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巨樹 保護樹 記念物/淸道 老巨樹

靑道 淸道邑 磧川寺 銀杏나무 (천연기념물)

초암 정만순 2018. 2. 15. 09:56


靑道 淸道邑 磧川寺 銀杏나무



적천사 전경.

△천년고찰 적천사


청도군 청도읍 원리 화악산(華岳山)에 있는 적천사(碩川寺)는 신라 문무왕4년(664) 원효대사가 토굴로 창건했으며, 신라 흥덕왕3년(828) 흥덕왕의 셋째아들인 심지왕사(心地王師)가 중창했다.


고려 명종5년(1175년) 보조국사가 오백대중이 상주하는 대가람으로 중건해 동북쪽에 영산전을 세우고 청련암, 백련암, 자련암, 옥련암, 은적암, 목탁암, 운주암 등의 암자를 세웠으나 임란 때 병화로 소실되고 헌종5년(1664)에 사원은 다시 중건됐다.


그 후 숙종 20년(1694)에 태허선사가 중수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영산전에 오백성중(아리한)을 모시는 한편 오백대중(나한)을 상주케 하고 불교 입문자를 참선 수행케 함으로써 많은 고승대덕이 배출됐다.


보조국사가 적천사를 중창할 때 도적 떼들이 이 곳에 모여 있어 국사가 말하기를 "이 곳에 절을 중창하려 하니 너희들은 이 곳에서 물러가라"했으나 무리들이 물러가지 않고, 오히려 대항하려 하자 국사는 남산에 올라가 신통력으로 가랑잎에 호(虎)자를 써서 때마침 불어오는 북풍에 날렸더니 큰 호랑이가 돼 도적들을 몰아내어 이 사원을 중수 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곳의 오백나한은 임란 때 화재 등을 피해 운문사로 옮겨갔다고 전해지며, 1981년 5월 백일기도 중 괘불(掛佛)보관함에서 사리 7과와 팔양경, 연화경77판, 청동 떡시루 1점이 발견됐다.


같은해 6월 20일 경북도유형문화재 제153호인 사천왕의좌상(四天王倚坐像) 보호각 보수 중 사천왕의좌상에서 사리 3과 경전 80여판과 의류(장삼, 두루마기) 23점 및 다라니경 등 복장기가 다량 발견됐는데 복장기에는 700여명의 승려, 신도이름과 조선 숙종16년(1690년)에 조성했다는 문헌이 있었으나 2004년 동지날 화재로 없어졌다.


보조국사가 친히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으며, 대웅전과 관음괘불, 사천왕의좌상 4구 등은 문화재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장대한 규모의 적천사 괘불은 1695년에, 괘불지주석은 1701년에 각각 만들어졌다. 높이 12.47m 너비 5.3m 의 이 불화는 네모진 얼굴 비현실적으로 묘사된 신체로 묵중하고 중후한 느낌이 들게 한다.


재료는 삼베를 바탕으로 한지를 여러 겹 붙이는 배접을 했고, 배접을 할 때 해충의 피해 및 부식을 막기 위해 녹두풀에 유황과 백반을 섞어 사용했다.


이 곳은 '숲 넘어 산에서 종소리 멀리 들려오니 푸른 봉우리에 절간이 있겠구나. 나무가 빽빽해 문 비추는 달빛 가리고, 골짜기가 비어서 문 두드리는 지팡이 소리에 대답하네. 물은 흰 깁(비단)을 깔아 갖춘 돌에 흐르고, 무지개는 푸른 깁(비단)을 끌어다 고송에 걸었네. 늙은이 며칠 머물음을 괴이타 마라. 그 옛날 보조(普照國師)가 유적을 보였네'라는 인각대사의 시가 적천사의 6가지 내력을 잘 말해주고 있다.




△800년 된 은행나무 이야기


적천사를 고려 명종5년(1175)에 지눌 보조국사가 오백대중이 상주하는 대가람으로 중건할 때 절 부근 숲속에는 많은 도적 떼들이 살고 있었다.


