樹皮 圖鑑 - 개잎갈나무
우리나라에서는 히말라야에서 들어온 종을 중부 이남에서 가로수로 흔히 심고 있다.
키가 30m까지 자라며 줄기에서 가지가 땅과 수평으로 나오는데 가지 끝이 밑으로 처지는 나무 생김새가 매우 아름답다.
잎은 짙은 초록색으로 줄기에 한 개씩 달리나 가지 끝에서는 우산살처럼 모여 달린다.
구과는 10월에 피어 다음해 10월에 익는다.
생장속도가 빠르고 줄기에서 새눈이 잘 나오지만 추위와 공해에 약하다.
햇빛이 잘 드는 곳이면 서울 근처에서도 겨울을 날 수 있다
줄기
높이가 30m에 달하고 가지가 수평으로 퍼지며 일년생가지에 털이 있고 밑으로 처지며 나무껍질은 회갈색이고 얇은 조각으로 벗겨진다.
나무껍질
나무껍질은 회갈색이고 얇은 조각으로 벗겨진다.
히말라야시다는 이름 그대로 세계의 지붕인 히말라야산맥이 고향인 나무다.
대체로 히말라야라고 하면 눈 덮인 만년 빙하를 상상하기 쉽지만 산맥의 끝자락은 습하고 따뜻한 아열대에 가까운 지역이 많다. 인도에서는 서북쪽의 따뜻한 땅에 수만 년 전부터 둥지를 틀었다.
원산지에서는 대부분의 바늘잎나무가 그러하듯, 무리를 이루어 자기들끼리 숲을 만든다.
원산지에서의 이 나무는 임신이 잘되고, 많은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신통한 힘이 있다고 믿는다.
큰 히말라야시다 밑에서 양을 잡아 제물을 바치고 주술을 외우기도 했다.
나무 하나하나에는 땅에 거의 닿을 듯이 아래로 늘어진 가지가 사방으로 길게 뻗어 있으며, 위로 갈수록 차츰 짧아져서 전체적으로 원뿔모양의 아름다운 자태를 만든다.
히말라야시다는 자연 상태 그대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자연미인’일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가지를 마음대로 잘라주어도 별 탈 없이 다시 가지를 뻗고 잎을 내밀어 원하는 모양을 만드는 특징이 있다.
심하게는 가지 몇 개만 남겨놓고 푸들 강아지처럼 동글동글 잘라주어도 그대로 잘 참고 자란다.
이런 나무의 특성은 고향인 인도에서만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정원수로서 추운 지방을 제외하면 세계 어디에서나 심고 가꿀 수 있는 나무라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자기네들 나무인 ‘금송(金松)’과 ‘아라우카리아(araucaria)’라는 열대지방의 바늘잎나무, 그리고 히말라야시다를 세계 3대 ‘미수(美樹)’라 부르기도 한다.
우리나라에는 1930년경에 수입되어 대전 이남의 따뜻한 지방에서 주로 심고 있다
대구의 동대구로에 심은 히말라야시다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가꾸어 놓은 곳으로 유명하다. 박정희 정권 시절, 대통령이 이 나무를 좋아한다고 알려지자 그때 처음 조성된 동대구로에 가로수로 심어 오늘날의 히말라야시다 거리로 만들었다.
그러나 최근 나무가 크게 자라면서 바람에 잘 버티지 못하고 큰 덩치가 맥없이 넘어져 버리는 경우가 많다.
가장 큰 원인은 천근성(淺根性) 나무로 뿌리가 옆으로만 뻗고 깊이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원산지에서야 무리 지어 자라므로 설령 센바람이 분다고 해도 서로 의지하여 잘 버텨 주고, 원뿔형의 나무 모양은 무게중심이 거의 땅에 있어서 뿌리가 얕아도 별다른 문제가 없다.
하지만 가로수로 심은 히말라야시다는 통행하는 자동차나 사람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아래쪽 가지를 자꾸 잘라버려 무게중심을 잡지 못한다.
