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巨樹 保護樹 記念物/淸道 老巨樹

淸道 角北面 덕촌리 털왕버들 (천연기념물)

초암 정만순 2018. 3. 6. 07:50



淸道 角北面 덕촌리 털왕버들



천연기념물 제298호

수령 200년 추정

나무높이 15m

가슴높이 둘레 4.9m

수관 넓이 동서 21.25m, 남북 19.6m

소재지 : 경북 청도군 각북면 덕남길 11-7

                                     덕촌리 553-2





털왕버들은 평지나 냇가 근처에서 자란다. 높이 약 20m, 줄기 지름 1m이다.

나무껍질은 회갈색이고 깊게 갈라지며, 가지는 황록색으로 털이 나고 겨울눈은 달걀 모양에 털이 없다.

잎은 길이 3~10cm로 타원형 또는 긴타원형인데, 앞면은 윤기 나는 녹색이나 뒷면은 흰색이며 끝부분이 뾰족하고 안으로 굽은 잔톱니가 있다.

 잎자루는 길이 1.5cm에 털이 있다.

꽃은 암수딴꽃으로 4월에 피며, 암꽃이삭은 꽃대에 융모가 있고 꿀샘은 1개이다.

열매는 삭과(朔果)로 길이 3mm 정도의 달걀 모양이며 5월에 익는다.

다른 왕버들류와 달리 가지와 잎자루에 털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한국 특산종으로 충청남북도 및 강원도 이남에 분포한다.

바람을 막아주는 방풍용 또는 정자나무로 쓰인다.


경상북도 청도군 각북면의 털왕버들은 천연기념물 제298호로 지정되어 있다.

덕산초등학교 옆 냇가에서 자라고 있는 청도 덕촌리의 털왕버들은 나이가 20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가 14m, 둘레는 3.6m이다.

이 버드나무는 봄에 잎이 필 때 한번에 피는가 하면 가지에 따라 늦게 피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처럼 잎이 피는 상황에 따라 농사가 풍년이 들기도 하고 흉년이 들기도 한다고 전해지고 있다.

현재 마을 주민들의 휴식처로 사용되고 있다.

청도 덕촌리의 털왕버들은 희귀종 버드나무로 오랜 세월동안 조상들의 보살핌 속에 살아왔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털왕버들 중의 하나로 생물학적 보존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덕촌리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 각북면에 속한 법정리이다.

 

[개설]

점촌과 덕산을 합해서 이루어진 이 마을은 각북면에서는 가장 큰 마을로 분류되고 있다.

 

[명칭 유래]

덕산 마을과 지촌 마을을 합하여 덕촌리가 되었다. 1리인 지촌과 2리인 덕산은 거리가 꽤 멀리 떨어져 있다.

각북면의 중심지에 해당되는 곳이다.

덕산 마을 앞에는 비슬산 용천사 계곡에서 흘러 내려오는 시원한 개울이 있고 그 개울 건너에 이른바 똥뫼산이라 불리는 곳이 있고 이를 좀 순화시켜 독산(獨山)’이라고도 했다.

여기에서 덕산(德山)’이란 이름이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다음은 디지털 청도문화대전(필자 박윤제)에 소개된 이 마을의 형성과 변천이다.


 밀양부에 소속되어 있을 당시의 마을 이름은 지동(枝洞)이라고 표기하고 갓말이라고 불렀다.

조선 후기에는 지촌이라는 이름으로 불렀으며 1906(광무 10)에 대구군에서 청도로 이관되었다.

1914년 행정 구역 재편 때 덕산동과 지촌동을 병합하여 덕촌동으로 하였으며 각북면에 편입하였다.

1988년 덕촌동에서 덕촌리로 이름을 바꾸었다.


 또한 청도군지에 소개된  덕촌리(德村里) 유래는 다음과 같다


우미산(牛尾山)은 보기에도 우람하게 동에서 반공(半空)에 솟아 달성군(達城郡)의 근접을 막고 있으며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지슬천과 오산천이 합류하는 관계로 개천돌이 많은 지층을 형성하였고 남()만 약간 열려 있으나 분지 평야가 평평하게 전개되어 본 면의 심장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리인 덕촌에는 1600년경에 경주인 배태룡 공이 입촌하여 마을의 터전을 닦으면서 마을의 융성을 도모키 위해 전력을 했다는 것이다.