보조국사가 가랑잎에 범호(虎)자를 써서 신통력으로 호랑이를 만들어 부근 산에 풀어놓으니 도적들이 호랑이를 보고 겁을 내어 모두 도망을 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은행나무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 할 만큼 오래된 나무로 우리나라,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유교와 불교가 전해질 때 같이 들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적천사 은행나무는 나이가 800년 정도로 추정된다. 높이 25.5m, 둘레 8.7m의 크기로 3m 위치까지 한 줄기이며 그 위부터는 3개의 가지로 나뉘어졌다. 맹아 및 유주가 유난히 발달했는데, 맹아는 새로 난 싹을 말하며, 유주는 가지 사이에 혹 또는 짧고 뭉뚝한 방망이처럼 생긴 가지를 말한다. 유주는 일종의 뿌리가 기형적으로 변한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일본에서는 흔히 볼 수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모습이다.


적천사 은행나무는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유주발달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으며, 오랜 세월동안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가운데 살아온 나무로 생물학적·민속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당시 보조국사가 짚고 다니던 은행나무 지팡이를 심은 것이 자라서 이처럼 거목이 되었다고 전해져온다. 이 은행나무는 3m까지 외줄기이며 그 위에서 3개의 가지가 나 있다.


지표부위 원줄기에 접해 맹아가 서편으로 1개 남 동편으로 1개 북편으로 1개 등 모두 3개가 수직으로 나있다.


은행나무는 현재 지구상에 살아있는 가장 오래된 식물중 하나이다. 20∼30년 생까지는 가지가 잘 발달하고 수관의 모양이 다듬어지나 오래된 나무는 줄기가 갈라지며 불규칙한 모습으로 된다. 암 수 딴 그루이고 오래된 나무는 대개 암나무이다.


잎은 부채모양의 형태이며, 장지(長枝)에서는 서로 떨어지지만 단지(短枝)에서는 무더기로 모여난다.


암꽃은 6∼7개 모여나고 그 끝에 2개의 배주(胚珠)가 달리고 그 안에 난세포가 있어 꽃은 5월경에 핀다. 화분이 바람을 타고 배주의 주공에 들어가 몇 달 동안 머물다가 가을이 돼 종자가 성숙하기 직전에 정충을 내어 난세포와 합쳐서 수정을 하게 된다.


정충은 편모를 가져서 스스로 몸을 이동시킬 수 있으며 쌍으로 달린 배주 가운데 하나는 위축하고 다른 하나는 성숙하여 표면에는 흰 가루 모양의 납 물질이 덮인다. 외종피라 하는 바깥육질부분은 고약한 냄새가 나고 안에는 은백색의 단단한 중과피에 2줄 또는 3줄의 능선이 발달해있다.


적천사 은행나무 앞에는 강희 33년(1694년) 태허도인이 지은 보조국사가 은행나무를 심은 것을 기념하는 비석인 '축보조국사수식은행수게(築普照國師手植銀杏樹偈)'가 서 있다.



靑道 磧川寺 銀杏나무는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 원리 981, 적천사에 있는 은행나무이다.

1998년 12월 23일 대한민국의 천연기념물 제402호로 지정되었다.


은행나무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 할 만큼 오래된 나무로 우리나라,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유교와 불교가 전해질 때 같이 들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가을 단풍이 매우 아름답고 병충해가 없으며 넓고 짙은 그늘을 제공한다는 장점이 있어 정자나무 또는 가로수로도 많이 심는다.


청도 적천사 은행나무는 나이가 800년 정도로 추정된다.

높이 25.5m, 둘레 8.7m의 크기로 3m 위치까지 한 줄기이며 그 위부터는 3개의 가지로 나뉘어졌다.

맹아 및 유주가 유난히 발달했는데, 맹아는 새로 난 싹을 말하며, 유주는 가지 사이에 혹 또는 짧고 뭉뚝한 방망이처럼 생긴 가지를 말한다.