게다가 집단 자람의 특성도 무시하고 한 나무씩 심어 두었으니 바람에 버틸 힘도 없다.
궁여지책으로 긴 쇠파이프 말뚝으로 받침대를 만들어주었지만 미관상으로도 안 좋고 태풍이라도 지나갈 때면 사람들의 애간장을 태운다.
아무리 인위적으로 관리해주는 가로수라도 자기가 자라던 상태 그대로 가장 가까운 모양을 유지해야만 잘 자랄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지켜주지 않은 탓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가로수로서 히말라야시다는 적당하지 않다.
히말라야시다는 늘푸른 바늘잎 큰 나무로 키 30미터, 지름이 두세 아름에 이를 수 있는 큰 나무다.
나무껍질은 회갈색이고 얇은 조각으로 벗겨진다.
잎은 짧은 가지에서는 모여나기로 달리고 새 가지에서는 한 개씩 달리며, 손가락 두 마디 길이 정도의 바늘잎이며 길이
3~4cm로서 짙은 녹색이며 끝이 뾰족하고 단면은 삼각형이며 1개씩 달리지만 짧은 가지에서는 짧은 가지에는 30개가 모여 난다.
잎이 달리는 모양은 언뜻 보면 잎갈나무와 비슷하여 다른 이름은 ‘개잎갈나무’다.
잎
수꽃
꽃은 암수 한 나무로 늦가을에서부터 초겨울에 걸쳐 피며, 특히 새끼손가락만 한 수꽃은 빳빳이 위를 향하여 핀다.
수컷을 상징하는 것 같아 약간 에로틱해 보이기도 한다.
노란 꽃가루가 바람에 날려서 수정되는 풍매화로서, 꽃이 필 때가 되면 나무 근처에 세워둔 자동차 보닛에 꽃가루가 노랗게 쌓인다.
암꽃은 연한 보랏빛으로 피는데, 짧은 가지에 달리며 너무 작아서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수정된 암꽃은 이듬해 가을에 회갈색으로 익는다.
솔방울
솔방울은 타원형이며 당당히 하늘을 향해 붙어 있고, 익으면 비늘이 벌어져 씨가 떨어진다
구과는 타원형이며 길이 7 ~ 10cm, 지름 6cm정도로서 녹색이 도는 회갈색이다.
씨앗바늘은 넓은 선상(扇狀) 삼각형이고 가장자리와 뒷면이 밋밋하지만 겉에 잔털이 있으며 종자가 2개씩 들어 있다.
종자는 삼각형으로 넓은 막질의 날개가 있고 자엽은 9 ~ 10개이며 날개는 길이 2.2 × 3.7cm이다.
다음해 9 ~ 12월에 성숙한다.
개잎갈나무(히말라야시다)
세계의 지붕, 히말라야에 사는 개잎갈나무
적지 않은 지방자치단체들이 화려한 꽃을 가로수로 조성하고 있어 매우 안타깝다.
가로수 선정에 누가 참여하는지 궁금하다. 철학 없는 가로수 조성은 도시를 아름답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천박한 도시로 전락시킬 수 있다.
한 그루의 나무를 도심에 심는 순간, 그 나무는 도시의 인간과 더불어 문화의 일부이다.
조금은 낯선 이름, 개잎갈나무
이름은 한 존재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통로다.
나무와 풀이름은 한글과 한자, 그리고 학명으로 이루어진다. 요즘 나무도감에 등장하는 나무 이름 중에는 과거에 불렀던 이름과 다른 게 종종 있다.
그 중 우리말로 바뀐 게 적지 않다.
나무를 비롯한 식물이나 학문을 다른 나라에서 수입할 경우 그것을 어떻게 수용하느냐의 문제는 아주 중요하다.
어떻게 수용하느냐에 따라 수용 대상에 대한 이해와 영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에서 나무를 수입하면 그 나무를 어떤 식으로든 불러야만 한다.