2리에는 1500년 중엽에 밀양인 변수철 공이 입주하고 마을을 열어 나갔다는 것이다

마을 동쪽으로는 삼성산이 있으며  서쪽으로는 비슬산이 있다.

비슬산과 홍두깨산 사이에 형성된 마을로 마을 앞으로 오산천이 흐르고 있다.

마을 앞의 들은 경지 정리가 잘 되어 있는 경작지가 있다.


행정리로 덕촌 1리와 덕촌 2리가 있으며, 점촌(店村)[점마]과 덕촌 마을이 있다.

점촌은 지실 또는 지슬(只瑟)로 불리는데 조선 시대에 옹기를 굽던 가마터가 있는 곳이다.


대구를 잇는 각북 정대길이 연결되어 드라이브 코스로 각광을 받고 있으며, 전원주택지로 사람들이 하나둘 들어오고 있다.


마을 서쪽 산모퉁이에 무진대(無盡臺)가 있었는데 사인(士人) 박진이 축조하였다.

덕산 저수지가 있으며 저수지 아래에는 저수지와 관련된 비석이 있다. 마을 입구에는 효자비가 하나 있기도 하다.


덕촌 마을에는 무진대 앞에 군수 선정비가 2개 있는데 하나는 글씨를 전혀 판독할 수 없이 훼손되어 있다. 덕촌 마을 한가운데에는 석불상이 많이 훼손된 채 길옆에 세워져 있고 정월 초에는 음식물을 훼손된 불상 앞에 놓기도 한다. 지촌 마을에는 아직도 성황당이 있으며, 남 성황과 여 성황을 따로 모시고 있다.


  지방도 902호선을 따라 청도 방면 좌측에 덕산 초등학교가 위치하며, 독뫼산 옆 개울가에는 천연기념물 제298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는 덕촌리 털왕버들이 있다.

 

[점촌]

지실 또는 지슬(只瑟)로 불리는 이 마을은 조선시대 백자를 굽던 자리로 가마터가 있는 곳이다. 그러나 가마실과는 다른 지역으로 옹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옹기를 만들었던 곳이 있었는데 우산리(牛山里)로 옮겨간 것이라고 하며 따라서 옹기를 만들었던 곳이기 때문에 점마라고 부른다.

 

[덕촌]

덕산이란 독산(獨山)이 변하여 덕산이 되었다고 하며 마을 앞 개울 건너에 똥뫼산이 있어 이 산을 지칭하여 독산(獨山)이라 불렀는데 덕산(德山)이라고 표기하고 덕산으로 마을 이름을 정했다고 한다. 옛날에 덕촌리에 있는 아주 작은 독산(獨山)이 비슬산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라고 현풍현에서 산세(山稅)를 받으러 왔다고 한다. 순박한 주민들이 아전들의 위압에 견디다 못해 여러 해를 산세를 주었는데 밀양 박씨들 문중에서 어른이 있어 이 일을 알고는 똥뫼산(독산)은 우리에게는 아무 필요 없으니 가지고 가라고 하자 세를 징수하러 오지 않았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형성 및 변천]

밀양부에 소속되어 있을 당시의 마을 이름은 지동(枝洞)이라고 표기하고 갓말이라고 불렀다. 임진왜란 때에 부사 이영(李英)이 군사를 주둔하여 머물렀는데 선조 정유년에 가을과 겨울이었다. 마을 서쪽 산모퉁이에 무진대(無盡臺)가 있었는데 사인(士人) 박진이 축조하였다. 조선조 후기에는 지촌이라는 이름으로 쓰여져 있었고 1896년에 대구부에서 청도로 이관된 마을이며 1916년 행정구역 재편 때 덕산으로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자연 환경]

비슬산과 홍두께산 사이에 형성된 마을은 마을 앞으로 오산천이 흐르고 있고 마을 앞 뜰은 경지정리가 잘 되어 있는 경작지가 있다. 오산천에서 내려온 물줄기는 덕산에서 지곡천과 만나서 청도천을 이루고 있다. 마을 뒤 들에도 경지 정리가 잘 되어 있어 산곡 내에서는 가장 넓은 들을 형성하고 있으며 경제적으로도 부자마을이다. 지촌마을에는 아직도 성황당이 있으며 남성황 여성황을 따로 모시고 있기도 하다.

