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 상리에 있는 수령 200년의 돌배나무.
돌배나무는 원산지가 한국이고, 우리나라·일본·중국 등에 분포하며 주로 산에서 서식한다.
청도 상리 돌배나무는 다른 지역에 분포하는 돌배나무에 비해 열매가 크고 신맛이 강한 것이 특징이어서 돌배나무 변종
연구에 귀중한 학술적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한편 상리 돌배나무는 청도 김씨 문중에서 잘 관리해 왔다.
또한 마을 주민들은 건축 자재가 부족하던 시기에도 돌배나무를 베어 쓰지 않고 귀중하게 잘 보호해 왔다.
이런 점을 기려 경상북도 기념물 제119호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청도 상리 돌배나무의 수령은 약 200년이다.
나무의 높이는 18m, 가슴 높이 둘레는 3.7m에 이른다. 수령으로 보나 크기로 보나 경상북도 내에서는 보기 드문 돌배나무
노거수이다.
분홍 복사꽃이 피는 4월에 때맞춰 돌배나무에 청아한 백색 꽃이 피면 함박눈을 뒤집어 쓴 분위기를 자아내 환상적이다.
높은 곳에 위치한 돌배나무 아래로는 평화로운 상리 마을이 보이고, 뒤로 높은 화악산에 붉은 진달래가 만발해 무릉도원과
같은 경치를 보여 준다.
또한 굵은 줄기가 하늘 높이 뻗어 굳건한 기상을 뽐내며 가지는 사방으로 조화를 이루어 수형(樹形)이 아름답다.
경상북도 최남단에 위치한 화악산(華岳山) 아래 한재골 상리는 대현천 맑은 물과 밤티재에서 남산으로 이어지는 빼어난
산세로 유명하다.
이곳에 청도 김씨(淸道金氏) 시조인 김지대(金之岱)[1190∼1266]의 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세운 염수재(念修齋)가 있다.
염수재 앞뜰에 청도 상리 돌배나무가 있다.
한편 돌배나무의 목재는 건축 재료로 쓰이며, 열매는 식용 및 약용으로 사용되고, 야생 동물의 주요한 먹이로 쓰이던 나무이다. 돌배나무는 각종 기자재로 사용할 만큼 재질이 단단해 자작나무, 벚나무와 함께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만들 때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돌배 열매가 익으면 외지에서 약재로 쓰이는 열매를 구하러 오기도 한다.
청도 IC에서 밀양 방향으로 새마을 길을 따라 청도 농공 단지 신기역을 지나 약 11㎞ 정도 가면 유천 삼거리가 나온다.
서쪽 한재 방향으로 지방도 902호선을 따라 약 4.5㎞를 가면 농장이 있고, 약 300m 정도 더 직진하면 염수재 앞에 청도 상리
돌배나무가 있다.
1997년 3월 17일 경상북도 기념물 제119호로 지정해 관리되고 있다.
나무 아래에는 경상북도 기념물을 소개하는 안내판이 있고, 보호 구역을 알리는 울타리가 둘러져 있다. (디지털 청도문화대전/ 임원현)
우리나라 봄산에는 흰 꽃나무들이 많다.
산행을 하다가 산비탈에 햇솜처럼 청초한 흰 꽃을 피우고 선 나무를 보면 절로 발길이 멈추어진다.
돌배나무도 그렇게 산비탈이나 고갯마루에 눈에 띄지 않게 홀로 서 있다가 봄이면 있는 힘을 다해 작은 가지 끝까지 꽃을 피운다.
가을에 또 산행을 하던 사람들은 돌배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나무를 만나기도 한다.
탱자 만하게 작은 열매지만 과일이라고 손을 내밀어 한 입 베어 먹어본다. 달고 사근사근한 개량종 배에 길든 입맛은 딱딱하고 시고 텁텁한 돌배 맛에 실망하여 먹을 게 없다며 두어 번 베어 먹다 던져버리기도 한다.
