각의 대추나무는 정조에게는 특별한 나무였다
비명에 간 아버지를 생각하는 마음을 잘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추를 제사에 올리는 것은 많은 열매처럼 번성하라는 뜻이다
붉게 익은 뒤 오랫동안 썩지 않는 대추는 조상을 향한 붉은 마음이었다
오직 하나뿐인 대추의 씨앗은 후손들의 한결같은 마음을 상징한다

말랐다가 다시 살아난 존현각의 대추나무는 정조에게는 특별한 나무였다.
그가 존현각의 대추나무를 상서로운 나무로 생각한 것은 단순히 말랐던 나무가 다시 살아났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지켜준 나무이자 비명에 간 아버지를 생각하는 변치 않는 자신의 마음을 잘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조는 즉위 다음해 2월에 처음으로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후 거의 매년 그곳을 찾았다.
그는 자신이 아버지의 무덤을 찾는 과정을 기록으로 남겨 후대의 모범으로 삼도록 했다.
정조는 아버지의 무덤에 가서 제사를 지낸 뒤에는 반드시 무덤을 두루 살폈다.
정조는 1783년 4월에 아버지의 무덤에 제사를 올린 뒤 재실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그가 아버지의 무덤 옆 재실에서 하룻밤을 지낸 것은 “엊그제 존호를 올리는 예절을 끝마쳤으나, 사모의 마음이 끝이 없어 마음을 가누기가 더욱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정조는 1789년 8월12일에도 영우원에 나가 제사를 올렸다.
그러나 이날 정조가 배봉산 자락 안락 고개에 이르렀을 때 음식을 먹으면 토하는 격기(膈氣)가 매우 심해 가마를 멈추고 잇따라 탕약과 환약을 든 후에야 재실에 들어갔다.
판중추부사 서명선 등 참석자들이 모두 병이 좀 나은 후에 예를 행하도록 간청했으나, 정조는 왕궁에서 나올 때 어머니 혜경궁 홍씨(1735~1815)가 계신 혜경궁에 들러 제사를 마친 후 곧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지켜야 한다면서 곧바로 예를 행했다.
그는 제사상의 대추를 바라보면서 존현각의 대추를 생각했다. 
 

갈잎 중간키 대추나무는 한자어 대조(大棗)에서 변한 이름이고, 가시를 강조한 이름이다.
대추나무의 잔가지에는 아주 뾰족한 가시가 달려 있다.
대추는 중국 최초의 사전인 <이아>를 비롯해 <맹자> 등 고대 자료에 등장할 만큼 중국에서는 아주 일찍부터 애용했다.
대추나무의 특징 중 하나는 다른 나무보다 싹이 아주 늦게 돋는 것이다. 그
래서 느릿느릿 움직이는 양반에 빗대어 대추나무를 ‘양반나무’라 부른다.
달걀형의 잎은 광택 피부를 자랑한다. 세 개의 큰 잎맥을 가진 잎은 사랑을 상징하는 모양이다.
여름으로 접어드는 시기에 가시 달린 잎겨드랑이에 2~3개의 황색 꽃이 피면 무척 아름답다.

대추를 제사에 올리는 것은 이 나무에 열매가 많이 달려 자손이 번성하라는 뜻이다.
자손의 번창은 가장 큰 효이다. 자손의 번창이 큰 효인 것은 모든 생명체의 존재 이유가 종족 보존이기 때문일 터이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아들 정조만 남긴 채 세상을 떠났으니 불효자였다.
조상들은 정월 대보름과 오월 단오에 대추나무를 ‘시집’보냈다.
이날에는 대추 가지가 둘로 갈라진 틈에 돌을 끼운다.
그리고 마을 아낙네들이 저마다 흩어져 큰 돌을 주워오면 마을에서는 그중 가장 적절한 돌을 골라 나무에 상처가 날 정도로 빠지지 않게 꽉 끼운다.
가지가 갈라진 대추는 곧 여자요, 돌은 곧 남자인 셈이다.
대추를 제사에 올린 또 다른 이유는 열매가 붉게 익으면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열매들은 익으면 곧 썩지만 대추는 붉게 익은 뒤에도 아주 오랫동안 썩지 않는다.
썩지 않는 붉은 대추는 곧 조상을 향한 후손의 붉은 마음이었다.
대추를 제사에 올리는 또 하나의 이유는 열매의 씨앗이 한 개이기 때문이다.
보통 열매의 경우 씨앗이 여러 개지만, 대추는 오직 하나뿐이다. 오직 하나뿐인 대추의 씨앗은 조상을 향한 후손들의 한결같은 마음을 상징한다.