 

[현황]

지난날 1970년대 까지만 하여도 각북행 버스의 마지막 종착지였던 덕산은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곳이었으나 지금은 대구를 잇는 각북 정대길이 연결됨으로 해서 많은 사람들의 드라이브 코스로 각광을 받고 있는 지역이며 전원주택지로 많은 사람들이 하나둘 들어오고 있는 현상이다.

2012년6월 현재를 기준으로 면적 6,239,457㎡이며 총가구수144가구에 남자140명 여자147명이 거주하고 있다.

마을에는 인근 주민들의 건강을 지키는 보건진료소가 있고 마을 앞개울건너에는 충적토를 이용해서 사과 과수원이 주를 이루고 있다. 덕산 초등학교 서편에는 덕산 저수지가 있으며 저수지 아래에는 저수지와 관련된 공덕비가 하나 서 있다.

마을 입구에는 효자비가 하나 있기도 하다.

덕산마을 한가운데에는 석불상이 많이 훼손된 채 길옆에 세워져 있는데 매년 정월 초에는 음식물을 훼손된 불상 앞에 놓고 비손을 하기도 한다.

덕산리에는 인근의 학생들에게 보금자리가 되는 덕산초등학교가 아직도 존재하고 있고 덕산초등학교 뒤 독뫼산 옆 개울가에는 천연기념물 제298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는 덕촌리 털왕버들이 있다.

 

[참고 문헌]

김재화, 『속오산지(續鰲山誌)』(1944)

『대구읍지』(대구광역시, 1767)

『청도군지』(청도군, 1768)

『밀주지』(조선숙종년. 밀양문화원 번역본, 1988)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조선총독부, 1912)



가창땜으로 접어들어 정대리-헐티재를 넘어 청도로 가는 길에 헐티재에서 약 5km정도 내려가다가 용천사를 지나 내리막길이

끝날 즈음 평지에 이르면 덕촌리라는 상가가 있는 마을이 나오고 마을앞에 있는 오래된 다리 건너 왼편에 덕산초등하교가 있고 오른편에 있는냇가에 천연기념물인 왕버들앞에 차를 세웠다.



덕촌리는 예전에 덕산이었는데  마을앞 하천 건너에 똥뫼산이 있어 이산을 독산이라 했는데  독산이 변하여 덕산이 되었다고 한다

청도 각북 덕산은 마을 앞으로 비슬산줄기에서 내려오는 오산천이 흐르고 마을 앞뜰은 넓은 들을 형성하고있고 마을뒤쪽 또한 넓은들을 형성하고 있어 경제적으로 부자마을이다


아주작은 독산은 비슬산에서 떠내려 왔다해서 현풍현에서 산세를 받으러왔다고 하는데 순박한 주민들이 아전들의 위압에 못이겨 몇해동안 산세를 주었는데 밀양박씨 문중에서 이내용을 알고는 똥뫼산(독산)은 우리에게 필요 없는 산이니 가져가라 했다고 한다
그뒤부터는 세를 주지 않았다고 한다

덕산초등학교 다닐때는 똥네산이라고도하고 학교뒤에 위치해 있어서 뒷동산이라고도 했다
아직도 정월 대보름이면 똥뫼산에서 천왕제를 지내고 있다




다리 건너 제방에 자리잡은 털왕버들의 터전은 너무 비좁고 다리목에 너무 가까워서 지나다니는 차량에게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는 아쉬움이 있었으나 사시사철 흘러내리는 개울과 논에서 충분한 수분을 공급받을 수 있어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밑둥에는 썩은 부위에 외과적 수술을 한 흔적이 안스럽다. 잘려나간 가지에는 가운데 구멍이 뻥 뚫려있어 나무의 줄기 가운데는 텅비고 변재부만 살아남은 것으로 보인다. 강한 바람을 언제까지 버텨낼지 걱정된다.

 

 박상진 교수의 설명에 의하면 "나무의 역사에 대하여는 특별히 알려진 것이 없고 마을의 정자나무로 쓰이다가 자연스럽게 보호된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 흔한 왕버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털왕버들(Salix glandulosa var. pilosa Nakai)은 왕버들과 같으나 새 가지와 잎자루에 잔털이 있는 것이 다르다.