이런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게 이른바 ‘격의(格義)’다. 격의는 뜻을 맞춘다는 뜻이다.
요즘 말로 하면 격의는 번역이다. 번역은 단순히 문자를 옮기는 차원이 아니라 한 나라의 문화와 문화의 수용과정이다. 수입 나무를 어떻게 작명하느냐의 문제는 문화의 문제이고, 문화는 한 나라 국민의 의식을 지배한다.
그래서 한 종류의 나무를 작명하는 작업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신중해야만 한다.
특히 식물의 작명에는 가능하면 그 식물의 정체성을 잘 드러내 붙일 필요가 있다.
개잎갈나무는 나무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겐 아직 낯선 이름이다. 이 나무의 이름은 ‘개’와 ‘잎갈’의 합성어다. 식물 이름에 등장하는 ‘개’는 대개 ‘유사’, ‘가짜’를 의미한다.
‘잎갈’은 ‘잎을 간다, 잎이 떨어진다’는 뜻이다.
그러니 개잎갈나무는 잎을 갈지 않는 나무라는 뜻이다. 잎을 갈지 않는 나무를 흔히 상록수, 즉 늘푸른나무라 부른다.
그런데 왜 개잎갈나무를 상록수라 부르지 않는 것일까. 과연 개잎갈나무에는 이 나무의 특성이 있는가. 개잎갈나무처럼 잎을 갈지 않는 나무는 아주 많다.
그런데도 상록수를 모두 개잎갈나무라 부르지 않는다.
누가 이 나무 이름을 붙였는지 모르지만, 개잎갈나무라는 이름에는 이 나무의 특성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했다.
익숙한 이름, 히말라야시다(Hymalaya cedar)
총길이 2,400km에 해당하는 히말라야는 세계의 지붕이다.
이곳에 세계에서 가장 높은 에베레스트 산이 있다.
에베레스트는 영국 사람의 이름이지만, 산스크리트어로는 ‘하늘의 이마’, 티베트어로는 ‘세상의 어머니’를 의미한다. 히말라야시다는 ‘히말라야’와 ‘시다’의 합성어다.
히말라야는 고대 산스크리트, 즉 범어(梵語)로 ‘눈(雪)’을 뜻하는 ‘히마(hima)’와 ‘거처’를 뜻하는 ‘알라야(alaya)’의 복합어다.
‘시다’는 향나무와 삼나무 같은 침엽수를 총칭하는 이름이다.
따라서 히말라야시다의 이름에는 지역명과 나무의 기본 특성이 함께 들어 있다.
히말라야시다의 이름은 학명에 가깝다.
이 나무의 학명은 Cedrus deodara (Roxb.) Loudon으로 영국 출신의 식물학자 루던(Loudon, 1783~1843)이 붙였다.
학명에는 원산지 표시가 없지만, 히말라야시다는 이 나무의 원산지가 히말라야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학명 중 속명에 해당하는 ‘체드루스’는 ‘향나무’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케드론(kedron)’에서 유래했다.
종소명에 해당하는 ‘데오다라’는 ‘신목(神木)’을 뜻한다. 학명 중 체드루스는 히말라야시다의 시다를 이해하는 열쇠다.
결국 학명을 붙인 사람은 이 나무가 소나무과에 속하지만 향나무와 많이 닮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아울러 학명에서는 이 나무가 신령스럽다는 의미도 놓치지 않고 있다.
이 나무를 한국의 느티나무, 은행나무, 소나무 등과 같이 신목으로 생각한 것은 무엇보다도 추운 곳에 살면서도 아주 오래 살 뿐 아니라 목재의 가치도 높았기 때문이다.
개잎갈나무와 히말라야시다는 같은 나무를 다르게 부르는 이름이지만 담고 있는 의미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개잎갈나무는 나무의 의미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 반면 히말라야시다는 상대적으로 나무의 의미까지 담고 있다.
이 나무를 다른 나라에서 어떻게 부르는지 비교하면 개잎갈나무가 잘 붙여진 이름인지 짐작할 수 있다.