재질 단단해 팔만대장경 목판 사용
돌배 약효 소문 술 담그는데도 인기
우리 토종 배나무인 돌배나무는 이렇게 산 속에서 많이 자라고 마을 근처에서도 볼 수 있다.
과일나무로 노거수가 많지 않은데 경북 청도군 청도읍 상리에 오래된 돌배나무가 있다.
옛부터 많은 시를 남기게 한 배꽃이 부풀어 오르는 사월을 기다려 찾아갔다.
청도에서 화악산 자락을 따라 풍각으로 넘어가는 산길이 한재골이다.
이곳은 청정 산골미나리로 이름난 한재미나리를 재배하는 비닐하우스들이 줄지어 있다.
상리는 한재골에서도 윗마을이다.
마을 입구에서 작은 개울을 지나 좁은 산길을 500m쯤 올라가면 높은 언덕 위에 서있는 돌배나무가 보인다.
감나무 과수원 사이로 먼 빛에 보아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돌배나무는 크고 당당하다.
이 돌배나무는 청도 김씨의 시조인 영헌공 김지대 공의 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세운 염수당 앞에 서있다.
돌배나무라는 이름은 정답기도 하지만 어쩐지 품격이 떨어지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우리말에 '돌~'라든지 '개~'라는 접두사가 붙은 '돌복숭아'나 '개옻나무'등등은 '돌쇠'나 '개똥이'같은 대접받지 못하던 아랫사람들의 고달픈 이미지와 연결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름을 가진 나무들은 번듯해 보이는 개량종 보다 강인한 우리 토종 나무들이다.
요즘 같이 과일들이 아기 머리통만 하게 큰 것들이 나오는데 비해 이런 토종나무의 열매들은 아기 주먹만 하니 하찮게 여겨지기도 하겠다.
그러나 무엇이든 야생에 가까운 것이 제 고유의 성질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법이다.
배 과수원에서도 뿌리 깊은 돌배나무에 접붙여 큰 배들을 수확한다. 그러니까 돌배나무는 근본이 되는 나무다.
더구나 돌배나무는 목재로서 재질이 단단하여 뒤틀림이 없어 목판에 글을 새기기에 좋았다.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새긴 나무로 산벚나무 다음으로 많은 나무가 돌배나무였다고 한다.
염수당 앞에 서서 한 성씨의 시조 묘를 지키는 돌배나무는 굵은 줄기가 곧바르게 높이 자랐고 사방으로 가지가 균형 있게 뻗어
강건하고 의연한 기운을 풍긴다.
처음 찾아갔던 봄날에는 막 가지 초리에서 둥근 첫 봉오리가 생기고 있는 중이었다.
겨우내 딱딱해 있던 나무에서 두근두근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봄철에 다투어 피는 다른 꽃들을 찾아가느라 열흘쯤 지나서가니 야속하게 꽃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아쉬워하며 염수당 안에 들어가 보니 김지대공의 후손인 청년이 돌배나무 이야기를 해주었다. 어렸을 때 아랫마을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커다란 돌배나무가 집보다 먼저 보였다고 했다. 어둑해져서 돌아올 때 집 밖에 서서 기다리는 어머니를 보는
것처럼 마음이 아늑하고 든든했을까. 이 돌배나무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어느 해 마당을 파는 공사를 했더니 마당 가운데까지
그 뿌리가 뻗어 있더라고 한다. 가을에 돌배가 많이 달려 나무 아래 배가 수북히 쌓여 사람들이 주워가곤 할 정도란다.
가을이 완연해져 돌배나무를 다시 찾아간다. 들어가는 길가 감나무 과수원에서는 마침 수확을 하는 중이다. 대나무 작대기로
영롱한 보석 같은 감들을 따는 중에 툭,툭 떨어진 홍시를 주워 먹으며 나무 밑에 닿는다. 나무는 탱자만한 황갈색 돌배들을 작은 잎새 사이로 주렁주렁 달고 있다. 아래에는 일찍 떨어진 귀여운 열매들이 여기저기 뒹굴고 있다. 사람들이 주워가지 않은 돌배는 벌레들이 배불리 파먹어 구멍이 패였다.