유주는 일종의 뿌리가 기형적으로 변한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일본에서는 흔히 볼 수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모습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보조국사가 고려 명종 5년(1175)에 적천사를 다시 지은 후 짚고 다니던 은행나무 지팡이를 심은 것이 자라서 이처럼 큰 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청도 적천사 은행나무는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유주발달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으며, 오랜 세월동안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가운데 살아온 나무로 생물학적·민속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개설]
은행나무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 할 만큼 오래된 나무로 우리나라,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유교와 불교가 전해질 때 같이 들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을 단풍이 매우 아름답고, 병충해가 없으며 넓고 짙은 그늘을 제공한다는 장점이 있어 정자나무 또는 가로수로도 많이 심는다. 다른 나무에 비해 수명이 매우 길며, 재래종의 경우 수령 25∼30년부터 결실이 되는 장기수로서 당대에 심으면 손자 대에 열매를 본다고 해서 공손수(公孫樹)로도 불려 왔다.

청도 적천사 은행나무는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노거수로서 유주(乳柱) 발달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을 받으며 살아온 나무로 생물학적·민속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 제402호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형태]
청도읍 원리 적천사 일주문 앞의 거대한 은행나무 두 그루 가운데 오른쪽에 있는 큰 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청도 적천사 은행나무이다. 수령은 약 800∼1,000년으로 추정되고 있다. 나무의 높이는 28m, 가슴 높이 둘레는 11m로 열매가 달리는 암나무이다. 수관(樹冠)의 폭은 동서로 28.8m, 남북으로 31.3m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그 예가 드물게 노거수로서 수형이 아름답고 움과 유주의 발달이 특이한 나무이다. 3m까지 외줄기이며 그 위에 3개의 가지가 나 있다. 지표 부분의 원줄기에 접해 서쪽으로 1개, 남동쪽으로 1개, 북쪽으로 1개 등 모두 3개의 움이 수직으로 나 있다. 또한 작은 움이 추가로 10개 정도 돋아나고 있다.

뿌리는 땅 위로 노출된 부분이 많고, 뿌리와 뿌리 사이에 혹 또는 짧고 뭉뚝한 방망이처럼 생긴 유주가 여러 가지 형상으로 유난히 발달해 있다. 뿌리가 많이 돌출되어 있고, 토양도 전반적으로 습하고 영양분이 부족해 나무의 생육 상태가 좋지 못하므로 육성을 위한 관리가 필요하다.


[역사/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적천사는 신라 시대 문무왕 때 원효 대사가 창건하고, 이후 보조 국사 지눌이 중창했다고 한다. 적천사 은행나무는 보조 국사가 1175년(명종 5년)에 적천사를 다시 지은 후 짚고 다니던 은행나무 지팡이를 심은 것이 자라서 이처럼 거목이 되었다고 전해 온다.

또한 적천사 은행나무는 ‘남성의 상징, 유주가 달린 은행나무’로 알려져 있다. 은행나무의 줄기에는 커다란 유주가 하나 달려 있는데, 남성의 생식기 모양으로 위쪽에는 고환처럼 보이는 부분까지 있다. 유주는 공기 중에 발달하는 뿌리의 일종으로 나뭇가지에서 뿌리를 향해 자라며,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볼 수 없지만 습기가 많은 일본에서는 자주 관찰된다. 일본 여인들은 유주에 치성을 드리면 아기를 얻거나 젖이 잘 나온다고 믿었고, 한국 여인들은 유주를 남성의 상징으로 여겨 잘라서 국을 끓여 먹으면 사내아이를 잉태한다고 믿었다.


[현황]
청도 IC에서 남쪽인 밀양 방향으로 새마을길을 따라 모강 교차로, 원정 교차로, 월곡 삼거리, 지당말까지 약 6㎞ 정도 간다. 거기서 서쪽인 원리 방향으로 원동길을 따라 약 5.3㎞ 정도 가면 적천사가 있다. 적천사 일주문 앞 두 그루 은행나무 가운데 오른쪽의 은행나무가 1998년 12월 23일 천연기념물 제402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두 그루의 은행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전면에 1∼1.7m의 석축을 쌓아 바닥을 평탄하게 하는 작업을 했고, 그 앞에 천연기념물을 소개하는 안내판과 보호수를 알리는 표지석이 설치되어 있다. 나무줄기에는 오색의 줄이 쳐져 있고, 제단과 모금함이 설치되어 신목(神木)의 역할을 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은행나무는 소철, 메타세쿼이아와 함께 살아 있는 화석이다. 은행나무는 은행나뭇과에 하나뿐인 나무이다.

암수 딴 그루인 은행나무는 갈잎 큰키 나무다.