2000.08.31 태풍 프라피룬(Prapiroon)으로 개울로 난 굵은 가지가 부러졌다.

석축을 쌓고 복토되어 나무에 나쁜 영향을 주므로 제거가 요망된다."

 


대구 인근 청도군 각북면 비슬산 개울가에는 늙은 털왕버들 한 그루가 살고 있다.

수령 200여 년을 헤아리는 이 고목은 둘레 4m, 높이 20여 m가 넘는 큰 덩치를 자랑한다.

버드나무라 지칭되는 포플러 종류는 지구상에 가장 흔한 식물이다.

은백양`은사시`수양버들`능수버들`사시나무`이태리포플러`미루나무`떡버들`왕버들`갯버들 등등은 주변에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나무들이다.

과문한 탓이겠지만 털왕버들은 청도 각북 말고는 다른 곳에서 보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이 나무는 일찌감치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털왕버들의 자랑거리는 한껏 푸르른 이파리의 무성함에 있을 것이나 내가 생각하기에 그 진정한 본질은 수피(樹皮)에 있는 게 아닌가 싶다.

털왕버들의 수피는 느티나무나 벽오동처럼 매끈하지 않고 짜놓은 마른걸레처럼 뒤틀어질 대로 뒤틀어져 있다. 때로는 그것이 극심한 고통을 견디는 사람의 구겨진 주름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무릇 모든 사물의 외형적 모습은 내부정황의 정확한 반영이 아닌가 싶다. 목질이 단단한 대추나무의 꽃이 작고 야무지게 가지에 달라붙는다면 속살 무른 살구나무의 꽃은 흐드러지게 피었다가 금세 좌르르 쏟아진다. 어디 식물만 그런가, 사춘기 아이들의 감당할 수 없는 뜨거운 에너지는 여드름이라는 생리현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그러므로 털왕버들의 그 지독한 뒤틀림은 나무의 고통스런 내면의 현현이 아니고 무얼까.

 

우리가 보는 나무는 실은 반쪽짜리다.

10여 년 전 태풍에 나무가 쫙, 두 쪽으로 갈라진 것이다.

200여 년 동안 장수를 누려왔던 나무가 어느 한날 스스로 짐작할 수 없었던 운명에 의해 반신불수의 비극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몸이 두 쪽으로 갈라졌으니 고통도 반으로 나눠진 걸까?) 집이 앞산 부근에 있어서 아침마다 산책 나온 편마비의 환자들을 자주 보게 된다.

한 걸음, 한 걸음 그야말로 혼신의 힘으로 걸음을 걷는 그들. 마치 털왕버들 수피처럼 뒤틀린 걸음이다.

그중에는 얼마 전까지도 인사 나누며 산을 오르내리던 이웃들도 섞여 있다.

다복한 삶이 어느 날 불어 닥친 태풍의 폭력에 의해 일시에 파탄이 나버린 것이다.

 

나의 삶이 늘 안온한 평화 가운데 있을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믿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무지일까, 자만일까. 불행과 고통은 누구에게나 반드시 찾아오게 마련이다. 다행히 잠시 평탄한 삶을 산다 하더라도 불운은 언제 우리의 목덜미를 낚아챌지 알 수 없다. 우리는 언제 꺼질지 모르는 살얼음 위에서 살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하면 그 위태로움이 우리 삶을 더 의미 있게 만드는 게 아닌가 싶다. 죽음이라는 종국적 결말이 있기 때문에 이 순간이 더욱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행과 고통이 있어서 삶의 행복과 희열을 맛볼 수 있는 것. 어떤 측면에서는 더 떨어질 곳 없이 바닥을 헤매고 있는 사람이 더 행복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정상에 있는 사람은 떨어지는 일밖에 남아있지 않고 지금 바닥에 머물고 있는 사람은 올라갈 일만 남아있기 때문이다. 주역의 가르침이 그것이다. 양과 음의 기운은 항시 교차되는 것. 영원불변한 고정된 자리란 이 세상에 없다.

 

각북의 털왕버들 주변에는 불탄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역시 버드나무 종류인데 털왕버들보다는 못하지만 제법 둥치가 굵은 고목이다.