돌배를 주워 한 입 베어 먹어 보니 딱딱하고 단맛이 별로 없다. 지나가던 과수원 주인아저씨가 "서리 맞고 나면 달고 맛있어요."하고 일러준다. 어렸을 때 논밭에 풀 베러 왔다가 이 나무 밑에서 놀았다는 아저씨는 돌배나무 꽃이 피면 아랫동네에서도
훤하게 보였다고 기억한다. 나는 보지 못한 봄꽃을 아저씨의 기억을 따라가며 본다. "메밀꽃이 공중에 한가득 핀 것 같았지요."
요즘엔 큰 배보다 야생 돌배가 약효가 뛰어나다고 해서 돌배술도 담그고 효소도 만든다며 인기가 높아졌다고 한다. 이제 우리
토종 돌배나무의 미덕을 알아주나 보다. 사람들이 가치를 알아주건 말건 200년이 넘도록 자기 고유성을 잘 지켜온 이 곳 돌배
나무는 '나는 나'라고 말하는 듯 늠름하다.
글·그림=이선형·시인 andlsh@hanmail.net
이 老巨樹를 만나기 위해서는 유명한 한재 미나리의 본고장 '한재'를 넘어야 한다.
청도와 밀양을 잇는 25번 국도에서 902번 지방도로 들어서면 한재인데, 일반적으로 경북 청도군 청도읍 초현리 · 음지리 · 평양리 · 상리 일대를 한재라고 부른다.
남산과 화악산을 잇는 능선에서 남동쪽으로 향하고 있는 계곡이며 능선은 고개인데, 청도읍과 풍각 · 각남면을 가르는 '큰 고개' 이기에 한재라는 이름이 붙었다. 한
재 미나리의 유명세를 등에 업고, 봄이면 이 한재에 미나리가 지천인데 2월 말에 시작하여 5월까지가 제철이라고 한다.
이 한재의 복판 쯤에 상리(上里)가 있다.
아닌 게 아니라 마을 주변은 온통 미나리 재배용 비닐하우스 지천이다.
이 상리에 내가 찾는 老巨樹가 있다.
902번 도로 가에 '상리' 마을 이름이 크게 적힌 마을 알림돌이 하나 섰는데. 나무는 그 길 건너편(!), 좁디 좁은 산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야 한다.
어찌나 좁은 지 교행불가는 당근(!)이요 나 혼자 지나가면서도 자꾸 바퀴가 길 밖으로 빠지지나 않을까 신경 쓰이는 길이다.
그래도 높이 올라오면 전망은 좋은 법! 탁 트인 시야 속으로 들어오는 소위 '한재'의 모습이 그나마 오그라든 가슴을 탁 틔워준다.
사진 02. 나무는 이 상리 마을 알림돌 도로 건너편으로 이어지는 산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야 한다.
사진 03. 위로 오를 수록 한재 경관이 한 눈에 담기고...
사진 04. 계절에 걸맞지 않게 파릇파릇한 미나리 재배지 또한 시야에 들어온다.
사진 05. 염수재 앞.
산길 따라 한참을 오르는 외진 곳이라서인 지.. 쫄랑쫄랑 꼬리를 흔들며 달려오는 강아지가 유난히 반가워 한다.
사진 06. 돌배나무는 청도김씨 시조인 영헌공(英憲公) 김지대(金之垈)의 묘제인 염수재(念修齋) 앞뜰에 자라고 있다.
사진 07. 건축자재가 부족한 어려운 시기에도 이 나무를 베어쓰지 않고 잘 보호하여 온 지역주민들과 청도 김씨 문중의 자연보호사랑을 후세에 전할 수 있는 귀중한 나무이다.