은행나무의 고향은 중국 저장성에 위치한 천목산으로 알려져 있다.

은행(銀杏)이라는 이름은 중국 북송 때 구양수와 매요신의 시에 처음 등장한다.

따라서 은행이란 이름을 사용한 것은 지금부터 1000년 전의 일이다.

은행은 ‘은빛 살구’를 의미하는 한자이다.

이 한자는 이 나무의 열매가 살구나무 열매를 닮아서 붙인 것이다.

은행은 송나라 때 지방 정부가 중앙 정부에 제공하는 조공품으로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이 나무 이름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압각수(鴨脚樹)’이다.

잎이 오리발과 닮아서 붙인 이름이다. 또 다른 이름 중 잘 알려진 것은 ‘공손수(公孫樹)’이다.

이 이름은 열매가 손자 대에 열린다는 뜻이다.

 공손수처럼 열매를 강조한 또 다른 이름은 백과(白果)이다.

이는 열매의 껍질을 벗기면 흰색이 드러나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식물도감에 등장하는 킹쿄는 린네가 은행의 일본어 발음 긴난(Ginnan)을 잘못 읽고 붙인 이름이다.

한국·일본의 고산·고원지대를 제외한 온대에 분포한다.

높이는 5~10m이나 50m에 달하는 것도 있다.

나무껍질은 회색으로 두껍고 코르크질이며 균열이 생긴다. 가지는 긴 가지와 짧은 가지의 2종류가 있다. 잎은 대부분의 겉씨식물[裸子植物]이 침엽인 것과는 달리 은행나무의 잎은 부채꼴이며 중앙에서 2개로 갈라지지만 갈라지지 않는 것과 2개 이상 갈라지는 것 등이 있다. 잎맥은 2개씩 갈라진다. 긴 가지에 달리는 잎은 뭉쳐나고 짧은 가지에서는 총생한다.

은행나무는 암수의 구분이 있다. 암나무는 수나무에서 날아온 꽃가루가 있어야만 열매를 맺는다. 꽃은 4월에 잎과 함께 피고 2가화이며 수꽃은 미상꽃차례로 달리고 연한 황록색이며 꽃잎이 없고 2~6개의 수술이 있다. 암꽃은 녹색이고 끝에 2개의 밑씨가 있으며 그 중 1개가 종자로 발육한다. 화분실(花粉室)에 들어간 꽃가루는 발육하여 가을에 열매가 성숙하기 전 정자(精子)를 생산하여 장란기(藏卵器)에 들어가서 수정한다.

열매는 핵과(核果)로 공 모양같이 생기고 10월에 황색으로 익는다. 중과피는 달걀 모양의 원형이며 2∼3개의 능(稜)이 있고 백색이다. 열매가 살구 비슷하게 생겼다 하여 살구 행(杏)자와 중과피가 희다 하여 은빛의 은(銀)자를 합하여 은행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이 종자를 백자(白子)라고 한다. 바깥껍질에서는 악취가 나고 피부에 닿으면 염증을 일으키는데, 이는 열매의 껍질에 은행산(ginkgoic acid)과 점액질의 빌로볼(bilobol) 성분이 있기 때문이다.

은행나무는 전통적으로 나무에 열매가 열리는지의 여부로 암수를 감별해 왔는데, 은행나무는 30년 이상 일정 기간 이상 자라야 열매를 맺을 수 있어 어린 묘목의 암수 감별이 어려웠다. 까다로운 암수 감별 탓에 가로수로 암나무를 심어 악취피해가 일어나는 경우가 많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러나 2011년 6월 산림과학원이 수나무에만 있는 유전자인 SCAR-GBM을 발견했고, 1년 이하의 묘목의 암수 감별이 가능해졌다. 따라서 농가에는 은행 채집이 가능한 암나무를, 거리에는 악취가 풍기지 않는 수나무를 심을 수 있게 되었다.