대추가 혼례에 빠지지 않는 것도 조상에 대한 숭배 때문이다. 조상 숭배는 곧 후손 번창과 상통한다. 그래서 폐백 때 시부모 혹은 친부모 등은 자식들에게 대추를 전달한다. 조선시대에는 신부가 시아버지를 뵐 때도 대추를 드렸다. 신부가 시아버지에게 대추를 드린 것은 공경의 뜻이었다. 붉은 대추나무의 열매는 불을 상징했다. 대추나무의 붉은 열매는 조선시대의 경우 여름에 취했다. 이는 질병을 쫓기 위해서였다.

정조는 제사를 마치고 아버지의 무덤에 다가가 풀을 부여잡고 어루만지면서 울부짖고 가슴을 쳤다.
주위 사람들이 만류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병은 더욱 심해져 곡소리조차 나오지 않았을 뿐 아니라 구토를 멈추지 않았다.
결국 신하들이 정조의 몸을 일으켜 세워 손수레를 태워 재실로 모셨다.
정조는 병이 좀 나은 후에야 궁으로 돌아왔다.
정조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은 영우원을 현륭원(顯隆園, 지금의 융릉)으로 바꾸면서 한층 깊어졌다.
정조 13년(1789)) 10월 16일 현륭원이 현재 경기도 화성시에 완공되어 그해 10월7일 이장했다.
정조는 아버지 묘역 주위의 나무를 심는 데 내탕금 1천 냥을 사용했다.
당시 쌀 한 가마니의 가격이 0.9냥 정도였으니, 정조가 아버지 묘역에 나무를 심는 데 사용한 돈은 쌀 1천 가마니가 넘었다.
현륭원의 나무는 8개 고을 민간인을 동원해서 심었다.
정조는 현륭원에 나무 심기가 끝나자 참여한 자는 물론 감독관에게도 상을 내렸다.
또 현륭원 주변의 백성들이 편리하게 농사짓도록 현륭원 동구에 만년제라는 제방을 만들었다.
정조는 이듬해 2월에 이장한 현륭원에 제사를 지냈다. 제사를 올린 후 무덤에 올라 산기슭을 두루 살폈다.
그는 아버지의 묘를 이장한 후 1795년 윤달 2월9일에 어머니 혜경궁을 모시고 현륭원을 찾았다.


정조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은 결코 특별하지 않다.
성리학을 지배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시대의 경우 자식의 부모에 대한 효는 일종의 의무였기 때문이다.
정조가 아버지의 묘를 찾아 제사를 올린 것은 자식으로서는 당연한 의무였다.
자식의 부모에 대한 효는 낳아준 데 대해 은혜를 갚는 보은 정신이다.
부모에 대한 보은 정신은 공자가 정립했다.
공자가 부모 사망 후 3년 동안 모시도록 한 것은 자식이 3살까지 부모의 품에서 벗어나면 죽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공자는 자식이 자신을 세상에 존재토록 한 3년만이라도 돌아가신 부모를 생각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 여겼다.
그래서 공자를 시조로 삼고 있는 성리학의 신봉자들이 부모의 죽음에 극진한 예를 갖추는 것은 당연했다.
특히 백성의 모범이어야 할 국왕이 아버지의 죽음에 정성을 다하는 것은 당연한 정치행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