무슨 연유로 불이 났는지 알 수 없지만 그 나무는 속이 시커멓게 타버려 컴컴하게 비어있다.

내장을 다 긁어낸 암환자처럼 속을 비운 채 수피로만 근근이 살아가고 있는 나무. 놀라운 것은 이 불탄 고목에도 해마다 봄이 되면 연둣빛 새싹이 돋아난다는 사실이다.

그 어떤 참담한 절망 속에서도 결코 굴하지 않고 새 생명을 피워내는 나무들. 그 숭고한 삶의 자세를, 음의 기운이 천지를 뒤덮고 있는 이 동짓달 한가운데서, 지금 이 순간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모든 이웃들과 함께 떠올려본다.


김채영 (시인·계명대 교수)(매일신문)



그런데 이 나무에는 아주 독특한 민속이 얽혀있습니다.

이 나무는 해가 뜨면 그림자가 이웃한 덕산초등학교 뒤쪽과 마을 쪽으로 집니다.

예전에 마을의 어느 훌륭한 지도자가 이 털왕버들의 나무 그림자를 따라 돌무더기를 설치했습니다.

아침에 저 떡버들(그때는 털왕버들인지도 몰랐으니 그냥 경상도에서 통칭하는 대로 떡버들이라고 부를 수 밖에요.)

그림자가 이쪽 돌무더기에 닿으면 모든 동민은 일하러 나가야 한다.”

마을의 자체적인 규칙을 딱 정했습니다.

한마디로 부지런히 일하자는 말이지요.

나무그림자가 여기 돌무더기에 오면 점심시간, 오후 늦게 여기에 오면 일을 마치는 시간, 이렇게 돌무더기로 시간을 표시 한 것입니다.

정말 유례가 드문 해시계이지요.

그러면 그 해시계 역할을 하는 돌무더기가 남아 있을까요?

아뿔사!! 그 중심으로 시침 역할을 하는 떡버들, 즉 털왕버들은 의구한데, 일하러 나가는 시간, 점심시간, 휴식시간, 일 마치는 시간, 등을 알리는 돌무더기는 그만 없어졌습니다.

초등학교 뒤쪽 담장을 새로 하면서 내용을 잘 모르는 사람이

웬 쓸데없는 돌무더기를 쌓아뒀어!!” 하면서 없애 버린 것입니다. 하기사 이미 시계가 보편화 되었으니 해시계가 필요 없을 때이었지요.

아마도 그 돌무더기의 흔적이 덕산초등학교 건물 뒤편에 남아있을 겁니다.

이것, 복원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 털왕버들은 식물학적 의미와 함께, 민속의 흔적, 교훈이 함께하는 천연기념물이 아닐까요?

 

이왕 털왕버들이 덕촌마을에 있으니 아주 전통있는 덕촌 마을의 재미있는 일화에 대해서도 조금 언급하겠습니다.

이 마을에서 정월 대보름에 동제를 지내는 서낭당, 성황당 의 나무는 원래 당산목이 늙어서 죽자 그 씨를 받아 그 자리에 지금도 기르며 모시고 있습니다.

털왕버들이 있는 곳에서 북쪽으로 뻗은 개울 곁에 있지요.

동제를 지내면서 제수를 산 내용이라든지 기타 여러 사항을 기록 한 것이 적어도 백년 이상의 내력이 보존되어 있을 겁니다.

동제를 지내면 당연히 풍물. 즉 농악이 있는법!!

이때 쓰던 아주 고풍스런 보물, 천왕기가 있었는데 아뿔사!! 옛 깃발이 낡았다고 버리고 근세에 새로 개비했습니다.

그러나 그 형식은 온전히 전승되어 오지요.

연조가 깊고 유서가 깊은 마을답게 농악, 즉 풍물이 대단히 유명 합니다. 이 풍물패는 덕산 오산 금천 지슬 마을이 함께 결성되어 청도의 제일가는 쇠(농악, 풍물을 이지방에서 별칭으로도 부르던 명칭)로 알려졌었습니다.

대구의 날뫼북춤과도 연관이 있는 것은 날뫼북춤의 김수배선생이 실은 이 지역 출신이기 때문인 것은 아시는 분이 많지요.

























덕산초등학교 뒤 독뫼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