은행나무가 한국에 언제 들어왔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단지 유교와 불교 관련 유적지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유교와 불교의 수입 시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일본의 경우에는 대략 송나라 때 들어간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일본의 은행나무는 18세기 유럽으로 건너갔다. 영국 큐 왕립식물원에는 1762년에 심은 은행나무가 아직 자라고 있다. 유럽에 건너간 은행나무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중국 각지에는 수천 년 동안 살고 있는 은행나무가 많다. 특히 산둥 성 쥐셴현 정림사에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가 살고 있다. 그래서 이곳의 은행나무를 ‘비조(鼻祖)’라 부른다. 기원전 715년 노나라와 거나라 양국의 제후들이 이 나무 아래서 회의를 했다. 이 나무 주위에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새긴 비석이 남아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경기도 양평군에 위치한 용문사 앞의 은행나무가 가장 나이가 많다. 1,100살이 넘는다.

한국의 서원과 향교에는 거의 예외 없이 은행나무가 살고 있다. 서원에 은행나무를 심은 것은 공자가 살구나무 아래서 제자를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의 서원에 살구나무 대신 은행나무를 심은 이유는 알 수 없다. 한 가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살구나무의 ‘행’과 은행의 ‘행’이 같아서 오래 살지 않는 살구나무보다 천년 이상 살 수 있는 나무를 택했을 가능성이 크다. 옛날에는 나무를 이해할 때 분류학적인 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사정에 따라 간혹 원산지 나무와 다른 이름을 사용했다. 중국의 측백나무를 잣나무, 회화나무를 느티나무로 인식한 것처럼 살구나무를 은행나무로 대체한 것도 일종의 문화적 격의(格義)로 볼 수 있다. 격의는 번역과 같은 의미이고, 한 나라의 문화를 수입할 경우 수입국의 상황에 따라 뜻을 맞추는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賜額)서원인 경상북도 영주의 소수서원 앞에도 500살 먹은 은행나무가 두 그루 살고 있다. 지금의 사립대학에 해당하는 서원은 유교(성리학)를 가르치는 곳이다. 은행나무는 곧 공자가 살구나무 아래서 제자를 가르친 정신을 상징하는 나무이다. 성균관은 조선시대 국립대학에 해당한다. 국가에서 인재를 양성하는 곳이 바로 성균관이다. 이곳에도 은행나무가 두 그루 살고 있고, 한 그루는 천연기념물이다. 조선시대에 읍 단위마다 하나씩 있던 향교(鄕校)는 지방에서 유학자들을 양성하던 곳이다. 현재 남아 있는 전국의 향교 앞에도 거의 예외 없이 은행나무가 살고 있다. 따라서 서원, 성균관, 향교, 유학자들의 거주 공간 등지의 은행나무는 단순히 한 그루의 나무가 아니라 한국의 주요한 정신문화를 간직하고 있는 귀중한 문화재이다.


청도 적천사 은행나무는 1985년 10월 15일 경상북도기념물 제58호로 지정·보호되어오다가 1998년 12월 23일 천연기념물 제402호로 지정되었다.

청도 적천사 은행나무는 나이가 800년 정도로 추정된다. 높이 25.5m, 둘레 8.7m의 크기로 3m 위치까지 한 줄기이며 그 위부터는 3개의 가지로 나뉘어졌다. 맹아 및 유주가 유난히 발달했는데, 맹아는 새로 난 싹을 말하며, 유주는 가지 사이에 혹 또는 짧고 뭉뚝한 방망이처럼 생긴 가지를 말한다. 유주는 일종의 뿌리가 기형적으로 변한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일본에서는 흔히 볼 수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모습이다.

이 나무는 청도역에서 남쪽으로 약 6㎞쯤 떨어진 화학산 기슭의 적천사(磧川寺) 입구에 두 그루의 은행나무가 있는데, 그 지반은 거의 평지이다.

나무의 높이가 높고 줄기가 굵으며, 수관폭이 넓은 거목이다.

전체적으로 외적인 손상이 없고 영향상태가 좋으며, 수형이 매우 아름답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보조국사 지눌이 고려 명종 5년(1175)에 적천사를 다시 지은 후 짚고 다니던 은행나무 지팡이를 심은 것이 자라서 이처럼 큰 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청도 적천사 은행나무는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유주발달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으며, 오랜 세월동안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가운데 살아온 나무로 생물학적·민속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보물 제1432호) 적천사 괘불탱 및 지주



경상북도 청도 적천사에 소장된 조선 후기의 괘불도.