경북기념물 제119호 청도 상리 돌배나무. 지금 내가 찾아가는 老巨樹의 정체다.
이 나무는 고려시대의 문신이며 청도김씨 시조 영헌공(英憲公) 김지대(金之岱, 1190-1266)의 묘제인 염수재(念修齋) 앞뜰에 서 있다.
수령은 약 200년, 나무의 높이는 18m, 둘레 3.68m이다. 마을사람들에 따르면 1809년경 염수재를 이전할 당시에도 거목이었다고 한다.
다른 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돌배나무에 비해 열매가 크며 신맛이 강한 것이 특징으로, 돌배나무의 종과 변종 등 분류학적 연구에 도움이 되며 유전학적으로도 가치가 높다.
개량배가 들어오면서.. 우리 나라에 자생하는 돌배나무들은 대부분 벌목되어 사라지거나, 배나무 접목의 대목(臺木)으로만 쓰이기에, 이 땅에는 큰 나무들이 거의 없다.
이 돌배나무가 그 와중에 살아남아 이렇듯 老巨樹로 자리매김 될 수 있었던 데에는, 청도 김씨 문중의 보호를 받아온 것으로 본다.
사진 08. 청도 상리 돌배나무의 나이는 20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는 18m, 둘레는 3.68m이다.
사진 09. 외대로 곧게 솟아서 가지를 사방으로 뻗치는 것이.. 상당히 기품 있는 老巨樹다!
사진 10. 하나 하나의 가지마다 그 뒤틀림에서 세월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사진 11. 돌배나무의 일반적인 특징인 모양인데.. 나무가 오래 되면 수피가 갈라지는 모양이 꼭 감나무와 유사하다.
얼핏 겨울철에 수피만 보고선 감나무로 착각할 수도 있지 싶을 정도다.
사진 12. 3.68m의 굵은 외대가.. 한 가문의 시조 묘소 앞에 선 나무로서의 기품을 더한다.
사진 13. 이곳 돌배나무는 열매가 큰 편이며 돌배 특유의 신맛이 강한 것이 특징으로, 돌배나무 변종연구에 귀중한 학술적 자료로 활용된다고 한다.
그런데, 염수재(念修齋)가 좀 이상하다.
첫 방문이라 구체적으로 뭐가 이상한 지 꼭 집어낼 수 없었으나.. 주변에 건축폐기물과 자재들이 널려 있는 등, 뭔가 어수선하고 정돈되지 않은 느낌이다. 재실을 증축하는 모양이구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 했는데, 그 때 재실의 주인 되는 분이 나오신다. 어디서 왔냐고, 무엇때문에 왔냐고.. 몇 마디 물으시더니, 대뜸 들어와서 커피나 한 잔 하고 가라신다. 그렇게 얼떨결에 따라 들어가서.. 재실 마루에 걸터앉아 주인 부부가 주신 캔 커피를 마시며 들은 이야기는, 사뭇 충격적이다! 올 여름 한반도를 강타하여 많은 무고한 인명을 앗아간 폭우. 그 폭우가 이곳 염수재 또한 덥친 것이다. 재실 안에, 내가 마루에 걸터앉은 곳과 같은 건물이 두 채가 더 있었다는데.. 무너진 흙더미 속에 깔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다. 그러니 내가 보았던 건축폐기물과 건축자재들은, 말 하자면 재해 복구를 위한 몸부림의 흔적인 셈이다.
내게 더욱 인상적이었던 건.. 이러한 천재지변을 겪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태연하신 주인 부부의 태도다. 그런 난리를 겪으셨으면서도 외지인이 찾아오자 커피 한 잔을 권하며 안으로 이끄는 은근한 인정(人情)은 시작에 불과하다. 나무 때문에 왔다고 말씀드렸더니, 배꽃 필 무렵에 오지 못함을 나보다 더 아쉬워 하시면서.. 대뜸 연락처를 적어놓으면 배꽃 필 무렵에 연락을 주시겠다는 거다.