히말라야 산맥과 인접한 중국에서는 이 나무를 설송(雪松)이라 부른다.
북한에서도 이 나무를 중국과 같은 이름으로 부른다.
중국과 북한에서 부르는 설송의 ‘설’은 히말라야를, ‘송’은 이 나무가 소나무와 닮았기 때문이다.
설송은 이 나무의 원산지와 특성을 함께 고려한 이름이다.
솔로몬이 성전에 바친 나무, 백향목(柏香木)
우리나라에서는 이 나무를 개잎갈나무와 히말라야시다 외에 다른 이름으로 불렀던 적이 있다. 그 이름은 백향목이다.
기독교 신자들은 이 나무를 성경에서 아주 자주 만날 수 있었지만, 성경에 등장하는 나무가 개잎갈나무인지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내가 잘 아는 분 중 아주 독실한 기독교신자가 계셨다.
그 분은 이 나무에 대한 나의 글을 보고서야 백향목이 개잎갈나무라는 것을 알았다.
더욱이 그 분이 다니는 교회에 100년 동안 살고 있는 나무가 바로 성경에 나오는 백향목인 줄도 그때서야 비로소 알았다.
한글 성경 번역본에 등장하는 백향목은 학명 중 속명에 해당하는 ‘체드루스’를 우리말로 옮긴 듯하다.
백향목은 무슨 뜻일까? 백향목은 측백나무와 향나무를 합한 이름이다.
한국 사람들은 대개 ‘백’을 ‘잣나무’로 번역하지만 한자의 뜻은 측백나무다.
백향목은 학명의 뜻을 잘 살린 이름이다.
그러나 개잎갈나무를 백향목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이 나무는 성경에서는 힘· 영광· 평강을 상징한다.
아울러 이 나무는 솔로몬 왕이 궁전과 모리아(Moniah) 산 위에 성전을 세울 때 사용했다.
솔로몬은 이러한 대역사를 위해 3만 명의 이스라엘 인과 15만 명의 노예와 3천 명이 넘는 관리를 보내어 20여 년 넘게 광대한 나무를 베게 했다.
‘평화’를 의미하는 ‘솔로몬’은 평화롭게 살고 있는 백향목의 목숨을 한순간에 앗아간 장본인이다.
백향목으로 건설한 성전이 얼마나 화려했을지는 보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백향목을 벤 사람은 솔로몬만이 아니다.
청동기를 만든 이후 인류는 백향목을 비롯한 각종 나무로 문명을 일구었다.
나무의 희생 없는 인류 문명은 상상할 수 없다.
레바논의 국기에 등장하는 나무, 레바논시다
같은 나무면서도 사는 지역에 따라 이름이 다를 수 있다.
히말라야시다가 히말라야에 살아서 붙인 이름이라면, 레바논에 사는 개잎갈나무는 레바논시다다.
레바논 사람들은 이 나무를 끔찍하게 사랑한다.
레바논시다는 이 나무가 주로 레바논 산맥에 살고 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레바논 산맥도 히말라야 산맥처럼 1년의 반이 눈으로 덮여 있다.
그래서 레바논의 국명도 ‘하얗다’를 의미하는 ‘라반(Laban)’에서 유래했다.
레바논시다는 레바논의 나라 나무, 즉 국목(國木)이다.
현재 레바논 산맥 골짜기에 5천 년 동안 살고 있는 개잎갈나무가 있다.
그러나 레바논시다도 예루살렘 성전과 이집트의 신전 건설을 위하여 잘려 나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레바논 사람들이 사랑하고 있는 개잎갈나무는 최근 혁명을 상징하는 나무로 불린다.
1992∼1999년, 2000∼2004년 10월까지 총리를 역임한 레바논의 리피크 하리리가 2005년 베이루트에서 차량폭탄 테러로 사망했다.
그는 레바논에 주둔하고 있는 시리아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야당 진영에 합류했다.