개설

 

보물 제1432호. 머리에 보관을 쓰고 연꽃가지를 들고 서 있는 보살 형태의 독존도 형식의 괘불도로서 1695년에 상린(尙鱗), 해웅(海雄), 지영(智英), 성종(聖宗), 상명(尙明) 등이 조성하였다.


내용

세로 12.55m, 가로 5.27m의 거대한 화면에 독존의 불입상만을 표현한 단순한 구도를 보여준다. 본존은 커다란 보관을 쓰고 두 손으로 연꽃가지를 잡은 채 두 발을 약간 벌리고 정면을 향해 서 있다. 원형 두광을 거의 꽉 채울 정도로 큰 보관에는 중앙에 5구의 화불(化佛)이 그려져 있는데, 중앙에 지권인(智拳印)의 손모양을 한 비로자나화불 주위로 4구의 화불을 배치하였다. 보관의 앞쪽 좌우에는 금박으로 봉황장식을 그렸으며, 가장자리에도 화염보주를 장식하여 화려하면서도 다소 무겁게 느껴진다. 이처럼 5구의 화불이 묘사된 보관을 쓰고 연꽃줄기를 든 본존의 모습은 산청 율곡사 괘불도(1684년) 및 포항 보경사 괘불도(1708년)와 유사하다. 본존은 둥그스럼한 얼굴에 치켜뜬 듯한 눈과 작은 입, 긴 코가 적당히 균형을 이루고 있다. 신체는 어깨가 넓고 건장하여 묵중하면서도 중후한 느낌을 주는데, 양어깨에 걸쳐 입은 붉은 대의에는 내의 끝단과 소매 자락, 내의 윗부분 등에 걸쳐 매우 화려하면서도 장식적인 여러 가지 형태의 꽃무늬가 그려져 있다. 어깨 위로는 귓바퀴를 한번 감아 흘러내린 보발이 길게 드리워져 있으며, 넓은 가슴에는 큼직한 연꽃을 매단 목걸이를 착용하였다. 두 손으로 비스듬히 긴 연꽃가지를 들고 있는데, 연꽃가지는 활짝 핀 연꽃과 연봉우리 등이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색채는 주홍과 녹색을 주조로 하여 화사한 연분홍색과 옅은 청색, 양록 계통의 연녹색을 사용함으로써 갸름한 형태의 얼굴과 함께 화면 전반에 걸쳐 밝고 명랑한 느낌을 준다. 화기(畵記)에 의하면 이 괘불도는 물과 육지에서 헤매는 외로운 영혼과 아귀(餓鬼)를 위로하기 위하여 불법을 강설하고 음식을 베푸는 불교의식인 수륙재(水陸齋)를 위해 조성되었다고 한다.

한편 대웅전 앞에는 이 괘불도를 걸기 위한 석조괘불대지주가 한쌍 서 있는데, 지주석(支柱石)에 강희 40년(1701)에 거사 경순(敬順) 등이 참여하여 만들었음을 알려주는 명문이 있어 17세기 말 괘불 및 괘불을 거는 지주의 모습을 알려 주는 좋은 자료가 된다.


의의와 평가

이 괘불도는 보관을 쓰고 연꽃을 들고 있는 본존을 단독으로 그린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적천사 괘불도처럼 보관을 쓰고 꽃을 든 존상을 표현한 작품이 많이 조성되었는데, 이 작품은 그중에서도 산청 율곡사 괘불도(1684년) 및 포항 보경사 괘불도(1708년)와 매우 유사하다. 세 작품 모두 화기에 존상의 명칭이 적혀있지 않아 본존의 명칭을 알기 어렵지만, 연꽃을 들고 있는 존상은 영산회상(靈山會上)의 석가가 연꽃을 대중에게 들어보였을 때 가섭존자(迦葉尊者)만이 그 의미를 알고 미소를 지었다는 선종의 염화시중(拈花示衆), 즉 선종에서 교법을 전하는 염화시중의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서 본존은 석가모니로 추정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인용]


2017.02.19 촬영

 * 괘불도는 전시하지 않아 문화재청 자료를 인용하였고 대웅전 앞의 석조괘불대지주만 직접 촬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