사실, Blog 이웃님이신 Keminiti님의 사연을 통해 이곳 주인 내외분의 인정(人情)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던 바다. 내가 놀라운 것은.. 폭우로 염수재가 휩쓸려 무너진 상황에서도 평소와 조금도 다름없이 작동하는 이들 내외분의 인정(人情)에 대한 부분이다. 그것도 내가 먼저 말을 꺼낸 것이 아닌, 그 분들이 솔선하셔서... 이 부분은,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까지도.. 내게 너무도 많은 생각을 던져주는 화두다. 내게 이런 인정(人情)이 남아 있던가? 이분들의 이런 무한한 호의(好意)의 바탕에는 대체 무엇이 놓여 있을까? 내 눈 앞에 무너져 쌓인 흙더미들과, 또 내 옆에서 내 연락처를 적으며 꼼꼼하게 기록 남기시는 주인 분의 선한 얼굴을 번갈아 보면서.. 사람에 대해서 크게 배우고 온 발걸음이었다.
이 분들은 아마도 내년 봄에 내게 연락을 주실 것이다. 내겐 도리어 그 점이 부담이다. 이 분들이 연락을 주실 때.. 나는 과연 이곳에 내려와서 배꽃을 담을 수 있을까? 물리적 제약(거리, 시간)과 현실적 제약(근무, 생활 등)을 핑계로.. 혹시 밍기적거리지는 않을까? 집이 무너진 상황에서도 주인과 이방인이 한 약속을, 그 이방인은 주인만큼 비중 있게 간직할 수 있을까? 스스로를 돌이킬 수록 자꾸 작아지는 순간들이다. 무너진 염수재와 낙천적인 주인 부부.. 별로 어울리지 않는 두 모습이 자꾸 교차되면서, 이번 여행에서 결코 잊혀지지 않는 영원한 순간으로 내게 각인되었다. 부디 그 분들에게 복이 함께 하시길... (2011.10.03)
사진 14. 그런데.. 염수재(念修齋)가 좀 이상하다. 주변에 건축폐기물과 자재들이 널려 있는 등, 뭔가 어수선하고 정돈되지 않은 느낌이다. 처음엔 으레 그렇듯, 가문의 영광을 알리고자 재실을 증축하는 모양이구나~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 했다.
사진 15. 주인 분이 극구 커피 한 잔 하고 가라며, 염수재 안으로 안내하신다. 그러고 보니.. 주인 분의 복장도 작업복이다. 방금까지 일 하시다가 나 때문에 일부러 짬을 내신 듯...
사진 16. 염수재 산사태 현장. 저 위가 아마 청도김씨 시조묘가 아닐까 싶은데.. 그로부터 토사가 흘러 내려와서 염수재 건물 두 채를 집어 삼켰단다.
사진 17. 토사는 담장을 뚫고 그 아래로까지 흘러 내려갔다. 참.. 처참한 광경이다.
사진 18. 담장이 사라져서 오히려 탁! 트인 전망을 바라보며.. 주인 분 오히려 신선 같은 말씀만 하신다. 이곳에 앉아 바깥을 바라보고 있으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다는 둥... 듣는 내 자신이 오히려, 탁 트인 전망의 아름다움과 그 앞에 펼쳐진 처참한 광경 사이에서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아름답습니다!" 해야 하나 "안타깝습니다!" 해야 하나...
사진 19. 이 와중에도.. 주인 내외분은 개화기 때 연락을 주신다며 연락처를 적어 놓으셨다. 이 난리통에 외지인에게 커피 대접하고 개화기 연락 약속이라니... 집이 선 곳도 그렇고, 무슨 현실과 동떨어진 신선의 거처인 것만 같다.
사진 20. 이런 아픈 사연을 아는 듯 모르는 듯.. 돌배나무만 그곳에 무심히 서서 저 아래 한재를 굽어보며 섰다.