그가 5월 총선을 앞두고 암살당하자 레바논에선 오랜 세월 종주국 노릇을 해온 시리아와의 관계를 청산하자는 시위가 잇따랐다.
미국은 레바논 민중의 움직임을 ‘백향목 혁명’이라 불렀고, 우리나라에서도 같은 이름으로 불렀다.
이처럼 단풍나무가 캐나다의 국기에 등장하듯 한 그루의 나무는 한 민족의 정체성까지 간직한다.
대통령이 사랑한 나무, 히말라야시다
히말라야와 레바논에 자생하던 개잎갈나무는 우리나라 도시 곳곳에서 볼 수 있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집중적으로 심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왜 하필 이 나무를 좋아했는지 알 수 없지만, 늘 푸르고 목재의 가치도 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개잎갈나무는 우리나라 초등학교 어디든 버즘나무와 함께 즐겨 심었던 나무다.
개잎갈나무는 늘 푸르고 가지도 길게 뻗어 이 나무에 눈이 내리면 아주 운치가 있다.
그러나 이 나무는 덩치에 비해 뿌리가 깊지 않아 태풍에 아주 약하다.
히말라야와 레바논 산맥의 개잎갈나무들은 뿌리가 서로 엉켜 있기 때문에 눈보라에도 잘 견딜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개잎갈나무를 가로수로도 즐겨 심었다.
특히 내가 살고 있는 대구 동대구로는 대부분 개잎갈나무다.
이 길의 개잎갈나무는 다른 지역 사람들이 대구의 상징으로 꼽을 만큼 강한 인상을 준다.
내가 다닌 계명대학교 대명동 캠퍼스에서도 학교를 세울 때 노천강당 주변에 돌을 파서 이 나무를 심었다.
대명동 캠퍼스의 상징 나무도 개잎갈나무였다.
그러나 대구를 상징하던 개잎갈나무는 2003년 9월 ‘태풍 매미’로 큰 피해를 입었다.
내 모교인 대명동 캠퍼스의 개잎갈나무는 모두 넘어져 이제 한 그루도 남아 있지 않고, 그 자리에 소나무를 심었다.
동대구로의 개잎갈나무도 대부분 가지가 잘리고 지주대에 의지해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태풍 매미 직후 동대구로의 개잎갈나무는 대구 시민들의 논쟁 대상으로 떠올랐다.
개잎갈나무를 그대로 둘 것인가, 아니면 다른 나무로 바꿀 것인가를 둘러싼 논쟁이 대구의 여름 날씨만큼 뜨겁게 달아올랐다. 논쟁은 결론 없이 끝났다.
여전히 동대구로의 개잎갈나무는 남아 있다. 문제는 나무가 아니라 나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인식이다.
개잎갈나무와 가로수
가로수의 역사는 길다. 어떤 나무를 가로수로 할 것인지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르다.
중국 진나라 수도 함양의 가로수는 소나무였고, 한나라 수도 장안의 가로수는 회화나무였다.
중국 당나라 이후 수도의 가로수는 주로 버드나무였다.
그러나 우리나라 가로수의 역사는 아주 짧다.
개잎갈나무를 가로수로 삼았던 이유 중 하나는 도시를 늘 푸른 나무로 가꾸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도시 규모가 크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동차가 거의 없던 시절, 아울러 가로수의 가치를 다양하게 고려할 수 없었던 시절에는 개잎갈나무를 가로수로 선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박정희 대통령 시절 개잎갈나무의 가로수선정을 무조건 탓하는 것은 비역사적인 해석이다.
개잎갈나무는 현재 가로수로 적합하지 않다.
그러나 지금도 개잎갈나무는 대구 동대구로의 주요 가로수다.
이처럼 현재 가로수로 적합하지 않은 나무들이 도시 곳곳에 살고 있다.
도시에 오지 말아야 할 나무들이 매일 매연을 마시면서 힘들게 살고 있는 모습을 보면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인간이 가장 먼저 할 일은 가로수에 대한 성찰이다.
