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巨樹 保護樹 記念物/淸道 老巨樹

淸道 伊西面 大田里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초암 정만순 2018. 3. 6. 07:21




淸道 伊西面 大田里 은행나무






청도군 이서면 대전리 638



대전리

봉황의 기상이 서린 청도군 이서면 대전리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에 속한 법정리이다.

 

[개설]

이서면에 속한 법정리로 예전에는 한밭으로 불렀다. 위쪽에 형성된 마을은 상대전이라 하고 아래쪽에 있는 마을은 하대전이라 한다.

 

[명칭 유래]

한밭이라 부르고 대전(大田)이라 표기한다. 대전리는 골이 깊고 길며 들이 넓어서 한밭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 마을 동쪽 산 너머에 중천골이 있다. 이 중천골은 스님 천명이 살아서 중천골이라 하고 중천골에 중이 천명이 살았던 것은 고려시대에 스님들이 군인의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라는 전설이 있다.





 대전리(大田里)란 이름은 우리말 '한밭'을 한자로 표기한 것인데 한밭이란 글자 그대로 골이 깊고 길며 들이 넓다는 뜻이다. 


홍두깨산의 동쪽 산자락에 기대어 마을이 형성되어 있으며 칠엽리에서 동서로 뻗어온 산등성이가 서쪽으로는 연화봉(蓮花峰), 동쪽으로는 필봉(筆峰)을 이루어 ··북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봉황의 기상이 서린 곳이다. 


   크게 두 마을로 나누는데 북쪽은 상대전(웃한밭)남쪽은 하대전(아래한밭)이라 부른다. 

또 '강당'과 '오수정'이란 작은 부락도 있다.


  강당(講堂)은 조선시대에 봉동정사(鳳洞精舍)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데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 대전초등학교가 이곳에 있었으나 지금은 학생수의 감소로 폐교되었다. 오수정(五樹)은  상대전 북쪽에 위치하는데 창녕에서 이거해온 밀성 박씨가 거주하면서 5그루의 괴화수(홰나무)를 심은 것에서 유래했다. 또 중천골이 있는데 신라가 가야와 대치하고 있을 때 승려군 천명이 상주하였다고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지금은 그곳에 골프장이 들어섰다.




  대전리는 의흥 예씨 시조인 예낙전(芮樂全)의 11세손이자 예승석의 현손인 어모 장군(禦侮將軍예극양이 대전리에 정착하여 산 이후로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예승석은 조선 초기 인물로 평안도·강원도·전라도 관찰사한성 우윤대사간 등을 지낸 인물이다문장이 뛰어나 정인지신숙주와 함께 고려사(高麗史)세종실록(世宗實錄)문종실록(文宗實錄)』 등을 편찬하였다.

  예극양은 무과에 급제하여 정3품 어모 장군을 지냈다

 

[형성 및 변천]

옛날부터 대전이라고 표기해 왔으며 명칭이 바뀐 적이 없는 마을이다. 대전국민학교(폐교)가 있었던 이 마을에는 봉동정사(鳳洞精舍)가 있었으나 지금은 그 터만 남아있다. 봉동정사는 어봉산(御封山 : 御鳳山)아래 있었으며 의흥인 예예충(芮禮忠) 선생과 예몽진(芮夢辰) 선생의 장구지소였다. 예몽진 선생은 임진왜란 때 청도 의병장 박경신 선생과 같이 의병을 일으켜 청도을 왜적의 소굴에서 벗어나게 한 공이 있는 분이다. 윗 한밭과 아래 한밭은 의흥 예씨들의 집성촌이며 상대전에서 칠엽으로 가는 길 왼쪽 마을 위쪽에는 밀양에서 이곳으로 이사를 온 밀양인 박덕범 선생이 정자를 지어 오수정이라 하고 주민들에게 글을 가르치던 서당이 있다. 그레이스 골프장을 만들 때 이장한 묘에서 500년된 미라(미이라)가 발견되었으나 후손들이 조상을 욕보이는 일이라 하여 바로 각남면 녹명리 죽바위 선산으로 이장을 하였다.

 

[자연 환경]

대전리는 골이 깊고 들이 넓어 큰 밭으로 불렀다고 전해지며 홍두깨산의 한 자락 아래 아래위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으며 북쪽으로는 칠엽리가 약 2㎞ 떨어져 있고 남쪽으로는 약 1㎞에 가금리가 있다. 마을 서쪽으로는 명대리가 있고 동쪽은 그레이스 골프장이 만들어져 영업하고 있다. 마을 앞에 있는 경작지는 경지 정리를 마쳤으나 마을 위와 마을 인근에는 옛날 모습 그대로 경작을 하고 있다.

 

[현황]

아래위 마을에 의흥 예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대전리는 2012년 6월 현재 면적3,805,724㎡이며 총 가구수 111가구에 남자 93명, 여자 111명이 살고 있으며 초등학교는 폐교가 되었으나 마을에서 관리를 하고 있고 효자비가 있다.

대전리에는 예예충(芮禮忠) 선생을 모시는 봉강재와 박덕범(朴德範) 선생을 모시는 첨모재(瞻慕齋) 예시학(芮時鶴) 선생을 모시는 일간재(一幹齋)가 있다.

마을은 동으로는 산을 경계로 각계리가 있고 서쪽으로는 면을 달리한 명대리가 있으며 북쪽은 깊은 골을 따라 칠엽리가 있다 남으로는 가금리와 접해 있으며 풍각천이 앞을 막고 있다. 접근하는 길은 칠엽과 이어진 면도로가 유일한 통로이고 옛날에는 산을 넘어가는 길이 동서로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농사일로 다니는 것이 유일한 통로이다.

 

[참고 문헌]

김재화, 『속오산지(續鰲山誌)』(1944)

『청도군지』(청도군, 1991)

『마을지명유래지』(청도문화원, 1996)

『향토사학회보』(답사보고서, 1998)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조선총독부, 1912)

『통계연보』(청도군, 2012)


대전리 은행나무

 

대전리 은행나무는 천연기념물 제301호로 지정해 보호하노거수이다. 

수령은 400년 정도 된 것으로 보이지만, 우리나라 은행나무 중 가장 오래된 1,300년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은행나무과에 딸린 낙엽교목으로 높이는 29m, 가슴 높이 둘레는 8.5m, 뿌리 근처 둘레가 10.5m의 수나무이다.

가지의 길이는 동쪽 14m, 서쪽 13.2m, 남쪽 11m, 북쪽 13m이다.

아직도 수세가 왕성하고, 나무둥치가 용트림하듯 감겨 올라간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 은행나무에는 몇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1)신라 때 지나가던 한 도사가 우물을 보고 물을 마시려다 빠져 죽은 후 우물에서 은행나무가 자라났다는 것

2)이 마을을 지나던 한 부인이 우물물을 마시려다 빠져 죽었는데, 그 여인이 주머니에 갖고 다니던 은행 알이 싹터 나무가 자라는 동안 우물은 없어지고 은행나무만 살아남았다는 것

3)신라 말, 지방 행정 구역 변경 때 경계수(境界樹)로 심은 것이라는 등이다.


 이 은행나무는 수나무이지만 때로는 은행 열매가 달릴 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