어쩔 수 없이 인간이 살기 위해 나무를 도심으로 가져와야 한다면, 적어도 도심에서라도 나무가 본성대로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라도 해야 옳다.
개잎갈나무를 도시의 가로수로 삼은 것은 애초부터 나무에 대한 깊은 배려가 부족한 탓이다.
그러나 지금 와서 개잎갈나무를 비롯한 도시에 적합지 않은 모든 가로수를 벤다면, 이 또한 나무의 생명을 모독하는 짓이다.
도심의 개잎갈나무는 인간의 무지가 낳은 비극의 가로수다. 이런 비극이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
비극을 줄이는 방법은 나무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최근에도 지방자치단체에서 조성하고 있는 각종 가로수 정책은 개잎갈나무의 전철을 밟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적지 않은 지방자치단체들이 화려한 꽃을 가로수로 조성하고 있어 매우 안타깝다.
가로수 선정에 누가 참여하는 지 궁금하다.
철학 없는 가로수 조성은 도시를 아름답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천박한 도시로 전락시킬 수 있다.
한 그루의 나무를 도심에 심는 순간, 그 나무는 도시의 인간과 더불어 문화의 일부이다.
개잎갈나무는 아주 넓은 곳에서 살아야 천명을 누릴 수 있다.
개잎갈나무가 천명을 누리도록 배려하지 않으면 결국 인간도 천명을 다할 수 없다.
개잎갈나무에 달린 둥근 열매가 익어 떨어져 후손을 만들 수 있어야 인간도 후손을 낳을 수 있다.
내 연구실에는 올 봄 잘린 개잎갈나무에서 채취한 열매의 흔적이 있다.
나는 ‘피 묻은’ 개잎갈나무의 열매를 연구실에 가져와 걸어두었다.
시간이 지나자 열매가 조금씩 갈라지면서 껍질이 우주의 무게로 뚝뚝 떨어졌다.
갈라진 열매는 매미날개보다 얇고 부드러운 막이 겹겹으로 씨앗을 둘러싸고 있었다.
나는 한 치의 오차 없이 만든 개잎갈나무의 열매를 보면서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그런 개잎갈나무를 함부로 대하지는 않았는지 반성했다.
나는 죽은 개잎갈나무의 열매를 헛되이 할 수 없다는 생각에 학습 자료로 활용하기로 작정했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떨어진 열매 껍질을 치우지 않고 몇 달 동안 그냥 둔 채, 연구실에 오는 사람마다 개잎갈나무의 삶을 얘기했다.
때론 열매를 가져가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보여주면서 나무를 예찬했다.
지금도 심(心)만 남은 열매가 창처럼 책에 꽂혀 있다.
아직도 열매의 흔적을 버리지 않고 간직하고 있는 것은 개잎갈나무의 죽은 열매를 통해 사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다.
죽은 자를 통해 사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면,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
책에 꽂힌 두 개의 개잎갈나무 열매는 나에게 ‘명(銘)’이다.
열매를 바라보면서 어떻게 살지를 새기는 경구와 같은 존재다.
연구실 창문 너머 개잎갈나무가 바람에 춤춘다.
히말라야와 레바논 산맥에서 사라진 개잎갈나무의 비명소리가 문틈 새로 들어온다.
개잎갈나무로 만든 화려한 성전과 신전은 사라지고 그곳엔 먼지만 뒹군다.
이제 ‘성전’과 ‘신전’은 개잎갈나무의 희생으로 만들 수 없다.
개잎갈나무와 함께 사는 자체가 성전과 신전이다.
성전과 신전은 다른 생명과 더불어 살 때만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히말라야시다의 솔방울 열매와 씨앗의 모습
솔방울처럼 물에 젖으면 인편이 모두 움츠려들었다가 습기가 걷히면 꽃처럼 피어납니다.
인편은 잘 익은 순서대로 떨어지며 인편의 사이에서 솔씨와 닮은꼴의 시과 씨앗이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